해결사-송언 목 차 1. 기습 2. 반격 3. 세력확장 4. 축제 5. 대도 6. 전문가 7. 모반 8. 함정 9. 망치 10. 배반의 끝 11. 과욕 12. 풍운 1. 기습 "에라이, 네에미 떠그랄……!" 연예부장이 고함을 지르며 발칵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악머구리 끓듯하던 밴드 소리가 정전이나 된 듯 뚝 그쳤다. 무대 위에서 허리를 꼬며 낭창낭창 춤동작을 연습하던 무희가 덩달아 몸놀림을 딱 멈추었다. 그러고는 멀뚱멀뚱 눈동자 를 굴렸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조명등이 뱅글뱅글 맴을 돌고 있 었다. 그랬으니 망정이지 연예부장의 안광에 지펴진 불길이 하마 터면 무대 위에까지 불시에 튕길 뻔했다. 연예부장이 씨근벌떡거리며 한 손을 허리에 척 걸쳤다. "야, 이 년아! 엉덩짝을 겨우 그 정도밖에 못 흔들어? 서방을 태우고 맷돌 밑짝을 돌릴 때도 힘아리가 그 모양이니? 갑작스레 허리통에 기브스를 했냐구! 그리 뻣뻣해서야 등신들 눈요기할 깜 냥이나 되겠느냐 그 말야. 씨파, 드러서 이 짓거리 오래 해먹겠 나." 그러고도 역정이 덜 풀렸는지, 눈구녕이라도 후벼팔 듯 삿대질 을 해대며 무작스레 무희를 칩떠보더니만, "예서 밥 벌어먹기 싫거든 휘떡 딴 곳으로 꺼지란 말야, 씨파!" 하고는 무희가 엉덩이 흔들던 꼴세를 재연해 보였다. "지금은 연습이니까 그렇죠. 몸살 기운도 있고요. 본격적인 쇼 무대에선 좆나게 흔들어댈 테니까, 한번만 눈감아 주세요, 네?" 무희가 그만한 일에 뭔 성화를 부리느냐며 격렬하게 자신의 엉 덩이를 흔들어 보이며 애교로 받아쳤다. 눈 딱 감고 흔들어대면 남들만큼 못 흔들어댈 자기가 아니라는 걸 즉석에서 증명해 보인 셈이었다. "저 년이, 겁대가리없이 날 까스르고 뎀벼드네……." 연예부장이 감정이 다소 가라앉았는지 투덜투덜하다가, "그래, 이 년아! 엉덩이 좀 흔든다고 살덩이가 닳아 빠지니?" 하면서 별안간 정신이 돌변한 사람처럼 자기 궁둥이를 중뿔나게 흔들어대면서 연해 잔투정을 보탰다. "기왕지사 흔드는 거 열불나게 좀 비틀어보란 말야, 씨파! 세상 에 공짜밥은 없는 법이니까. 제 몸뚱이라고 너무 사리지 말란 말 야. 헤퍼 닳아빠진 골패 속에 쇠말뚝을 처박아야 정신을 차릴 년!" 연예부장이 풀썩 궁둥이를 부렸다. "알았어요, 알았어. 요렇게 흔들면 되죠?" 무희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자신의 엉덩이를 까불대고는 생글 생글 웃으며 주둥일 놀려댔다. 일단은 연예부장의 눈길에서 벗어 나야겠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밤 무 대의 짠밥으로 솔찮게 이골이 박힌 무희 같았다. "저러다가, 빠구리 한번 트자고 필경엔 뎀벼들라!" 연예부장이 고개를 훼훼 내저으며 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 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요란한 밴드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무대 위에서 와그르르 쏟아져내려 온 밴드 소리가 이내 술 냄 새와 구두밑창 냄새 그리고 먼지로 뒤범벅이 된 양탄자 위를 신 속하니 기어가 반대편 벽면에 부딪쳤다. 이어 밴드 소리가 중구 난방으로 실내의 공기를 짓찧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선 무희가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허리를 요동치며 힘찬 율동을 선보였다. "빠순이 년들은 그렇다 치고, 쇼걸이니 밤무대 가수니 하는 년 들까지 저 모양 저 꼬락서니니, 클럽이 번창할 리가 있나!" 혼잣소리로 투덜대며 연예부장이 담배를 꼰아물었다. 그때 부장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연예부 똘마니 하나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철컥 지포 라이터 에 불을 당겨 부장의 입가에 대령했다. 그 동작이 흡사 잘 조련 된 사냥개 같았다. 부장이 곰방대를 빨듯 뺨따귀가 씸벅씸벅하도 록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천장을 향해 휘유휘유 내뿜었다. "뱀춤으로 끝내주는 푼네미를 하나 스카웃해 오던지, 아니 면……" 옆자리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똘마니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부 장의 비위살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눈치를 가늠했다. "아니면, 뭔 좋은 수단이라도 있다는 거야 뭐야, 짜슥아?" 부장이 고개를 뒤로 꺾고 담배 연기를 공중으로 내뿜으며 말을 퉁겼다. 때마침 곰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천장의 둥그런 조명등이 부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앵앵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하 는 구급차처럼 뱅그르르 뱅글 뱅그르르 뱅글 조명등은 연신 제 몸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마치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깔깔 대며 조롱을 퍼붓는 것 같았다. "요즘, 장안에 물쇼라는 게 유행을 타는 모양입니다. 술 췐 손 님들이 침을 겔겔 흘리면서, 게츰스레한 눈길을 시종 떼놓지를 못하더랍니다." 연예부 똘마니가 쪼르르 말을 주워섬겼다. "시종 눈길을 떼어놓지 못한다면 술은 언제 처먹누?" "앗다, 부장님도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그 놈들이 물쇼하는 푼 네미를 쳐다보면서 속으론 뭔 엉뚱한 상상들을 하고 자빠졌는 줄 알기나 하세요?" 신바람이 동한 똘마니가 어깨를 한 차례 추스르더니 계속해서, "하룻밤 끼고 놀면 속병이 싹 꺼지겠는데, 오랜만에 작대기를 삼처럼 푹푹 삶아 봐, 하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 따위 턱 없는 상상이나 하고 자빠졌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서서히 욕정 이란 놈이 시동을 걸게 되고, 일단 시동이 걸린 다음에는 몸뚱이 로 차차이 전염이 되어 내장 속에서부터 후끈후끈 불길이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자고이래로 불기운이란 상승하는 작용을 함으로, 자연 목구녕이 벗석벗석 말라붙게 되고, 그러면 뭐 더 볼 게 있 겠습니까? 맥주잔을 집어들고는 아가리 속으로 들입다 쏟아붓는 거지요. 우좌지간에 열에 들뜬 몸뚱이를 식혀줘야 하니까요. 아니 할 말로 주장군을 꺼내놓고 손장난을 놀자니 남우세스럽고 염치 가 앞을 가려 되겠습니까? 그때 더러 정신 사나운 놈들은 헛손질 을 하다가 맥주병을 자빠뜨리기도 하니, 일석이조로 매상을 올리 는 일도 발생하고 말입니다." 하며 떠벌떠벌 말했다. "하여튼 불알 쪽이나 찬 녀석들치고 정신 성하게 박힌 놈 찾기 가 하늘에 별 따기여. 저 따위 년들이 뭔 맛볼 건덕지가 있다 고……" 부장이 시큰둥하니 심사가 덜 풀린 듯 대꾸하자, "아예 그런 말씀 마십쇼. 그런 정신나간 작자들이 없으면 우린 누굴 믿고 이 장사를 해먹을 것이며, 업소에 딸려 있는 빠순이며 쇼걸이며 무명 가수들은 또 뭘 먹고 살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 까, 하루 저녁에도 두 탕씩 세 탕씩 허겁지겁 밤무대를 옮겨뛰는 하루살이 연예인들까지 몽창 굶어 죽게요?" 똘마니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미친 눔, 객쩍은 소리 좀 작작해라." 부장은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뱀춤이든 물쇼든 간에 무언가 참신한 것으로 레토 파리를 바꾸지 않으면, 이대로 버팅기기가 어려울 걸이요?" 가방끈이 짧아서 그런지, 아니면 오랜 습성에서 연유된 직업병 인지, 연예부 똘마니는 낱말을 제멋대로 바꿔치기하는 버릇을 입 에 붙이고 사는 녀석 같았다. 벌써 두 차례나 그런 증세를 드러 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게슴츠레'를 '게츰스레'로, '레파토리'를 '레 토파리'로 천연덕스레 뱉어내는 말뽄세가 그러했다. "니깐 눔이 무얼 안다고 자꾸 지껄여대니? 돌멩이로 주둥팩일 부벼놓을까 부다!" 별 신통스런 아이디어도 아니면서 재게 나오는 게 성가시게 느 껴진 모양이었다. 부장이 말을 퉁그리며 목자를 부라렸다. "공연히 제게 역정내지 마십쇼. 연예부가 요즘 하는 일이 뭐 있느냐고 꾸중을 들으시면 어쩌나, 제 딴엔 염려가 되어서……" "그만 듣기 싫으니까 저리 꺼져, 짜슥아!" 부장이 발칵 성깔을 돋우어 소리쳤으나 똘마니는 속히 꺼질 생 각을 않고 다시 토를 달았다. "뱀춤은 몰라도 물쇼는 요즘 한창 물이 오르고 있답니다. 신중 히 한번 고려해 보십쇼." "시끄리! 뱀춤이구 물쇼구 간에 이미 한물 갔다는 건 업소에 드나드는 정신나간 작자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상천 외한 쇼거리를 물어오기 전에는 내 앞에 얼씬거리지도 말엇! 츠 츳……, 저런 멍청한 놈들을 데리고 일하고 있으니 나부터가 한 심한 인간이지." 그러자 부장 똘마니가 꿍얼꿍얼 입엣소리를 삼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미처 5분도 경과하지 않아 쪼르르 다시 부장에 게로 달려온 똘마니가 무어라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그 애가 시방 어딨니?" 부장이 폭신한 소파에서 궁둥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신속히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대기실에 대기시켜 놓고 부나리케 달려오는 길입니다." 똘마니는 또 '부리나케'를 '부나리케'로 내뱉고 있었다. 병증이 어지간히 독하게 박힌 실없는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뭘 부리나케 달려오니?" 부장이 별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다는 투로 핀잔을 먹이자, "일테면, 말인즉 그렇다는 얘기죠. 부장 형님도 참……" 하고 내숭을 떨었다. "알았으니, 니 눔은 예 앉아서 게으름피우는 년들이 있나 잘 살펴!" "여긴 염려 푹 놓으시고 천천히 다녀오십쇼." 연예부 똘마니가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꺾은 다음, 다시 허리 를 꼿꼿이 폈을 때는 부장이 대기실 앞까지 이미 다 걸어간 다음 이었다. 연예부 부장이 신속히 대기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갔다. 대기실 안은 담배 연기로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었다. 공기가 탁해서 금방이라도 숨이 턱턱 막힐 듯했다. "담배 좀 작작 피워대라, 이 썩어죽을 년들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영업 개시하기 전에 오소리부터 잡을 일 있니?" 부장이 거칠게 욕지거리부터 내질렀다. "자긴, 속상할 때 담배 안태나, 머." 한 쪽 구석에서 쫑알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부장의 귓속을 간지 럽혔다. 대기실 안엔 벌써 서른 명 남짓한 아가씨들이 더러는 서 서 또 더러는 앉아서 시끌덤벙 떠들어 대고 있었다. 영업 시간이 임박할 때쯤이면 늘상 보아오는 눈익은 장면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허나 방금 들은 소리가 귀에 거슬려 부장이 사방을 두리 번거리면서, "시방, 언년이 쫑알거렸니?" 하고 사나운 눈빛을 내쏘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기가 그랬다며 발딱 일어나 자수하는 년이 없었고, 저 년이 그랬대요, 하며 고해바치는 씨알머리없는 년도 없었다. "숭악스런 년들, 냉큼 담배들 부벼끄지 못 하겠니!" 부장이 악의없이 소리치자 여기 저기서 담배를 끄느라 부산을 떠는 중에, 쫑알거리는 소리가 또 한쪽 구석에서 새어나왔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오늘 어째 일진이 사나울 것 같네." 그런 정도야 비일비재하게 있는 일이어서 더 들은 체하지 않았 다. 홀이 내다보이는 창쪽에서 자기를 맞이할 채비를 하고 섰는 두 아가씨 앞으로 부장이 뚜벅뚜벅 다가섰다. 한 아가씨는 클럽 에 들어온지 서너 달 되는 빠순이 민양이었고, 그 옆에 서 있는 아가씨가 오늘 새로이 스카웃되어온 민양의 친구일 것이었다. "승혜야, 인사 올려라. 연예부 부장님이시다." 민양이 껌을 잘강잘강 씹으며 성의없이 턱짓을 해댔다. "갖다 붙이는 말 뽀다구하며, 턱주가리 까불대는 수작하며, 그 래 가지고 어디 시집가서 나붓나붓 잘 살겠니, 이 년아?" 부장이 민양을 향해 눈을 희뜨고는, 곧 새로 데려온 아가씨의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그러자 민양의 친구 되는 아가씨가, "승혜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또박또박 말한 다 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본명이 승자인지 승옥인지 정말로 승혜인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몸매를 보니 군더더기 하나 없는 늘씬한 팔등신이었다. 살결은 흰 우유처럼 뽀얗고 하얬다. 얼굴의 생김새는 말머리처럼 겁없이 기다랗지도 않고 그렇다고 떡판처럼 넙데데하지도 않았 다. 삶아 껍질을 벗겨놓은 달걀처럼 갸름한 듯하면서도 동글동글 한 것이 제법 귀염성까지 겸비한 미인이었다. 코는 대가 지나치게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뭉툭한 주먹코도 아니고, 둥근 듯 날이 서고 날이 선듯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살풋 웃음을 머금을 때 보니, 부잣집 책장에 꽂혀 나란히 등을 내보이고 있는 전집류 장서처럼 치아가 매우 가지런했다. 눈빛은 백자 항아리에 담아놓은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저 월나 라의 서시가 되살아 온다해도 그보다 출중하지는 못하리라 싶었 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더니……!" 부장이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저런 물색 좋은 푼네미가 더러 더러 걸려드는 걸 보면,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란 말야, 씨파!' 하고 속으로 개탄했다. "잠깐, 자리에 앉아 얘기 좀 하지." 부장이 말하고 먼저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조급증이 라도 일어나는지 자기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곳 저곳에서 곱지 않은 눈길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피워 문 담배를 부벼끄기엔 머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우리 클럽으로 오기 전엔 주로 강남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부장이 새로 온 여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말투가 이 년 저 년 하고 욕지거리를 해댈 때와는 달리 나긋했다. 그러자 민양이 냉큼 나서면서, "강남에서 잘 나가는 애를 데려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다구 요. 부장님이 한턱 크게 내서야 할 걸요?" 하고 생색을 내었다. "내가 한 턱을 낼 일인지, 아니면 네 년 턱주가릴 잡아뽑을 일 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알 일이고……" 민양을 향해 곱지않게 미간을 찌푸린 뒤 곧바로 여자에게로 눈 길을 돌려, "강남에서는 주로 가수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하고 물었다. "노래도 잘 부르지만 춤도 일품이에요. 웬만한 쇼걸들과 견주 어도 별로 뒤지지 않을 걸요." 이번에도 역시 민양이 대신 대답했다. 그 통에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 부장이 빽 소리쳤다. "재재거리며 껴들지 말고, 입아귀 좀 닥치고 있지 못하겠니!" 그러고는 다시 여자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가수보다는, 우리 클럽에선 쇼걸이 더 시급히 필요한 입장인 데, 두 가지 다 겸업으로 뛰어볼 의향은 없나?" 하고 물었다. "차차 적응을 해가면서 결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지. 차차 의논해 보기로 하구. 그럼……" 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민양이, "잠깐만요, 부장님!" 부장의 동작을 정지시킨 다음, "승혜가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싶다던데요?" 하고는 싱긋 웃었 다. "가만 있어보자……, 사장님도 새로온 아가씨를 보면 무척 흐 뭇해 하시겠는데……. 좋았어, 사장님께 인사부터 드리자구." 부장이 인심쓰듯 허락했다. 민양과 여자가 자리에서 사뿐 일어 섰다. 그때 부장이 갑자기 뭔 생각이 들었는지, "미안 미안, 잠깐만 더 여기 앉아 있으라구." 하고는 대기실에 모여 있는 새끼 마담들을 불러모았다. 그 바람에 민양과 여자는 다시 자리에 주질러앉았다. 새끼 마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부장을 빙 둘러쌌다. 새끼 마 담이란 자기 밑에 네댓 명씩의 아가씨를 거느리고 있는, 군대식 으로 서열을 따지자면 분대장급에 속하는 클럽의 최하급 간부였 다. "오늘, 상무님이 조금 늦으신다고 해서 내가 대신 당부하겠는 데, 애들이 대충 집합 완료되는 대로 교육 좀 잘 시켜라. 엊저녁 처럼 양주를 몰래 쏟아버리다가 손님들에게 들켜 망신당하는 일 없도록 말야. 술마시다가 오줌을 싸는 것도 아니고 왜 바닥에다 찍찍 깔겨대냐, 미친 년들! 그리고 제발 너희 동족들끼리 쌈박질 좀 하지 말라고 상무님이 신신당부하시더라. 한솥밥을 먹는 년들 끼리 툭하면 드잡이를 해대니 드럽고 창피해서 원. 난 오늘 새로 스카웃해 온 아가씨 데리고 잠깐 사장실에 다녀올 테니까, 아무 쪼록 차질이 없도록 잘 알아서들 해. 나도 알고 보면 가련한 인 생이다, 알겠니?" "잘 알았으니 염려 붙들어매세요." 한 새끼 마담이 대표로 대답했고 나머지는 고개를 숙이며 끼들 끼들 웃었다.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실없이 웃기는 미친 년들! 이상이다, 해산!" 새끼 마담들이 툴레툴레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민양을 대기실 안에 떨궈놓고 부장이 여자를 데리고 대기실 뒤 편에 자리잡고 있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이란 사람은 의외로 젊었다. 이제 겨우 서른을 넘겼을까 싶은 나이였는데 키가 후리후리하 고 양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운동으로 단련이 된 사람 같았다. 빈틈없이 무척이나 견고해 보이는 체구였다. 어글어글하면서도 매서운 눈초리엔 처음 대하는 사람을 십분 압도하는 힘이 엿보였 다. "형님, 오늘 새로 스카웃해 온 아가씹니다." 부장이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사장에게 용건을 말한 후, "너도 사장님께 인사올려라." 하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사장님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승혜라고 합니다." 아까 대기실에서완 달리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눈을 치뜰 때 하얗게 드러나는 여자의 눈동자를 설핏 곁눈질하며 사장은, '보기 드문 미인이긴 한데, 눈빛 너머에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 리고 있군.' 하고 생각했다. "우리 형님의 명성을, 민양에게 귀동냥한 모양이지?" 부장이 눈치없이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물었고, "네. 친구에게 사장님 얘기를 듣고, 한번 뵈었으면 했어요." 여자가 젊은 사장을 빤히 쳐다보면 대답했다. "자리에 좀 앉지 그래." 사장이 말하고 먼저 소파의 가운데 자리로 가 앉았다. "네, 형님!" 하고 부장이 다시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보인 다음 여자를 앞세우고 조심스레 자리로 가 앉았다. 사장이 머무는 방은 클럽에서 가장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었 다. 실내 또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산뜻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소파 옆쪽에는 회의용 둥그런 탁자가 놓여 있고, 바 닥에는 고급스런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모든 것이 빈틈없이 잘 정돈되어 있는 방이었다. 그래서인지 엄숙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 다. "룸에 들어갈 아가씨는 아닐 테고, 쇼걸인가?" 사장이 부장에게 물었다. "강남 지역에선 주로 가수로 활동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부장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넌지시 사장의 의향을 떠보았다. "저희 클럽에선 가수 겸 쇼걸로 두루 활용해 봤으면 싶습니다. 형님 생각에는 어떤 것 같습니까?" "그건 연예부에서 알아서 하지." "잘 알겠습니다. 모처럼만에 군계일학을 스카웃하게 되서 벌써 부터 기대가 큽니다. 잘 키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장이 군계일학이란 낱말에 방점을 찍으며 응수했다. 아부끼 가 다분히 섞인 말투였다. 사장은 그러나 고개만 두어 차례 끄덕 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장이 조바심을 감추 지 못하며, "저어,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형님?" 하고 양손바닥을 부볐다. 사장이, 무슨 말이야, 하는 눈짓을 건네자, "쇼무대를 참신한 것으로 바꿔봤으면 합니다. 뱀춤이니 물쇼니 하는 것도 이미 한물 갔거든요." 운을 뗀 다음,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할 줄 아는 마술사를 포섭하여 색다른 쇼를 선보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한데 입맛에 맞는 마술사를 구하기가 쉽지만은 않더군요. 해서, 그것이 불가능 하다면 나체의 여인과 백마를 등장시켜 기상천외한 쇼무대를 연 출해 볼까 합니다. 굳이 이름이 붙인다면 애마부인 나체쇼가 되 는 셈이지요." 하고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제법 그걸싸하지 않느냐는 몸짓 같았다. "새로 들여온 아가씨 앞에서 못 지껄이는 소리가 없군." 사장이 가볍게 눈총을 쏘아붙인 다음, "그것도 연예부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뒤탈이 없도록 각 별히 조심하고." 당부하듯 일렀다. "애마부인 나체쇼는, 사실 오늘 새로 영입해온 이 아가씨를 보 는 순간 퍼뜩 떠오른 제 아이디업니다. 아가씨만 괜찮다면야 ……" 바로 그때였다. 옆자리에 얌전하게 앉아있던 여자가, "나보고 짐승과 나뒹굴며 나체쇼를 벌이라구요!" 하면서 자리 에서 일어서며 펄쩍 뛰었다. "앉지 그래. 말이 그렇다는 얘기니까." 부장이 사장과 여자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며 신속히 발뺌했다. "친구 말만 믿고 찾아왔는데 세븐 클럽이 이런 곳인 줄은 몰랐 네요. 제가 오지 말았어야 할 곳에 발을 들여 놓았군요. 그만 돌 아가는 게 좋겠어요." 여자가 성난 벌처럼 부장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만 나가 봐!" 사장이 묵직한 음성으로 부장을 나무랐다. "이 아가씨는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오해가 없도록 내가 잘 타일러 볼 테니 오늘 영업이나 차질 없도록 단도리 잘 해." "죄송합니다, 형님!" 부장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은 다음 군소리없이 밖으로 나갔다. "손님을 앉혀놓고, 차 한잔 대접을 못했군." 사장이 즉각 인터폰을 눌렀다. 비서실 아가씨가 문을 열고 들 어와 꼿꼿한 자세로 섰다. "여기, 차 두 잔만 갖다 줘." 젊은 사장이 말했다. "무슨 차로 할까요, 사장님?" 비서실 아가씨가 싹싹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껀 새삼스레 뭘 물어?" "네, 알겠습니다." 비서실 아가씨가 여자를 쳐다보았다. "커피로 주세요." 여자가 말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서실 아가씨가 신속 히 뒷걸음질치며 사장실을 나갔다. "사장님 역시, 저를 나체쇼에 내보낼 작정인가요?" 여자가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내 옆자리에 오래도록 앉혀놓고 싶군." 사장이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순간 여자는 어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전에는 결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미묘한 감정의 물살이 꿈틀꿈틀 몸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그같은 감정이 발각되는 게 싫었다. "농담을 즐겨 하시는가 봐요?" 여자가 슬쩍 사장의 시선을 비껴났다. "누가 그러더군. 아름다운 꽃은 꺾지 않는 법이라고. 가까이에 두고 오래오래 감상하는 것이 제격이라나. 하지만 나는 그 따위 발상에 동조할 수가 없더군. 꽃을 꺾어보지 못한 놈들의 넋두리 는 비위에 맞지 않아. 꺾을 건 꺾고 짓밟을 건 짓밟고……. 그것 이 내 성미에 맞지. 누가 뭐라든 내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왔어, 나는." 사장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전 결코 아름다운 꽃이 아닌 걸요?" 여자가 한껏 애교를 부리며 말을 받았다. "아가씨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내 마음은 불변이야. 그것 참 유감이로군." 사장 역시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여 두 사람 사이에 간둥 간둥 대화가 한동안 오가게 되었다. "저는 다른 여자에게 매어있는 남자는 딱 질색인데요?" "아직껏 그만한 여자는 못 만났어, 나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얘기를 친구에게 분명히 들었는 데두요?" "물론 내게도 여자가 있었지. 허나 지금은 혹이 하나 붙어있는 것 외엔, 이 세상에서 완벽한 자유인이야. 올해 네 살 된 아들 녀 석이 바로 그 혹인 셈이지." "이혼을……, 하셨나요?" "아니, 여자 쪽에서 견디지 못하고 훌쩍 떠나 버렸어." "사장님이 쫓아 버린 건 아니구요?" "떠난 여자가 그렇게 강변한다면 나로선 유구무언이야." "이건 반쯤 농담일 수도 있는데요……" 여자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제가 사장님께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여자라고 치고……, 사실 이 그렇더라도 절 오래오래 곁에 두시겠어요? 이를테면, 다른 사 람의 사주를 받고 제가 오늘 세븐 클럽에 자진해서 들어오게 되 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을 바꿔보자는 얘기지요. 만약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설마하니 사장님 마음이 지금과 같진 않을 테죠?" 하고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었다. 즉각적인 대답을 피한 채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가씨 말이 농담이 아니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어. 그것이 아 름다운 꽃을 꺾는 대가라면 사내로서 뒷말을 보탤 턱이 없지. 하 지만, 내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들어서 잘 알 텐데?" 사장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제 말이 농담으로 그치길 빌겠어요." "아니야, 아가씨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방금 알았어." 사장이 여자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자 여자가 성큼 한 걸음 적 극적으로 다가섰다. "저로서도 이젠 주저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밖에 나가서 술 한 잔 사주시겠어요? 여기서 공짜 술을 마시는 건 싫으니까요." "그 대신, 우리 클럽을 찾아올 때하곤 달리 순순히 빠져 나가 긴 어렵다는 걸 명심해야겠어. 또한 내가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는 것도 미리 알아두는 게 좋겠군." "물론,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왔어요."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쓸쓸히 미소지었다. 그렇듯 두 사람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클럽 밖에 는 점차 어둠이 깊어가고 있었다. 클럽 안은 그러나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고 어둠이 슬금슬금 구석진 자리로 물러나고 있었다. 홀이며 룸 안은 이미 절반 정도 손님들이 들어찬 상태였다. 쿵쾅 거리는 밴드 소리와 무명 가수의 노랫소리가 정신을 산란하게 뒤 흔들고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의 조명등이 숨가쁘게 교차하며 갖가지 무늬를 뿜어대고 있었다. 동서남북 네 군데의 간이 무대에선 쇼걸들이 등장하여 적나라한 몸동작을 질척질척 선보이고 있었다. 무대 왼 켠에 자리잡은 둥그런 스테이지에선 초장부터 술에 멱살을 붙잡 힌 남녀 군상들이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었다. 누가 먼저 맨 정신 을 벗어 던지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몸놀림이었다. 낮의 세계 가 물러가고 서서히 밤의 세계가 등장하고 있음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밤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클럽의 일손들도 덩달아 바삐 움직이게 마련이었다. 연예부장은 똘마니들을 닥달하면서 그 날 의 쇼프로가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신경을 곤두세웠고, 영업부장 은 콩콩팔에 새삼육 웨이터들을 상대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었다. "매상이 신통치 않아 큰일이다. 단골 손님들의 발길도 뜸해지 고, 느그들 대체 영업을 이 따위로 할 거니?" 한편, 총지배인은 아가씨들을 관리하는 맴버와, 마담들을 총괄 하는 상무를 불러다가 점잖게 훈시를 하달이고, 맴버와 상무는 또 자기들 나름대로 밑에 것들을 족쳐대고, 마담들은 또 자기들 이 거느리고 있는 새끼 마담들의 오금에 침을 놓느라 클럽 안은 돌연 활기를 띠는 것이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홀과 룸 안에 손님들이 거의 들어찼다. 이 제 얼마나 매상을 올리느냐, 각자 맡은 분야에서 본격적인 전쟁 에 돌입할 시간이었다. 룸에 들어가 있는 아가씨들은 속절없이 아양을 떨어댈 것이었 다. 그러는 짬짬이 안주삼아 교태를 어가며 손님들 눈길을 피 해 슬쩍슬쩍 물수건에 양주를 쏟아버릴 것이었다. 눈치 빤한 웨 이터들은 또 부리나케 룸 안을 들락거리며 깨끗한 재떨이를 대령 하는 체하며 양주 먹고 취한 물수건을 새것으로 교체하느라 부산 을 떨어대리라. 무대 위의 무명 가수들과 하루살이 연예인들은 목청이 쉬어터 져라 노래를 불러제낄 것이고, 쇼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시간 을 때우느라 허리 아래를 질정없이 비틀어댈 것이었다. 밤이 이 슥해지면 어우동 역할을 맡은 쇼걸이 적나라하게 스트립쇼를 선 보인 다음 치마와 저고리 다 벗은 알몸으로 손님들이 시끌덩범대 는 홀 안을 유유히 한 바퀴 순회하리라. 술 췐 남녀 손님들은 눈 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어우동의 알몸을 쳐다볼 것이고, 더러는 은근슬쩍 손을 뻗어 어우동의 엉덩이나 유방을 한번 만져보겠다 며 환호자약할 것이었다. 어느 구석진 자리에선 망양되도록 술의 포로가 된 주정꾼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서로 시시비비 를 가린답시고 설쳐대다가 결국엔 난장판을 연출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도 어김없이 싸움박질이 벌어졌다. 싸움박질없이 조용히 밤 시간이 마감되는 날은 가뭄에 콩나기 처럼 드물었다. 그 날의 싸움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가씨들끼리 의 드잡이였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손님들끼리 시비가 붙 은 것이 아니라, 이틀 연속 종업원 아가씨들 사이의 전쟁이라 자 못 심각한 국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장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대뜸 총지배인을 불러들였다. "대체 허구한 날 싸움박질을 하는 까닭이 뭐니?" 사장이 꾸짖듯 물었다. "알아보나마나 또 단골 손님 때문에 시비가 붙었을 겁니다." 총지배인이 허리를 굽실하며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마담들은 애들 단속을 어떻게 하는 거야?" 사장이 다소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톡톡히 혼뜨검을 놓도록 하겠습니다." 총지배인이 세수하듯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그러니까 평소에 애들 교육을 제대로 시켰어야지." "죄송합니다, 형님!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통감만 하지 말고 제대로 닦달을 해! 그리고……, 망치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머리 좀 식히고 돌아올 테니 그렇게 알고." "알겠습니다. 여긴 염려마시고 조용한 곳에서 좀 쉬십쇼." "여기도, 조용하지 않을지 몰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장이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총지배인을 가까이로 불렀다. 그 리고 나지막이 무어라 몇 마디 건넸다. "제가 책임지고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총지배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신있게 대답했다. 사장은 그 길로 보디가드 망치와 그 날 새로 들어온 여자를 데 리고 소리없이 클럽을 빠져 나갔다. 총지배인이 상무를 불러 드잡이를 벌인 두 아가씨를 취조하라 일렀다. 상무가 그 즉시 대기실 구석진 자리로 두 아가씨를 소환 했다. 두 아가씨가 으르렁거리며 상무 앞으로 다가왔다. "에라이, 이 개만도 못한 년들아! 니 년들이 우리 클럽 말아먹 기로 작정을 했니? 공손치 못하게스리 어째 손님들 앞에서 싸움 박질이야! 어제도 그랬으니 오늘도 그러자고 사전 모의라도 했 니? 성질 같아선 당장에 모가지를 댕강 자르고 싶다만, 우선 니 년들 싸움박질한 곡절이나 들어보자. 싸대기를 올려붙여도 시원 찮을 것들. 누가 먼저 얘기할 테야?" 상무가 댓바람에 욕설을 퍼대며 두 아가씨를 노려보았다. 하나 는 김양이고 다른 하나는 노양이었다. "저 좆을 빨 년이 내 단골 손님을 빼앗으려고 그러잖아요." 김양이 먼저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기 단골 손님 좋아하시네. 니 단골 손님이라고 마빡에 써붙 여 놓기라도 했어? 똑같은 빠순이 주제에 단골 더럽게 찾네." 노양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시끄리! 뭐 잘 한 짓이라고 나불나불 주둥아릴 까대니? 한 년 씩 차례차례 내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연을 늘어놔 봐. 들어봐서 같잖으면 치도곤을 앵길 테여. 자아, 김양부터!" 상무가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김양과 노양이 차례로 저간의 사 정을 토설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스토리였다. 신사장이란 놀쇠꾼이 세븐 클럽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것은 반 년쯤 전의 일이었다. 그때 신사장의 첫 파트너로 배정이 된 아가 씨가 김양이었다. 신사장이란 놀쇠꾼이 워낙 여자를 밝히는 작자 였는지, 그 날 밤으로 김양을 대동하고 나가 잠자리까지 연장근 무를 하게 되었었다. 룸에서의 팁 외에도 화대가 꽤나 두둑했던 모양으로 김양은 갖가지 방중술을 한껏 발휘하여 신사장을 넉다 운시켜 버렸다. 그 후 신사장은 발끝에 실이 매인 사람처럼 일주일이 멀다 하 고 클럽을 찾아오는 고정 고객이 되었다. 그러고는 그때마다 자 기 고정 파트너로 김양을 점찍었다. 그런 일이 차츰차츰 반복되 자 김양과 신사장 사이에 새록새록 정분이 샘솟게 되었던 모양이 었다. 김양 쪽에서도 신사장의 발길이 뜸할 때면 조용히 전화를 넣 어, "자기야, 나 안보고 싶어?" 어쩌구 하며 주둥이로나마 상대방의 귓속을 간지럽히곤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지 못하도록 담금질을 하려는 수작이었으 리라. 허나 실제로도 김양은 몸뚱이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 줄 것처럼 신사장에게 사력을 다 쏟은 모양이었다. 그 바닥에서 는 무엇보다도 돈이 제갈량이었으므로. 허나, 룸에서 손님들에게 서비스하며 밥먹고 살아가는 소위 빠순이라 일컫는 아가씨들의 열의 여덟 아홉은 말뚝서방이 따로 있기 마련이었다. 함으로 제 아무리 단골 손님이라 하더라도 마음까지 허락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어느 날 우연히 팁을 마구 뿌려대는 손님이 걸려 들었다고 해 서 대책없이 좋아하며 귀밑까지 입꼬리가 찢어지는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녀들 나름의 지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시간이 고무줄처럼 죽죽 늘어지는 오후에 즈이들끼리 모여앉아 화투장을 패대기치거나, 하릴없이 한담을 조잘거릴 때, "얘들아, 내 이야기 한 토막 들어볼텨?" 누군가가 변죽을 올리며 앞으로 툭 나선 다음, "어제 이 몸이 불쌍한 호구 하나 물질 않았겠어. 아 글쎄, 뼈다 귀도 없는 흐물흐물한 병신 새끼가 덜컥 걸려들었걸랑. 개새끼, 그 돈을 즈이 마누라한테 갖다줘 봐. 황송해 가지고 아이구 서방 님 하고 베개밑 공사현장에서 대번에 코맹맹이 소리를 질러대질 않겠느냐고. 또한 기분만 당긴다면야 온갖 간살을 부려대며 육탄 공격을 퍼부을 테고 말이야. 어디 그뿐이기만 하겠어? 삼백 육십 도로 태도가 확 달라져서 서방님 몸보신하라고 다음 날 아침 밥 상에 생달걀 두 개를 살짝 올려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자아, 여 기를 봐라. 이 돈다발이 바로 어제 그 병신 새끼가 찔러주고 간 것이란다. 화투쳐서 다 날려 버려도 아깝지 않은 돈이니, 염려 붙 들어매고 많이 많이 따가기나들 하셔." 하면서, 호구로 걸려든 손 님을 안주삼아 질겅질겅 씹어대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옆자리에서 턱살을 괴고 앉아 듣고 있던 동료 중에서 대개는 뒷소리를 받아주기 마련이라. "얘얘, 종작없이 그 따위 흰소리 나불대지 말아라. 여우같은 마 누라와 토끼같은 새끼들이 있다면 행여나 너한테 그 많은 돈을 물쓰듯 했겠니?" 하고 점잖게 응수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삼백 육십도로 태도가 바뀌면 그게 제자리니까, 백팔십도로 달라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고." 하며 말꼬투리를 잡아채듯 말문 을 열고는, "좌우당간에 말이야, 어제 이 몸은 아니꼽고도 드런 새끼를 만 나 헛다리를 긁지 않았겠어? 씨펄놈의 중늙은이가 손가락으로 자 꾸 밑구녕을 쑤시려들어 혼줄이 났다니까. 대번에 손모가질 탁 분질러 버릴까 하다가, 하도 안달을 해쌓길래 씨펄놈이 돈푼께나 있는 작자인가 싶어, 종당에는 아픈 것도 참아가며 뜨뜻한 아랫 녘을 슬그머니 대주었단다. 한데 알고봤더니 그게 꽝자 붙은 빈 털털이라. 나 원 재수가 옴붙으려니 별 거지 깡깽이같은 새끼가 다 걸려 들더라니까!" 하고 시새움 반 신세한탄 반으로 맞장구를 쳐주는 축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룸에서 술 먹고 놀다가는 손님들의 입장에서 보면, 팁 을 많이줘도 호구로 책잡히고, 팁을 안주거나 적게 줘도 씨펄놈 으로 욕을 얻어먹는 꼴이었다. 각설하고, 김양의 경우는 신사장과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 몸을 섞게 되면서 제법 남녀상열지사의 깊숙한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모양이었다. 동료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신사장은 김양의 애인 이자 든든한 패트런이었다. 은근하게 시새움하는 동료들이 생겨 날 지경이었다. 물론 다른 동료들 역시 하나 둘씩은 그런 단골 패트런을 장만해놓기 마련인데, 문제는 어떤 위인이 수돗물 쓰듯 이 거침없이 돈을 뿌려대느냐, 하는 것이 가치 판단의 척도였다. 신사장이란 놀쇠는 클럽에 올 적마다 한사코 김양만을 찾았다. 한 가지 음식을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는 성품인 모양이었다. 또 한 그때마다 베개밑 공사현장으로까지 김양을 데려갔다. 돈의 씀 씀이도 점점 커져서 처음 몇 차례는 호구 병신이란 놀림을 받았 으나 급기야는 일등급 놀쇠꾼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고, 미구에 는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호걸남아란 소리까지 들으며 그 위상이 십분 격상되었다. 여북했으면 하루는 여러 동료들이 있는 앞에서 김양이, "거시기 기교도 좋고 정력도 대단해서 내가 두세 차례나 홍야 홍야 홍콩 구경을 갔다 왔는 데도 싸지를 않는 거 있지? 나는 그 저 놀라우에!" 하면서 혀를 날름거리며 호들갑 방정을 다 떨었을 까. 한데 세상 일이란 게 본시 공평무사해서 한번 좋은 일이 있으 면 다음엔 안 좋은 일이 닥치게끔 되어 있는 까닭일까. 어느 날 신사장이 사전 연락도 없이 여러 놀쇠패들을 대동하고 클럽을 찾 아왔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김양은 마침 달거리를 하던 중이 었다. 게다가 몸까지 으슬으슬하여 클럽에 이틀째 출근도장도 못 찍고 집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이봐, 웨이타! 난 다 필요없으니 어여 김양이나 불러와." 신사장은 뭔 놈의 일편단심인지 다른 아가씨는 다 제쳐두고 퍼 떡 김양을 불러 대령하라 성화였다. "사장님이 예 오신 줄 알면, 골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매고 서라도 김양이 한달음에 달려올 일이겠으나, 몸이 아파 이틀째 결근하고 있는 애를 강제로 멱살을 붙잡아 대령할 수도 없고, 저 로서도 낙심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 인데 아파서 누워 있는 김양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만이 라도 다른 아이를 데리고 놀아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제가 꽃동 네 기교가 뛰어난 삼삼한 아가씨로 점지해 올리겠습니다." 신사장의 담당 웨이터가 그렇듯 극구 사정하는 통에 겨우 분위 기가 진정되었다. 그 날 김양 대신 새로이 신사장의 파트너로 배 정된 아가씨가 바로 노양이었다. 김양보다 육덕은 덜 실해 보였 으나, 눈가에 반지르르 색기가 도는 것이 자못 인상적이었다. 하 여 닭 대신 꿩이라는 생각이 은근짜하니 신사장의 마음을 흔들어 댄 모양이었다. 불콰하게 술기운이 차오르면서 신사장은 김양의 존재를 씻은듯이 잊게 되었었다. 게다가 자기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정성스레 시중을 드는 노양이, 신사장의 취기 어린 눈에 매 우 흡족했던지라, 처음의 불만은 천리 만리 달아나 버렸다. 하기 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열 계집을 준다고 마다할 놀쇠패는 없는 법이었다. 그 날 신사장의 파트너로 새로이 배정된 노양은 평소 김양으로 부터 신사장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은근히 시새움을 키워오던 중이 었다. 하여 어떻게 하든 신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 벼르고 있던 터였으니 하회가 적잖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 다. 노양은 갖은 기교를 연출하며 자신에게 돌아온 기회를 움켜잡 기 위해 다양한 양질의 서비스를 기꺼이 제공했다. 신사장을 현 혹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방법을 자진하여 십분 발휘했다. 일테면, 신사장이 술잔을 뒤집는 즉시로 안주를 입 안에까지 신속하니 배 달해 주는가 하면, 자신의 섬섬옥수를 움직여 신사장의 허벅지 인근을 슬쩍슬쩍 문질러주기도 했다. 신사장이 치마 밑으로 더듬 더듬 손가락을 들이밀려는 낌새만 보여도, 제 편에서 알아서 기 는 식으로 제꺽 다리 사이를 벌려놓아 상대방의 손길이 그윽하고 편리하도록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듯 노력한 보람이 꽃을 피워 그 날 노양은 신사장으로부터 김양보다도 더 많은 팁을 우려낼 수 있었 다. 또한 잠자리에까지 픽업되어 후한 꽃값을 선불로 하사받았다. 하여 노양은 자신이 그때까지 터득한 옥방비결을 백퍼센트 이상 발휘하여 신사장을 깜북깜북 저승으로 보내 버렸다. "육덕은 네가 김양에게 뒤질지 모르겠으나, 속살의 감칠맛은 두 곱절쯤 나은 듯싶다. 쇠고기도 부위에 따라 각기 그 맛이 다 르다고 하더니, 여자의 속살도 피차일반인가 보구나. 내 다음에 갈 때는 너희들을 번갈아 찾으마." 신사장도 만족스러운 듯 노양을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나 하룻 밤 정사에도 의리가 있어, 두 아가씨를 어디까지나 공평무사하게 대해 줄 작정인 모양이었다. 김양의 존재를 아주 잊지는 않은 듯 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노양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첫술 에 배부르랴 하는 심정으로 다음 기회의 전술전략을 미리 염두에 두어보는 것이었다. 그 후 신사장은 클럽에 올 때마다 자신의 언약을 실현해 보이 기라도 하듯 번갈아가며 김양과 노양을 파트너로 찾았다. 그만했 으면 노양으로서도 큰 불만을 내보이며 툴툴거릴 계제는 아닌 듯 싶었으나, 본디 본처보다 첩의 성깔이 곰살궂지 못한 것이 상례 이듯, 신사장이 자기 대신 김양을 찾을 때는 속에서 부글부글 부 아가 끓어올랐다. 한편, 김양은 또 김양대로 자신의 고정 패트런을 인터셉트해간 노양의 행태가 눈꼴이 시도록 미웠다. 한솥밥을 먹고 사는 동족 인 까닭에 그러나 속으로만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허나, 마냥 속히 편한 것만도 아니어서 겉으론 태연을 가장하면서도, 한번 용코로 걸려드는 날엔 요절을 내버리리라, 작정을 한 채 속으로 별러오던 참이었다. 노양은 또 노양대로 신사장을 완전히 자기 쪽으로 돌려놓지 않 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여 난데없이 형성된 이녀일남(二女一男) 간의 삼각기류는 갈수록 그 골이 깊이 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항간 의 속설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신사장이 여러 놀쇠패들을 거 느리고 클럽을 찾아왔는데, 공교롭게도 말뚝동서인 김양과 노양 이 한 룸에 배치되어 손님들의 술시중 몸시중을 들게 되었었다. 신사장의 담당 웨이터가 김양과 노양이 견원지간이란 사실을 모 르는 바 아니었으나, 엄포 몇 방을 먹여 사전에 잡도리를 해둔 마당이어서 설마하니 드잡이까지 갈 줄은 몰랐었다. 구멍동서지간에는 서로 의좋게 지내는 경우를 더러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말뚝동서지간에는 예로부터 다정스레 지내는 실례 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교훈을 웨이터가 깜박 상실했던 것 같았 다. 아무튼, 속살이 제법 감칠맛이 나서 좋다던 노양보다는 그래도 첫정이란 게 더 마음을 끌어당겼던지 그 날 신사장의 옆자리에는 김양이 파트너로 앉게 되었다. 노양이 보기 좋게 판정패를 당한 꼴이었다. 한데 그 정도로 굴복해 버릴 노양이 아니었다. 노양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자기 파트너에겐 건성건성 신경을 쓰면서 시 종일관 김양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신사장에게로 색기 그득한 눈 길을 던지며 먼거리 교감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다른 파트너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계속 추파의 그물 을 던지고 있는 노양이 신사장의 눈엔 매우 갸륵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양의 태도야말로 임 향한 일편단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여 이 참에 아예 두 여자를 양 옆구리에 끼고 걸판 지게 놀아볼까 하는 포부까지 출렁이게 되었다. 노양의 파트너에 겐 다른 여자를 불러다 앉히면 그만일 것이었다. 다행히 노양의 파트너 되는 놀쇠는 워낙이 주변머리가 없는 위인이었다. 그뿐만 이 아니라 여자 보는 눈이 현저하게 아랫질로 처지는 터수이기도 했다. 허나 신사장이 오해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 날 룸 담당 아가씨의 숫자가 넉넉치를 못해 웨이터가 고육지책으로 말뚝동서 인 김양과 노양을 한 룸에 배치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신사장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김양은 노양 의 추파가 눈꼴이 시어서 환장을 하다못해 반쯤 미치다가 펄쩍 뛸 노릇이었다. 노양의 얼굴에 앙칼지게 손톱 자국이라도 그어놓 지 못한다면, 겨우겨우 가라앉은 변비가 도져 항문이 콱 막혀 버 릴 것만 같았다. "노양을 아예 이리로 불러 앉히고 호연지기로 한판 놀아볼까 부다!" 신사장이 남의 속도 모르고 김양에게 들어보라는 듯 그렇게 눙 쳤을 때였다. "나는 싫어! 저 따위 년하고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 죽을 맛이라구요!" 김양이 발끈 토라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룸 밖으로 나갈듯이 씩 씩거렸다. 마치 그런 기회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듯, "그렇다면 마침 잘 되었네, 머. 내가 대신 님 계신 자리로 옮겨 가면 되지." 하면서 노양 역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신사장 쪽 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개와 원숭이가 신사장이란 외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 고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먼저 머리끄덩이를 잡아 챈 것은 신사장의 옆자리를 선점한 김양이었고, 그에 질세라 맞짱을 뜨자며 길길이 날뛴 것은 노양이었다. 그 날 일남(一男)을 사이에 둔 이녀(二女)의 드잡이 사단이 결국 그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었 다. 어쨌든 웃음 섞인 교태와 터럭 아래 육질을 밑천삼아 살아가는 그네들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사랑 싸움이라고 보기엔 왠지 아귀 가 안맞는다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일종의 이권 다툼이라고 보 는 것이 좀더 타당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허나 업소를 운영하는 측에서 보면, 사랑 싸움이든 이권 다툼 이든 간에 같잖은 짓거리로 밖에는 납득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해서 김양과 노양의 저간의 사정을 다 듣고 난 상무가, "똑같은 밑천을 가지고 엇비슷한 주제로 살아가는 년들끼리 잘 들 놀고 자빠졌다. 누이 좋고 매부도 좋고 하는 그럴싸한 말도 있거니와, 구멍동서고 말뚝동서고 간에 어차피 동서지간이 된 마 당인데, 어째서 서로 잡아 먹지를 못해 안달방아를 찧어대냐, 느 이 년들은? 우리 클럽에서 밥 벌어먹고 살기가 그만 귀찮아진 모 양이구나. 그래 내가 어찌 해줘야 정신머리들을 차리겠니? 느이 년들의 드잡이하는 꼴을 보고 식겁을 한 신사장이 클럽에 발길을 딱 끊어 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책임들을 질테냐? 새우 싸움에 고 래등 터진다고 니 년들은 우리 업소가 망해가지고 문을 탁 닫아 걸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니? 쓰리고 따끔따끔하도록 거시기 속에 고춧가루 둬 숟갈씩 처넣고 달걀로 구멍을 콱 막아버려야 된맛을 알겠니, 엉!" 하고 끔찍스런 욕설로 김양과 노양의 아랫도리를 저 릿저릿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홀 안에서 우당탕탕 쿵쾅쿵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밴드 소리가 딱 멈추었다. 이어 누가 죽기라도 했는지 고막을 찢는 비 명 소리가 밤의 장막을 헤치며 낭자하게 울려 퍼졌다. 상무가 기급을 하여 홀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는 무대 위며 홀 안이 이미 난장판으로 돌변한 다음이었다. 십수 명의 건장한 주먹들이 들이닥쳐 각구목과 쇠파이프와 일본도를 휘두르며 닥치 는 대로 클럽 안을 박살내고 있었다.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주먹들의 난동을 저지하기 위해 연예부장 이 웨이터들과 클럽을 사수하는 일군의 졸개 주먹들을 데리고 아 귀아귀 덤벼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역부족임을 절감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바람에 몇몇이 기습조가 휘두른 칼을 맞 고 피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졌다. 벽과 천장과 양탄자 바닥을 가릴 사이도 없이 피가 럭비공처럼 정신없이 튀었다. 난데없는 피비린내로 홀 안은 도살장을 방불케 할 지경이었다. 아수라장도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 화닥닥 술기운에서 깨어난 불알 달린 남자들은 쥐구멍이라도 찾으려는지 탁자 밑으로 의자 밑으로 대가리를 처 박기에 바빴다. 무대 위에서 으악으악 노래를 부르짖던 하루살이 연예인과, 간이 무대 곳곳에서 젖가슴과 아랫도리 근처만을 겨우 가린 채 춤을 선사하고 있던 쇼걸들. 그리고 나머지 불알 안 달 린 여자들은 구석구석에 퍼더버리고 앉아 제 귀를 양손으로 틀어 막은 채 악악 비명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갑자기 3차세계대전이라도 발발했나 싶었던지 이곳 저곳 룸의 도어가 열렸다. 눈알을 희번덕거리는 고급한 손님들의 실성한 듯 한 모습도 보였다. 혼비백산한 일군의 무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안전지대를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광경을 쳐다 보면서 상무는 순간적으로 본정신을 잃은 듯 비척거렸다. 실오라 기 하나 걸치지 않은 스트립쇼의 여왕 어우동이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산발한 채 헐레벌레 대기실 안으로 뛰어 든 것은 그 무렵 이었다. 총지배인은 어디에 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격을 시도하여 놈들의 기선을 제압하기엔 때를 이미 놓쳐 버렸다는 판단이 들었다. 상무는 막 막했다. 그때였다. "모두, 그 자리에서 대가리 처박앗!" 기습조의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 안에서 몸뚱이를 움직이던 무리들이 일제히 원산폭격하듯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기습조의 우두머리는 날이 번득이는 일본도를 지팡이처럼 짚고 무대 위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십수 명의 건장한 주먹들이 방호벽을 둘러치고 있었다. 상무는 얼핏 대기실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꼴들 보기에 참 더럽구나. 단체 사진이라도 한 방 박아주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술이나 처먹고 놀아난 죄값이라 생각해라. 오늘은 이쯤 하고 돌아가겠지만 다음 기회엔 용서없다!" 기습조의 우두머리가 까닭없이 그런 신소리를 내뱉으며 킬킬거 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좌우의 주먹들을 향해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모두들 신속히 철수해라!" 우두머리의 뒷자리에 서 있던 중간 보스의 명령이었다. 그와 동시에 십수 명의 기습조들은 삽시간에 홀 안을 빠져나갔다. 총지배인이 영업부장과 행동대장을 위시하여 십여 명의 덩치들 을 대동하고 비상구를 통해 홀 안으로 뛰어들어왔을 때는 기습조 의 후미가 홀 밖으로 마악 꼬리를 감추고 있을 때였다. 행동대장 이 몇몇 덩치들과 함께 후다다닥 기습조를 뒤쫓으려 했을 때였 다. "멈춰!" 하고 총지배인이 덩치들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 중의 몇을 가까이로 불러 세우고는, "오늘 전쟁은 이미 끝났다.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뒤를 밟도록. 놈들의 정체만 파악되면 뒷일은 내가 형님과 상의해서 처리한다. 속히 떠나라." 하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머지 덩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은 부상자를 신속히 병원으로 후송해라. 짭새들이 냄새 맡지 못하도록 뒷수습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 명심하 고. 그리고 나머지 인력들은 전원 무대와 홀 안을 원상복구하는 데 투입된다." 하고는 즉석에서 후송팀과 원상복구팀으로 인원을 분류했다. 부상당한 졸개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하나는 팔이 부러졌고, 둘은 머리통이 깨졌으며, 나머지 둘은 칼에 배를 찔려 선혈이 낭 자했다. 그 중의 하나는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와 응급처치가 불 가피했다.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은 하얗게 겁에 질려 있 었다. 그러나 다섯 명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의 부상이었 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클럽을 찾아온 손님들 중에는 가벼 운 타박상 외에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 다. 그런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계획적으로 어떤 조직이 개입되 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근의 불량배들 소행은 결코 아니었 다. 인근의 불량배들이라면 그런 무모한 기습을 감행할 까닭이 없었다. 총지배인이 이번엔 상무와 맴버를 불러놓고 지시했다. "손님들을 안심시키도록 해. 특히나 단골 고객들의 마음을 잘 달래라. 오늘 일로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말야. 행여 발길을 딱 끊게 되는 날이면 당분간 클럽을 운영하는데 고전을 면키 어려울 게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상무와 맴버가 허리를 접으며 동시에 대답했다. 총지배인이 마지막으로 연예부장을 불렀다. "신속히 무대 위를 정돈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밴드 를 울리도록 해. 쇼걸들도 잘 다독거려 무대 위에 세우도록 하 고." "그렇지 않아도 방금 그렇게 지시하던 중이었습니다." "알았어. 잘 해봐." "네, 연예부 쪽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무대와 홀 그리고 룸 안이 신속하게 정돈되고 서 서히 본래의 분위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클럽 본래의 분위기를 되찾은 듯했으나, 이미 질겁을 하여 혼이 달아 난 손님들의 마음까지 진정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부분의 뜨내기 손님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줄줄이 클럽 밖으로 이 미 빠져나갔다. 일부 단골 고객들만이 맴버와 마담의 설득에 못 이겨 마지못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룸에서 서비스하는 아가씨들마저 대부분 반쯤 혼이 달아나 있었다. 함으로 맴버와 마담의 주문사항을 십 분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의 영업은 이미 물 건너 간 것 이나 진배없었다. 그같은 상황을 다시금 간파하고 총지배인이 조 용한 방으로 다시 상무를 불렀다. 상무가 들어와 자리에 앉자 총 지배인이 지시사항을 다시 하달했다. "뒷수습하는 데 차질없도록 신경을 쓰되, 분위기가 어지간히 제 자리를 찾으면, 그때는 남아 있는 손님들의 양해를 구하고 문 을 닫아도 좋다." "알겠습니다. 지시한 대로 하겠습니다." "난 형님을 만나 긴급 상황부터 보고할 작정이다. 그리고 형님 모시고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곧바로 연락을 취하겠다. 남상 무는 비상 대기하고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 지정된 장소 로 신속히 모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 부장급 이상 간부들을 전원 집합이다!" "떠날 때 클럽은 누구에게 맡겨놓는 게 좋을까요?" "영업부장에게 나머지 애들 집합시켜 지키라고 해. 2차 습격은 없을 테지만, 만일을 대비해 경계 태세에 만전을 기하라 이르고." "네, 말씀대로 지시하고 연락주시는 대로 곧장 뒤따라 가겠습 니다." "그리고……, 놈들의 뒤를 밟으러 간 애들이 돌아오면, 다른 곳 에 가지 말고 클럽 안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물어온 정보가 있던 없던 간에." "잘 알겠습니다." "됐다. 그럼, 망치와 통화하게 전화 연결해라." 상무가 즉시 사장의 보디가드인 망치와 비상 연락을 취했다. "전화, 연결됐습니다." 상무가 총지배인에게 송수화기를 넘겼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총지배인이 물었다. "형님 모시고 가까운 관광호텔에 와 있습니다." 망치가 대답했다. "알았다. 지금 그리로 갈테니, 형님께 내가 곧 가서 뵙겠다고 전해라." "물론이죠. 그런데, 클럽에서 뭔 일이 있었습니까?" "별 일 아니다. 가서 자세히 얘기하마." "네, 저는 1층 커피숍에 있습니다. 일단 이리로 오시죠." "알았다, 늦어도 30분 안으로 도착하겠다." 통화를 마친 총지배인은 그 길로 클럽을 나섰다. 그리고 직접 차를 몰고 사장이 머물고 있는 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랑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 새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렇다면, 기습조가 클럽을 습격해 온 시각은 자정이 임박한 시점이란 계산이었다. 그 시간대라면 홀 안의 분위기가 최고 절 정을 이룰 시간이었다. 치밀한 계획 하에 클럽에 결정적인 타격 을 입히기 위한 기습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으음, 대체 어떤 놈들일까?' 총지배인은 이리저리 머리를 회전시키며 힘차게 전진하는 페달 을 밟았다.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2. 반격 클럽이 기습조의 습격을 받고 난장판이 되었을 시점에 사장은 여자와 함께 호텔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장이 머리맡에 놓았 던 담배갑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때 여자는 사장의 어깨에 얼굴 을 뭍은 채 더듬더듬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감적으로 눈치를 채고는, "담배 피우시게요?" 하고 속삭였다. 사장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곧장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머리맡의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그 바람에 여자 의 팽팽한 젖가슴이 이불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잎새 사이로 드러난 두 개의 탐스러운 조롱박 같았다. 사장이 말없이 손을 뻗 어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여자가 자기의 한 손을 가져와 사장의 손 위에 포갰다. 그리고 다른 손을 사용하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휴우 하고 한 차례 연기를 내뿜더니 바로 사장의 입술에 필터 끝을 물렸다. 여자를 데리고 클럽을 나선 사장은 곧바로 호텔의 스카이라운 지로 왔었다. 보디가드 망치가 그림자처럼 두 사람의 뒤를 따랐 음은 불문가지. 그때가 밤 10시를 막 넘어선 시간이었다. 두 사람 은 느릿느릿 칵테일 한 잔씩을 마시고는 곧바로 호텔 룸으로 내 려갔다. 이따금 혼자 와서 머리를 식히고 가는 사장의 단골 룸이 었다. 여자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렇다고 싫다거나 두려워하 는 자취도 없이, 사장을 따라서 룸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모습이 룸 안으로 사라지자 망치는 곧장 1층 커피숍 으로 내려갔다. 사장과 여자는 오랜 연인 사이이기나 한 것처럼 거침없이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격렬하게 서로 의 몸을 구석구석 탐색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맞댄지 불과 서너 시간만에 두 몸뚱이가 하나로 뒤섞였다. 젊은 사장도 그랬지만 여자 역시 신속한 결합에 대해 그러나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어쩌면 클럽의 생리를 잘 아는 두 사 람의 만남이었기에 가능한 정사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럽의 생리를 잘 안다는 것은 클럽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남녀 군상들 의 생리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과 같았다. 정사를 나눔에 있어 격 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 생리 중의 하나였다. 아니, 그 따위 격식 자체를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부류라고 보아야 옳을 것 이었다. 아무튼 여자와 더불어 일합을 마친 다음 사장은, '실로 오랜만에 명기를 만났군.' 하고 매우 흡족해 했다. 숱한 여자를 상대해 본 그였지만 명기를 접해보기는 참으로 오 랜만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서였을까. 사장은 클럽을 나서 면서부터 머릿속으로 호텔의 룸을 떠올렸었다. "밖에, 비가 내리나 봐요?" 여자가 말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사장의 가슴에 가만가만 얼굴을 부벼댔다. "그렇군, 오랜만에 비가 오는 것 같군."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난 말예요." 여자가 고개를 들어 사장을 빤히 쳐다보더니, "비가 오는 날이면 어쩐지 섹스를 하고 싶어요. 아주 오래도록. 비가 그칠 때까지 계속. 사장님은 그런 느낌 받아본 적 없으세 요?" 하고 물었다. 조금도 쑥스러운 기색없이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게 놀라웠 다. "비와 섹스가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얘긴가?" 사장이 되묻고 속으로 생각했다. 장마가 지면 큰일 나겠군, 하 고. "그런 모양이에요. 비가 오면 갑자기 우울해지고, 우울해지면 섹스를 하고 싶고, 섹스를 하고 나면 울적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 앉는 것 같거든요. 눈발이 날릴 때는,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 보고 싶은 마음뿐인데, 비 오는 날은 안 그래요. 아무래도 병인가 봐……" "전염성만 없다면야 나쁠 것도 없지 않겠어? 비가 내리는 날에 만난다면 거추장스럽지 않아 좋을 테고. 휴우……" 사장이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진짜 병이라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여자가 벌거벗은 몸뚱이를 사장에게로 바싹 밀착시켰다. "그런 걸 병이라고 진단할 의사도 없을 테고, 행여 고약스런 병이란 진단이 나오더라도, 굳이 고치려고 덤벼들 의사가 있을까 모르겠군." 그때 뚜루루룩 하고 전화벨이 울었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밤 중에 무슨 전활까요?" 하고 사장을 쳐다보았다. "날 찾는 전활 테지. 수화기 이리 주고 담배 좀 끄지 그래." 사장이 여자에게 피우던 담배를 넘기고 송수화기를 받아들었 다. "누구야?" 사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망칩니다, 형님!" "무슨 일이니?" "총지배인이 형님을 곧 찾아뵙겠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해서 1층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았다, 잠시 후에 내려갈 테니 기다려라." "클럽에서 일이 벌어진 모양인데 짚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시끄럽다. 그만 전화 끊어." 전화를 끊고 사장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여자가 누운 채 말 똥말똥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했던 것보단 일을 빨리도 치렀군 그래." 사장이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었다. "클럽에서, 뭔 일이 벌어지기라도 했다는 얘긴가요?" 여자가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않고, "이름이……, 승혜라고 했던가?" 사장이 물었다. 여자가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여자를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아까 승혜가 클럽에서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보고가 들 어왔어." 하고 말했다. 여자가 대답없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직껏 벌거벗 은 채였는데 사장은 어느 새 옷을 다 입었다. "나는 지금 가봐야겠어. 천천히 돌아가라구." 사장이 1층 커피숍으로 내려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약속이, 아까와 틀리잖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사장의 발목을 휘감았다. 사장이 몸을 돌려 차가운 눈길로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는 침대에 앉아 이부자락으 로 상체를 가리고 있었다. 여자가 사장을 향해 슬픈 눈망울을 굴 렸다. "저를……,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사장이 실쭉 웃어보였다. "천천히 돌아가라는 지금의 말은, 무슨 뜻인가요?" 사장이 여자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구김살 없는 얼굴에 아름다운 몸을 지닌 미인이라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건, 마음 편한 쪽으로 생각해도 좋아." "저는 그 약속을 믿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가봐야겠는 걸. 조직과 일이 우선이니까. 다른 데로 갈 작정이 아니라면 나중에 와서 데려가지." "됐어요,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요." 여자가 천천히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천장으로 곧은 시 선을 던졌다. 뚜벅뚜벅 걸어서 도어를 열고 사장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커피숍으로 갔다. 총지배인과 망 치가 나란히 앉았다가 꼿꼿이 일어섰다. 사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총지배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클럽에 기습조가 들이닥쳤습니다, 형님." 사장이 짐작이 된다는 듯한 눈짓을 건넸다. 총지배인이 피해 정도 및 부상자 상황 그리고 뒷수습까지 상세히 보고한 다음, "그런데 말입니다. 놈들이 형님과 망치가 자리를 비운 틈을 정 확히 포착하고는 신속하게 치고 빠졌거든요. 저는 그 점이 왠지 미심쩍습니다. 누군가 놈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게 틀림없지 싶습 니다." 하고는 사장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미 알고 있었어. 놈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그걸 파악하려 고 망치 데리고 일부러 자리를 피해줬을 뿐이야. 어차피 당해야 할 기습이라면 우리 쪽에서 먼저 기회를 줘보는 것도 나쁘진 않 겠지. 열 순사가 한 도적을 막아내지 못하는 법이니까. 다행히 대 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으니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무게를 실려있는 사장의 말이었다.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책을 세워야 하질 않겠습니까?" 총지배인이 물었고, 사장 대신 망치가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되로 받았으니 말로 갚아줘야죠.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제 발로 걸려 든 놈들을 그냥 나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형님?" "간부급들을 비상 대기시켜 놨습니다. 형님이 명령만 내리시 면……" 망치의 말에 힘을 얻은 듯 총지배인이 다시 말했다. "알았다. 남쪽 하우스로 전원 집합시켜!" 이윽고 사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남쪽 하우스는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대책을 숙의하는 조직의 비밀장소였다. "지금 곧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총지배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사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30분쯤이 지난 후 일곱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남쪽 하우스로 모여들었다. 클럽의 젊은 사장을 비롯하여 총지배인 쌍 칼, 상무인 남욱, 맴버인 감초, 연예부장 단검, 보디가드 망치, 행 동대장 꾀보가 바로 그들이었다. 영업부장 만두는 클럽을 지키기 위해 현장에 남았다. 사장이 가운데 자리에 앉고 좌우로 세 명씩 도열하듯 앉았다. 마치 삼정승 육판서가 임금을 상좌에 모시고 앉아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흐른 뒤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 다. "의견이 있으면 누구든 먼저 얘기해 봐." 그리고 좌우 여섯 명의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제가 먼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하고 총지배인 쌍칼이 입을 열었다. 좌중의 시선이 일시에 쌍칼에게로 쏠렸다. "열흘쯤 전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클럽과 거래를 트고 있는 주류도매업체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암유통이라고 있질 않습니 까? 거기서 사람을 보내왔더군요. 처음엔 점잖게 거래를 텄으면 좋겠다며 제법 사무적인 태도로 나옵디다. 해서 이미 거래하고 있는 업체가 있어 곤란한 청이라고 우리 쪽에서도 정중하게 거절 한 바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줄도 모르고 찾아와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면서 순순히 일어나 돌아갑디다. 한데, 그 다음 날 그 시간쯤 되었을 때라고 기억됩니다. 상암유 통의 영업부장이란 작자가 주먹으로 보이는 놈 둘을 대동하고 다 시 찾아왔습디다. 그러고는 대뜸 사장님을 만나 직접 거래를 터 야겠다며 억지를 부리더군요. 해서 형님과 상의를 해볼까 어쩔까 잠시 생각을 굴려보았습니다만, 때마침 망치를 데리고 출타중이 어서 형님께 미처 말씀을 못드렸습니다. 어쨌거나 놈들을 잘 타 일러 돌려 보내야겠기에, 사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계실 뿐아니라 직접 만나뵙더라도 내 말과 다를 바 없으니, 용건이 있으면 말하 라고 했습니다." 그쯤에서 잠시 말을 중단하고 쌍칼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러고는 다시 좌중을 한 차례 휘둘러 시선을 장악한 다음 이야기 를 계속했다. "그랬더니만, 세상 일이란 것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요, 서로 다 알 만한 처지에 비싸게 굴지 맙시다, 보아하니 클럽이 제법 굴러가는 모양이던데 나중에 후회해서 좋을 건 또 뭐 있소, 같잖 게스리 주둥이를 까대면서 구둣발로 탁자를 툭툭 찹디다. 누가 보더라도 시비를 붙이려는 빤한 수작이라. 성질같아선 그 자리에 서 맥아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었지만, 클럽이 시끄러워져서 뭐 좋을 게 있겠나, 그리고 놈들의 수작이 빤한데 공연히 긁어부스 럼을 낼 건 또 뭐 있겠나, 잘 구슬러 보내는 게 좋지 않겠나, 하 는 생각이 퍼뜩 골치를 스칩디다. 해서 영업부장 만두를 불러 봉투를 하나 만들어오라고 슬쩍 일 렀지요. 만두가 군소리 않고 금세 봉투 하나를 만들어 가져옵디 다. 일부러 두 차례나 찾아주었는데 만족할 만한 답변을 못드려 죄송하다면서 봉투를 쿡 찔러주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술이나 한잔 꺾으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상암유통의 영업부장이란 녀 석이 맵살스럽게도 봉투를 훽 뿌리치면서, 사람을 뭘루 보는 거 냐, 우리가 구걸이나 하고 다니는 동냥치로 보이느냐, 내일 다시 한번 찾아올 테니 사장님 어디 나가시지 말고 대기시켜 놓아라, 하면서 겁대가리도 없이 마구 지껄여댑디다. 속에서 용광로 속의 쇳물같은 불덩어리가 치밀러 오르는 걸 겨우겨우 눌러 참고 곱게 어깨를 다독거려 돌려보냈습니다." 그때였다. 행동대장 꾀보가 자기 앞의 앉은뱅이 탁자를 주먹으 로 쾅 내리치면서, "아이구, 주먹이 운다, 울어! 쌍칼 형, 클럽에서 술장사하더니만 성질 많이 죽었수다!" 하고 핏대를 곤두세웠다. 꾀보는 꾀바르다고 해서 붙여진 고분고분한 별칭이 아니라, 전 쟁에 임할 때 윗통을 훌러덩 꾀벗고 덤벼든다고 해서 붙여진 사 나운 별칭이었다. 그래서인지 꾀보의 상체엔 유독 흉터 자국이 많았다. "입주둥이 닥치고 가만히 있지 못하겠니!" 사장이 꾀보에게 눈살을 꽂으며 호통쳤다. 꾀보가 찔끔 하고 고개를 숙였다. 좌중의 시선이 다시 쌍칼에게로 향했다. "그럼, 이야기를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쌍칼이 다시 입을 열어 탈레탈레 말 길을 밟아나갔다. "세상에 참 끈질기기도 하지요. 상암유통의 영업부장이란 녀석 이 그 다음 날 그 시간쯤에 클럽에 또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 겠습니까? 물론 그 전 날 대동하고 왔던 주먹 두 놈도 거들먹거 리며 함께 왔습디다. 나 역시 그 날은 고분고분 참고 넘어가지 않으리라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 심정을 이심전심으로 간파하고 있었던지, 곁에 있던 만두가 품 속에서 외낫을 꺼내더 니 댓바람에 상암유통의 영업부장 모가지에 탁 걸었습니다. 그러 고는, 목동맥을 끊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새끼들아! 하고 나머 지 주먹 두 놈을 향해 소리치며 목자를 상하로 부라렸습니다. 그랬더니만,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생 각을 고쳐 먹었는지, 영업부장이란 녀석이 허리를 굽실굽실하면 서, 다신 얼씬거리지 않을 테니 무기를 목에서 떼어놓아 달라고 사정사정합디다. 만두가, 다시 한번 내 눈 앞에 알짱거렸다간 등 짝에 칠성판을 걸머질 줄 알라고 오금을 박았습니다. 녀석이 그 러마고 또 사정사정하며 발이 손이 되도록 빕디다. 주먹 두 놈도 별다른 항거를 할 태세가 아니어서 아무쪼록 뒤탈이 없도록 고이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그만한 일에 겁들을 집어 먹는 걸 보고 대 단한 놈들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거지요, 이상입니다." 그리고,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끄더니만, "내가 먼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대강 이렇습니다. 덧붙여 한 말씀만 더 올리자면, 오늘 밤 우리 클럽을 습격한 놈들이 상암유 통과 음으로 양으로 깊은 연계를 맺고 있는 조직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 듭니다. 그리고 기습조가 철수할 때 눈치 빠른 애들을 몇 딸려 보냈으니 정확한 정보가 곧 입수되리라 봅니다." 하고는 두 릿두릿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좌중의 다른 시선들도 일시에 사장에게로 옮겨왔다. 사장은 순간 호텔방에 누워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를 다 그친다면 기습조의 정체가 단박에 드러날 것이었다. 사장이 고개 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여자의 영상을 지워 버렸다. 차마 조직의 보스로서 취할 방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장이 좌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보복 자체도 중요하지만 조직의 결속력을 재고하기 위해서라 도 반드시 놈들에게 반격을 가해야 한다. 타조직의 습격을 받고 도 그에 맞대응하지 못한다면 건달 세계에서 낙인이 찍힐 뿐아니 라, 그렇게 되면 곧바로 조직의 사망과 직결된다는 점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으로, 놈들의 정체는 차차 밝히기로 하고, 우선 보복을 가할 방법에 대해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도록 해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총지배인 쌍칼이 눈동자를 뙤록거리며, "형님이 허락하신다면 꾀보와 만두 그리고 애들 십여 명 데리 고 제가 직접 박살을 내고 오겠습니다." 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요, 형님!" 보디가드 망치가 선뜻 자원하자,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형님!" 하고 연예부장인 단검까지 앞으 로 나섰다. 망치는 복서 출신으로 주먹이 쇠망치 이상으로 강력한 파워가 있다는 데에서 연유된 별칭이었다. 또한 단검은 검도 유단자 출 신으로 팔뚝만한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예닐곱 명쯤은 순식간에 잠재울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검이란 막대기고 술 병이고 간에 손에 잡히기만 하면 단검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상무인 남욱과 맴버인 감초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욱은 주먹과는 다소 거리가 먼 친구인데 클럽에서 잔뼈가 굵은 사장의 고향 후배였다. 사장이 클럽 경영에 손을 뻗친 것도 남욱의 권유 에 의해서였다. 맴버인 감초는 남욱과 마찬가지로 클럽을 텃밭 삼아 커온 친구라 주먹은 젬병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클럽의 아 가씨나 마담을 다루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남욱과 감초는 기습조를 보복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나설 위인들이 아예 못되었다. 남욱은 주먹 한 두 놈쯤 어떻게 맞붙어 싸워볼 만한 깡다구는 갖추고 있으나, 건달 세계에선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었다. 해서, 주먹 세계 건달들의 호적에 그럴듯한 별칭조차 아직 올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감초는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특성이 있어 별칭이 있는 셈이었다. "시끄럽다!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게 겨우 그 따위냐?" 사장이 불만스레 말을 퉁겼다. 그러자 클럽의 상무인 남욱이,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조직이 직접 나선다면 놈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 으리라 사려됩니다. 하지만 거기엔 각기 장단점이 따릅니다. 우선 장점부터 말씀드리면 형님도 지적했듯이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아니라, 건달 세계에 우리 조직의 힘이 건 재하다는 것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데, 문제는 놈들을 보복하는 과정에서 만의 하나 우리 조직 이 외부에 노출되어 짭새들로부터 집중적인 감시를 받게 되면, 클럽을 운영하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는 점입니다. 클럽 운영을 포기할 각오라면 모를까, 현재 조직 운영의 큰 자금줄인 클럽 운영에 타격을 입힌다는 것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 아닐까요? 여기로 두는 바둑에도 아생연후살타라는 경구가 있습 니다. 함으로 클럽 운영에 사활을 걸면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보복을 강행한다는 건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염려하는 단점입니다. 따라서 우리 조직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방안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상무인 남욱은 클럽에서 잔뼈가 굵어온 베테랑답게 클럽 운영 의 득실을 따져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사장이 고개를 끄 덕이며, "그렇다면, 그에 따른 해결책은 생각해 봤니?" 하고 물었다. "손자병법인가요,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전술에 대해 들어본 적 이 있습니다. 저 삼국지의 영웅 제갈공명이 위나라 조조 군사와 의 적벽강 전투에서 오나라의 손권을 움직여 연환계와 화공법으 로 대승을 거둔바 있질 않습니까. 바로 그와 흡사한 전술인데 다 른 조직을 움직여 놈들을 박살내는 게 현재로선 가장 유효적절한 방법이라고 사려됩니다. 철두철미한 보복과 조직의 안전을 동시 에 보장받을 수 있는 전술이지요." "그게 좋겠군. 그렇다면 어느 조직을 끌어드리는 게 합당할 까?" 사장이 흡족해 하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이이제이란 전술이 훌륭한 병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린 손도 대지않고 코를 풀려는 아주 비겁한 방법이 아닙니까? 저로선 찬 동하기 어렵습니다, 형님!" 행동대장 꾀보가 씩씩거리며 토를 달았다. "시끄럽다. 그 놈의 입주둥이 닥치고 있지 못하겠니!" 사장이 호통쳤다. 꾀보가 다시 한번 고개를 팍 꺾었다. 조직 내 에서 보스의 결정은 곧 법이었으므로, 이의를 제기한다는 건 반 기를 드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보스가 단안을 내 렸을 때 거기에 군소리를 보탤 수 없었다. 조직을 배반하고 떠날 용기가 없는 한 그랬다. "철저한 비밀을 보장받기 위해선 가급적 멀리 떨어져 있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직을 활용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욱이 말하자, 쌍칼이 제 무릎을 탁 치며, "목포에 있는 불나비파를 잠시 불러 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불나비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잘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하고 제안했다. "목포의 불나비라……, 믿고 맡길 만할까?" 사장이 곰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형님. 불나비는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쌍칼이 자신있게 불나비를 다시 천거했다. "좋다, 당장 상경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연락을 취해라." 사장이 쌍칼에게 지시한 다음, "그리고, 꾀보." 하고 행동대장을 눈으로 지목했다. "네, 형님!" 꾀보가 고개를 직각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너는 불나비파가 상경하는 대로 안전하고 깨끗한 숙소를 준비 해라. 클럽에서 너무 가깝지 않은 곳으로. 그리고 불편함이 없도 록 각별히 신경쓰거라. 망치와 수시로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점 잊지 말고, 알겠니?" "네, 형님. 전쟁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됐다, 오늘 회담은 이것으로 끝낸다." 사장이 폐회를 선언했다. 그것으로 기습조 반격에 대한 대책회 의는 일단락되었다. 누구 한 사람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조직의 생명이란 보스가 한번 결정하면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어 간단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조직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건 아니었으나, 결전을 앞두고 술을 나누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남 욱이 인터폰을 이용하여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때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듯 5분도 경과하지 않아 하우스의 주인이 직접 아가씨 하나를 데리고 양주 세 병과 이미 장만해 놓은 안주 를 가져왔다. 장방형의 회의용 탁자 위에 술과 안주가 놓여졌다. 조직의 2인자인 쌍칼로부터 보디가드인 망치에 이르기까지 서 열에 따라 보스에게 한 잔씩 술을 올렸고, 젊은 사장은 눈 깜짝 하지 않고 차례차례 권하는 술을 입 속으로 탁탁 털어넣었다. 그 리고 그 즉시 권한 순서대로 술잔을 채워 되돌려 주었다. 그렇게 술잔이 한 순배 돌자 양주 한병이 바닥났다. 사장은 순식간에 여섯 잔을 마신 폭이었고, 간부들은 한 잔씩 입술을 적셨을 뿐이었다. 사장은 그러나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 리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조직의 불문율 이었다. 각자 자리 앞에 술잔이 첨가되자 자연스레 분위기가 무 르녹았다. 권커니 잣거니 술잔들이 탁자 사이로 건너갔다 건너왔 다. 사장 역시 느릿느릿 보조를 맞추며 술자리에 동석했다. "제가 이바구 하나 꺼내겠습니다." 망치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주절주절 이야기를 주워섬겼 다. "옛날에, 전라남도 광주의 북촌 고을에 으리으리한 부잣집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그리고 그 부자에게는 보기 드문 절세가인의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부자인 아비에게 이렇게 고백하더 랍니다. 자줏빛 도포를 입은 미남자가 밤마다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는 첫닭이 홰를 칠 무렵 황망히 사라져 버린다고 말입 니다. 그러면서 절세가인의 그 딸이 덧붙이기를, 찾아오는 미남자 가 누구인지 아직 성명조차 모르고 있으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 면 좋겠느냐며 한숨을 짓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부자가 딸에게 소곤소곤 일렀답니다. 오늘 밤에 또 그 미남자가 찾아오거들랑 긴 실을 꿴 바늘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몰래 그 남자의 옷깃에 꽂아 놓아라 하구요. 그 날 밤 시각이 자 정을 넘기었을 때 방문이 열리며 홀연히 자줏빛 도포를 입은 미 남자가 나타났고, 밤새 그 남자와 더불어 운우지락에 흠뻑 취했 답니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첫닭이 홰를 치는 소리를 들었답니 다. 그때 불현듯 아비의 말이 생각나 낮에 일러준 대로 남자의 옷깃에 바늘을 푹 꽂았더랍니다. 이윽고 희끄무리하게 먼동이 튼 후였습니다. 부자 아비는 딸을 데리고 실이 간 곳으로 조심조심 뒤따라 갔더랍니다. 그랬더니 북쪽 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더니 어느 커다란 바위틈에 이르더 랍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일까요. 커다란 바위틈에 늙은 구렁이가 한 마리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 옆구리에 바늘이 꽂혀 있더랍니다. 진달래꽃같은 선혈이 바위틈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 고 바늘에 찔린 구렁이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였더랍니다. 순 간 아, 하는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르며 미녀는 나무토막처럼 쓰 러져 그 자리에서 혼절했더랍니다. 하여 부자 아비가 부랴부랴 딸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밤마다 찾아오던 미남자의 발길은 뚝 끊어졌고, 미녀는 서서히 배가 불 러오기 시작했으며, 꼬박 열 달이 차자 옥동자를 분만하게 되었 더랍니다. 그 옥동자가 바로……, 후백제를 일으켜 세운 견훤이었 다고 그러더군요. 망치가 별 해괴망측한 이바구를 다 하는구나, 혹 비웃을지 모 르겠으나 제가 이런 이바구를 꺼낸 까닭은 다름이 아닙니다. 우 리 형님이 오늘 절세가인을 베갯동무로 얻었는데 장차 큰 인물을 보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겠지요. 그래서 망치가 이 바구 한 토막 올렸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망치가 좌중을 휘이 둘러보며 헤벌쭉 웃었다. "듣기 싫다. 실없는 소리 좀 작작 지껄여라." 사장이 망치를 향해 꾸지람을 놓았다. "실없는 소리가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한데, 망치가 혹 장가를 들고 싶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댄 게 아닐까요, 형님?" 연예부장 단검이 알랑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그건 말도 안된다. 망치가 무슨 재주로 그런 이야기를 꾸며대 니?" 하고 고개를 훼훼 흔들어젖힌 건 쌍칼이었고, "꾸며댄 이바구라뇨. 오늘 낮에 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겁니다. 그러니 진짜 이바구가 틀림없어요." 하고 펄쩍 뛴 것은 망치였다. "형님, 망치 이야기한 값으로 하룻밤 장가라도 들여주기로 하 구요. 제가 이야기 한 토막 내놓아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맴버인 감초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러고는,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하고 허두를 내놓자 행동대장 꾀보 가, "거 시작 한번 거창스럽다." 하며 초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감초가 조직의 감초답게 이야기를 풀었다. "어느 부락에 늙은 족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족장이 어찌나 선 정을 베풀었는지 그 부락의 백성들은 너나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 렸습니다. 늙은 족장도 젊었을 때엔 용감무쌍한 지도자였으나 나 이가 들어 몸이 점차 노쇠해지자 기력이 전같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산 너머 남쪽에 터를 잡고 있는 부락의 젊은 족장이 힘이 천하장사여서 주변의 부락들을 낼름낼름 삼켰습니다. 이윽고 영 토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호시탐탐 늙은 족장의 부락까지 넘보고 있다는 아주 불길한 소식이 들려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게다 가 전생에 큰 죄업이라도 있었는지 늙은 족장은 나이 쉰이 되어 서야 겨우 첫 자식을 얻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그 후로는 줄줄 이 사탕으로 아들만 넷을 더 보태 늘그막에 다섯 아들을 두게 되 었습니다. 족장의 나이 어느 덧 갑년을 넘겨 북망산을 바라볼 때 가 되어가는데, 아들에게 부락의 운명을 내맡기기엔 턱없이 나이 가 어려, 앉아있자니 걱정이요 누워있자니 한숨이었습니다. 장자 가 이제 갓 열 살을 넘겼을 뿐이고 막내는 겨우 세살박이 삼척동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늙은 족장은 고심고심하던 끝에 다섯 아들을 한 자리 에 불러 앉혔습니다. 그러고는 대나무 화살 다섯 개를 가져오라 이르고는 화살을 다섯 아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 다음, 손으로 분질러 보아라, 하고 일렀습니다. 세살박이인 막내를 빼고는 모두 대나무 화살을 탁탁 분질렀습니다. 제법이구나. 다시 화살 다섯 개를 가져오너라, 하고 늙은 족장이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섯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내놓고는, 누가 분질러 보겠느냐, 하고 다 섯 아들을 차례차례 쳐다보았습니다. 열 살이 넘은 장자로부터 다섯 아들 모두가 한 차례씩 낑낑거리며 힘을 주어봤으나 누구도 다섯 개의 화살을 동시에 분지르진 못했습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어?" 연예부장 단검이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무려나, 끝까지 한번 들어보자구." 이야기 좋아하는 쌍칼이 끼어들어 흥을 돋구자 감초가 끊어진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그러자 늙은 족장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뭉치면 살고 흩 어지면 죽는다는 교훈이니라. 이 아비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한데 똘똘 뭉쳐서 우리 부락을 잘 다스려 후세에 전해야 하느니라. 조 만간에 산 너머 남쪽 부락에서 군사들이 짓쳐들어올 것이다. 허 나 너희들의 힘이 아직은 미약하니 큰 힘을 기를 때까지 몸을 피 신하고 있다가 훗날 우리 부락을 꼭 되찾아야 한다, 하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후 늙은 족장의 예견대로 남쪽 부락에서 군사들 이 들이닥쳤습니다. 늙은 족장은 물론 많은 부락민들이 도륙을 당했습니다. 다섯 아들은 늙은 족장이 일러준 안전한 동굴로 피 신해서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냈지요. 그러면서 아비의 유언에 따 라 부지런히 힘을 길렀습니다. 마침내 다섯 아들이 장성하여 어 른이 되었고, 비명에 간 늙은 아비의 유언을 받들어 단숨에 적군 을 물리치고 옛부락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제 이야기는 이상입니다.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조직도 늙은 족장의 다섯 아들을 본받아 똘똘 뭉쳐서 클럽을 기습해 온 놈들을 단칼에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원 참, 뭔 놈의 이야기가 얼라 니노지에 붙어있는 밥풀데 기 떼어먹는 소리 같으냐. 망치 이야기보다 더 싱거우에." 하고 꾀보가 웩웩거렸다. "오늘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훈훈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형님?" 감초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사장의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감초야, 네가 정신이 좀 오락가락 하는 모양이다." 사장이 툭 내쏘자 한 바탕 폭소가 터졌다. 그 틈에 사장이 망 치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만 자리를 피해주겠다는 신호임을 알아 차리고, "나는 형님 모셔다 드리고 다시 합석토록 하겠습니다." 하고는 지체없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 자리에 다시 오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형님께 허락을 맡아 라." 쌍칼이 말하며 망치를 쳐다보았다. 망치는 쌍칼의 시선을 받고 곧바로 사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사장이, "네 좋을 대로 해라." 하고 허락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술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망치가 허리를 굽실하며 좋아했다. "너무 술 많이 마시지들 말아라." 사장이 당부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새 시간은 새벽 4시 를 넘어서고 있었다. 클럽 생활이란 게 새벽 다섯 시쯤은 되어야 눈을 붙일 수 있었으므로 아직은 늦은 시간이 아닌 셈이었다. 하 우스를 나서면서 망치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형님?" 집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호텔로 돌아갈 것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호텔로 가자." 망치가 군소리없이 호텔로 차를 몰았다. 사장이 호텔의 룸 안 으로 모습을 감추자 망치는 다시 차를 돌려 비밀장소로 돌아갔 다. 사장이 룸 안으로 들어섰을 때 기척을 느낀 여자가 부시시 잠 에서 깨어났다. 룸 안에는 희미한 녹색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독 한 양주를 순식간에 한병 가까이 마신 뒤끝이라선지 제법 취기가 올라왔다. 여자가 지금 몇 시쯤이나 됐어요, 하는 표정으로 침대 에 누운 채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사장이 대답을 않고 곧장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밖에, 아직도 비가 와요?" 여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고는 대답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꼬무락거리며 사장의 가슴 속으로 들어와 안겼다. 자박자박 호텔의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빗줄기 소리가 아련히 두 사람 의 귀를 적셨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목포에서 불나비파가 상경한 것은 다음 날 밤 10시쯤이었다. 쌍칼이 행동대장 꾀보를 데리고 서울역까지 마중나가 불나비파 를 맞이했다. 숙소에 여장을 풀게 한 다음 하룻저녁 거나하게 대 접했다. 상경한 불나비파는 정예대원 열 명이었다. 그 다음 날 새벽 쌍칼은 클럽으로 돌아갔다. 꾀보가 주축이 되 어 곧바로 기습조 추적에 들어갔다. 사흘만에 놈들의 신상이 파 악되었다. 강민이라는 신흥 건달이 이끄는 조직이었다. 서울의 서 부 지역에 예로부터 내려오던 이름난 도살장이 있는데, 강민이 그곳 백정 출신의 아들인 것 같다는 정보가 추가로 입수되었다. 신흥 조직으로서 건달 세계에 명함을 내밀기 위해 클럽을 급습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세력 확장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셈이었다. 또 하나, 강민파는 쌍칼의 추측대로 얼마 전에 상암유통과 결탁한 모양이었다. 고정 자금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어쨌거나 그쯤 정보가 파악되었으면 강민파는 이제 독 안에 든 쥐새끼나 다름없었다. 꾀보는 수하의 졸개 네댓 명을 풀어 강민 파가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만한 장소를 추적했다. 한 군데 모여 있을 때 단칼에 해치우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고 뒤탈도 적을 것 이었다. 또한 놈들이 한 곳에 진을 치고 있을 때라야 반격을 가하는 손 맛도 남다를 것이었다. 하나 하나 점찍어 순차적으로 처치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으나, 건달이 취할 방법으로는 덜 매력적일 뿐아니라, 그렇게 되면 시간을 끌게 되어 여차하면 꼬리를 밟히 게 될 염려가 있었다. 삽시간에 해치우고 사건을 미궁 속에 처박 아 버리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이를테면 완전무결한 보복이었다. 불나비파가 상경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풀어놓은 졸개들로부터 마침내 소식이 왔다. 도살장터 근방에 위치한 흑장미 스텐드바에 강민파 일당 칠팔 명이 한 자리에 모 여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꾀보가 불나비에게 즉각 그 사실을 통보했다. "드디어 전쟁이다. 모두들 장비 챙겨가지고 나를 따라라!" 불나비가 수하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켜 놓고 소리쳤다. 모두들 외낫, 사시미칼, 쇠파이프, 단검 따위를 품 속에 차고 신속히 세 대의 검은 세단 차에 올라탔다. 차가 그림자처럼 기척없이 동체 를 움직였다. 목적지인 흑장미 스텐드바로부터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꾀보가 졸개 하나와 불나비파 행동대원 둘을 스텐드바 안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강민파의 인상착의를 확인하 고 실내의 동정도 살펴보고 나오라는 사전 지시였다. 5분쯤이 지나자 스텐드바로 들어갔던 셋이 밖으로 나왔다. "몇 놈이나 안에 있나?" 꾀보가 자기 수하 졸개에게 물었다. "럭키 세븐, 도합 일곱 놈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졸개가 손가락 일곱 개를 펴보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형님." 불나비파의 행동대원 하나가 보스인 불나비에게 말했다. "뭔 문제야?" 불나비가 짧고 냉랭하게 물었다. "스텐드바 안에 손님이 너무 많습니다. 분위기가 왁자지껄하여 전쟁을 치르기엔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쓸데없는 소리. 언제 우리가 찬물 더운물 가렸니!" 불나비가 한 마디로 행동대원의 판단을 묵살했다. 보스 불나비 는, 불을 발견하는 즉시 불길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불나비처 럼 역시 단호한 데가 있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만패불청의 공격 성만이 그를 대변하는 특성인 듯싶었다. "기습을 감행하기엔 적절한 상황이 아닐 뿐아니라, 만의 하나 손님들이 아우성을 쳐대며 우왕좌왕할 때 퇴로가 차단되면 곤란 하지 않겠습니까?" 행동대원이 다시 한번 숙고할 것을 건의했다. "아가리 닥쳐!" 불나비가 단호히 휘갑을 친 다음, "모두들 잘 들어라. 손님들은 안중에 둘 필요 없다. 스텐드바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행동을 개시한다. 5분 이내로 한 놈씩 해 치우고 신속히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차량을 저쪽 으슥한 골목 안에 대기시켜 놓을 테다. 신호에 맞춰 일제히 밖으로 튀어나와 차를 타고 사라진다, 알겠나?" 하고 행동대원들의 면면을 뚫어져 라 쳐다보았다. "네, 형님의 하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좋다, 강민파의 보스는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 나머지는 한 놈 씩 동시에 덮쳐 즉석에서 요리한다. 또 나머지 대원 셋은 행동파 를 지원하는 동시에 우왕좌왕하는 손님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 붙이고 퇴로를 확보해라." 불나비가 퇴로를 확보할 세 대원을 일일이 지목한 다음, "그럼, 지금 즉시 행동 개시에 들어간다!" 하고 출정 신호를 보 냈다. "건투를 빌겠소." 꾀보가 불나비의 손목을 콱 움켜쥐고는 한 차례 흔들었다. "염려 말고, 차에 시동이나 걸어놓고 기다리시오." 불나비가 수하 아홉 명을 거느리고 저벅저벅 스텐드바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꾀보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근질근 질하여 함께 행동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사장의 명령을 어길 순 없는 일이었다. 행여 자신의 신상이 밝혀지는 날에는 조 직에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었다. 꾀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불나비파가 흑장미 스텐드바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른 무릎쯤 올라오는 중앙 무대 위에서는 때마침 쇼걸이 적나라한 스트립쇼 를 선보이고 있었다. 스텐드바이니 만큼 상체는 다 벗어 버릴는 지 몰라도 아랫도리 계곡을 가린 삼각 팬티만은 고수할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스트립쇼 덕택에 북쩍북쩍한 홀 안의 눈길이 일제히 무대 쪽으로 날아가 꽂혀 있었고, 함으로 행동을 개시하 기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다. "놈들이 어디에 앉아들 있나?" 불나비가 나지막한 소리로 정찰했던 대원에게 물었다. "저쪽, 기둥이 있는 바로 뒤쪽입니다. 일곱 놈이 옆으로 비스듬 히 돌아앉아 킬킬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죠?" 행동대원이 눈길로 강민파의 위치를 가리켰다. "알았다, 곧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일곱 중 가운데 앉아 있는 놈이 보스랍니다." 행동대원이 귓속말로 일렀다. 불나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앞장 서 홀 중앙에 있 는 기둥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홉 명의 행동 대원이 바싹 그 뒤를 따랐다. 선두가 목적지에 반쯤 다가갔을 때였다. "거기, 앞이 안보이잖아? 허리 좀 숙이고 지나가라구!" 손님 중에서 스트립쇼 장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투정부리는 녀석이 있었다. 쫓아가서 뺨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은 마음 없잖았 으나 잔신경을 빼앗길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여타의 손님들은 그런 투정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입을 헤 벌리고는 무작정 무대 쪽에 시선을 박아놓고 있었다. 이윽고 불나비파 일행이 홀 중앙의 기둥을 지났다. 두어 걸음 만 더 다가가면 강민파가 둘러앉아 있는 현장이었다. 그쯤에서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불나비가 먼저 품 속에서 시퍼렇게 날 이 선 단검을 꺼내들었다. 단검 손잡이의 감촉이 찌릿찌릿 손끝 에 전해졌다. 그때였다. 무예의 고단자가 아니더라도 코 앞에 닥쳐온 위기감 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마련인가. 일곱 놈 중의 하나가 고개를 휙 뒤로 젖히며, "니들, 뭐 하는 놈들이야!" 하고 소리쳤다. 그것을 신호 삼아 불나비가 강민의 뒤에 바싹 붙어섰다. "네가 강민이냐?" 신문하듯 다그쳐 묻자 강민이 천천히 몸을 뒤로 돌리며, "그런데, 네 놈은 누구야?" 하고 부리부리한 눈을 칩떴다. 순간 불나비의 오른 손이 허공으로 휙 솟구쳐 올랐다. 단검의 칼날이 불빛을 받아 번쩍 흰빛을 반사했다. 그와 동시에 단검이 아래로 급강하면서 불문곡직 강민의 왼쪽 견갑골을 퍽 내리찍었 다. "윽!" 강민의 머리가 뒤쪽으로 휘떡 넘어갔다. 불나비가 단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나비의 수하 행동대원들이 일시에 강민파를 덮쳤다. 불나비가 이번에는 강민의 옆구리에 단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강민이 앞으로 팩 꼬꾸라지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그의 오른 손에 대검이 들려 있 었다.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본능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 미 두 차례나 칼침을 맞은 데다가 술까지 마신 상태여서 불나비 의 적수가 되기엔 때가 늦은 상황이었다. 행동대원들 역시 보스의 과감성에 뒤질세라 일사불란하게 공격 을 강행하고 있었다. 외낫이 한 놈의 목동맥을 끊어 버리자 피가 낭자하게 사방으로 튀었고, 쇠파이프가 춤을 추며 두 놈의 두개 골에 치명타를 입혔다. 사시미칼에 옆구리를 찔려 나동그라지는 놈도 있었다. "아악, 살인이다!" 이곳 저곳에서 비로소 비명 소리가 터져나오고 흑장미 스텐드 바 안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돌변했다. 스트립쇼를 선 보이는 쇼걸의 느릿느릿한 몸동작과 짝을 이루느라 흐느적흐느적 울리던 음악 소리도 어느덧 딱 멈춰 버렸다. 음악이 꺼져 버린 공간을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대신 매꿔주고 있었다. 강민이 대검을 손에 쥔 채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불나비가 강민의 오른 손을 겨냥하여 발길질을 날리자, 그의 손에 들려있 던 대검이 공중으로 튕겨올랐다가 금속성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불나비의 구둣발이 이번에는 강민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바닥에 쓰러진 강민이 한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사력을 다해 위기에서 탈출해 보려는 안간힘이었다. 불나비가 침착하게 다가가 구둣발로 강민의 등짝 을 찍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콱 짓밟았다. 구두 밑창으로 담배꽁 초를 비벼끄듯 강민의 등짝을 문대었다. 이어 선듯선듯한 단검의 날 끝으로 강민의 양쪽 뒤꿈치 아킬레스건을 끊어 버렸다. "아아악!" 강민이 단발마의 비명 소리를 지르며 나뒹굴었다. "됐다, 밖으로 튀어라!" 불나비가 행동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스텐드바 안에서 우왕좌왕하던 손님들이 모세의 홍해가 갈라지 듯 한 순간에 양쪽을 쫙 흩어지며 불나비파의 퇴로를 열어주었 다. 불나비파 정예부대 열 명은 순식간에 스텐드바 밖으로 튀어 나왔다. 잔인하게 치러진 보복은 불과 5분도 채 경과하지 않은 시간에 그렇듯 마감되었다. 강민파가 휘두른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 한 녀석이 이빨 두 개가 부러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부상을 입은 대 원은 없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그들은 곧장 검은 세단 차가 대기 하고 있는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전원이 무사히 탑승을 완료하자 검은 세단 차는 유유히 흑장미 스텐드바로부터 멀어져갔다. 차는 서울의 서부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유턴하여 중심가로 핸들을 꺾었다. 미행하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이제 곧장 서울역에 당도한다면 예약해놓은 목포행 기차에 안전 하게 몸을 실을 수 있을 것이었다. 불나비파 행동대원들은 승용 차 안에서 피묻은 옷을 새 것으로 갈아입고 물수건을 이용하여 얼굴과 손에 묻어있는 피를 닦아냈다. "수고 많았소. 내려가서 푹 쉬고 있으면 우리 형님이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놈들을 해치우는데 달리 어려운 점은 없었소?" 꾀보가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좌우로 움직이며 옆자리에 앉은 불나비에게 물었다. "단검 두 방에 팩 꼬꾸라지는 걸 보니 대단한 놈은 못되는 갑 디다." 불나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떻소, 놈들이 다시 보복을 가해올 것 같진 않습디까?" "그럴 가능성은 없소.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놨으니, 치료를 제대로 받는다 하더라도 앉은뱅이 신세를 면킨 어려울 거요. 하 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참. 여하튼 건달 세계에 불쑥 뛰어들어와 겁대거리없이 설쳐대는 놈의 종착역이 어디라는 걸 톡톡히 보여줬으니……, 앞으론 아얏 소리도 못지를 거요." "졸개들까지 앉은뱅이로 만들어놓은 건 아닐 테죠?" "보스를 병신 만들어놨으면 그만이지,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소. 우리 애들이 매운맛을 좀 보여줬소. 치료를 받는 데만도 아마 몇 달은 걸릴 거요." 꾀보가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이고는,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줘서 고맙소. 앞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릴 땐 서로 도와가며 삽시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 겠습니까? 파하하하……" 하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쌍칼 형하고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습니까?" 잠시 후 꾀보가 다시 물었다. "햇수로 십년 가까이 되어가니까 꽤나 오래됐소." "우리 큰 형님하고도 잘 알고 지내는 사입니까?" "네댓 차례인가 만나서 술을 나눈 적은 있지요. 아직은 절친한 사이라고까지 말할 순 없을 것 같소. 내 보기엔 보스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입디다." 불나비가 대답하고 촌평까지 덧붙였다. "그렇군요. 언제고 목포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찾아뵙도록 하 죠." "그건 염려말고, 내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푸대접이나 하지 마 슈." "그럴 리가 있나요, 푸하하하……!" 꾀보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세 대의 검은 세단 차가 나란히 서울역에 닿았다. 대합실 2층 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쌍칼이 졸개 둘을 데리고 이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쌍칼의 입장에선 밤새도록 축하연이라도 벌이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무엇보다 일을 깔끔 하게 마무리하는 게 중요했다. 게다가 목포행 기차 시간도 10여 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쌍칼과 불나비는 서로 가볍게 포옹을 나누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불나비파 정예대원 은 그 길로 조용히 목포로 떠났다. 그 다음 날, 도하 각 신문의 사회면에 흑장미 스텐드바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조직폭력배 간의 세력다툼이란 제목이 큼직큼직 한 활자로 찍혀 나왔다. 그러니 자연 경찰이 수사에 나서고 신문 기자들이 냄새를 맡으려고 날뛰었다. 허나,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는 수다한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흑장미 스텐드바 사건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병원의 침대로 자리를 옮긴 강민파 대원들은 보스 강민을 비롯 하여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일곱 중의 둘은 눈치 빠르게 삼십육계 를 놓았던지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부상은 면한 모양이었다. 흑장미 스텐드바 사건이 있고, 그로부터 보름쯤 뒤 강민파에서 클럽으로 사람을 보냈다. 쌍칼과 만두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강민파에서 보내온 두 주먹을 만났다. "클럽을 찾아온 용건이 뭐요?" 쌍칼이 먼저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그랬더니, "먼저 사과드릴 일이 있습니다. 지난 번 세븐 클럽을 기습한 건 우리 강민파의 소행이었소." 하고는, 예상밖에도 초강수로 응 수해오는 것이었다. 솔직한 것처럼 강한 전법도 없는 터였다. 순간 무언가 복선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싶어 움찔했으나 곧 태연한 체하며 쌍칼이, "그래요? 하지만 클럽을 운영하다 보면 그 정도의 피해는 감안 안할 수가 없소. 우리 측에서도 그 즉시 대책을 협의한 바 있으 나, 짭새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 다는 결정을 내렸소. 이미 덮어 버린 일이다, 그런 말이오." 하고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뒤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화해를 청하니 그 때의 결례를 용서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흑장미 스텐드바 사 건은 클럽 쪽에서 보복을 가해온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양측이 서로 협상을 통해 사건을 종결짓는 게 좋을 듯싶 은데……, 클럽 쪽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화해고 협상이고 우리완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오." 지금 뭔 소리를 하느냐며 쌍칼이 딱 잡아뗐다.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진 않겠습니다." "조건이고 뭐고 우리로선 들을 필요조차 없소." 쌍칼이 계속 딴청을 부렸다. 강민파에서 협상을 온 대표가 멍 하니 천장 바라기를 하다가, 쾅 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잘 아시겠지만, 지금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있는 조직원 이 보스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입니다. 우리로선 치료비만도 큰 부담이 되는 실정입니다. 클럽 쪽에서 치료비 일체를 부담해 준 다면 보복을 감행하지 않을 뿐아니라, 짭새들이나 신문사 쪽에도 일체 함구할 작정입니다. 한 차례씩 공격을 주고받은 셈치고 이 쯤에서 덮어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하고 간청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쌍칼이 그 따위 간청에 휘떡 넘어갈 용렬한 위인은 아 니었다. "뭔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으나, 짭새들이 몇 차례 우리 클럽 엘 찾아왔었고, 아무런 혐의점이 없자 손 털고 돌아간 지 오래요. 딱한 놈들이지,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닌 걸 가지고 억지 혐의점 을 찾으려들다니……." "기어코 협상을 거부하겠다는 겁니까?" "이봐,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가지고 협상을 하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 수작이야? 일 없으니 고분고분 말할 때 그만 돌아가!" "협상을 거부한 것으로 알고……, 그렇다면, 우리측에서도 가만 히 두고만 보진 않겠소. 다 알고 왔는데 오리발을 내밀다니 사람 을 잘못 보았소. 나중에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테니 두고 봅시 다." 강민파의 협상 대표가 발끈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답답한 친구로군. 우리가 직접 병문안을 갈 일은 없으니 가서 강민이에게 전해. 건달 무대는 아무나 주름잡아 보겠다고 덤벼드는 장터가 아니라고. 그리고 건달 세계에선 동대문에서 뺨 얻어맞고 남대문에 와서 하소연하는 법도 없다고, 알겠나? 알았 으면, 그만 꺼져!" "좋다, 네 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무덤 속으로 쓸어 버리겠다. 그때 후회해도 때가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게 해줄 테다!" 하고 강민파의 협상 대표가 씩씩거리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게 언제쯤이냐? 늙은 에미 젖이나 더 빨고 오너라, 파하하 하!" 쌍칼이 떠나는 놈들의 뒤통수에 대고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자고이래로, 나중에 두고 보자는 놈치고 앙칼진 녀석 못보았듯 이 훗날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녀석들과 협상 으로 타결할 작정이었다면 애써 목포의 불나비파를 불러 올리지 도 않았을 것이었다. "가련한 것들. 건달은 타고나는 거다, 이 놈들아!" 쌍칼이 혼자 씨부렁대고는 만두와 함께 클럽으로 돌아왔다. 그 후 강민파는 건달 세계에서 소리 소문없이 침몰했다. 한때 는 세력 확장을 꾀하고, 새로이 주먹계의 대부로 군림하고자 했 던 강민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는 끝내 앉 은뱅이 신세로 전락해 그늘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그의 수하에 있던 대원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다른 조직에 흡수되거나 더러는 양아치로 강등되었다. 한편, 세븐 클럽은 강민파의 기습으로 한동안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 고전을 하기도 했으나, 보름쯤이 지나면서부터는 하나 둘 다시 발길을 들여놓아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갔다. 김양과 노양의 드잡이 사건 이후 한 동안 발길을 끊었던 단골 고객 신사장까지도 다시 발길을 돌려놓고 있었다. 3. 세력확장 클럽 안에서의 공식적인 명함은 영업부장에 지나지 않지만, 내 로라 하는 건달 주먹인 만두가 외상값을 수금하러 몇 군데 단골 고객들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만두가 직속 졸개 하나를 거느리고 클럽을 떠난 시간은 늦은 두 시쯤이었다. 첫 방문 상대로 점찍은 고객은 서울 남부 지역의 공단 안에서 전자산업으로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었 다. 승용차를 그 중소기업의 정문 안 주차장에 세워놓고 뚜벅뚜 벅 수위실로 다가간 만두가, "사장님 안에 계신지 인터폰 좀 부탁합니다." 하고 오십 대 후 반쯤으로 보이는 수위에게 공손하게 말을 붙였다. "점심 드시고 사장님은 30분쯤 전에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헌데, 어디서 찾아오신 분이시우? 젊은 사람이 몸이 튼실하외다." 수위가 만두의 위아래를 훑어내리며 흰소리로 대꾸했다. "사장님 고향 후배되는 사람입니다만,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 는데 이제야 점심을 드시고 들어오십니까?" 만두가 덩달아 실없는 질문을 던지자,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오늘은 특별히 거래처 손님을 만나 늦어진 모양입디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시구랴." 수위가 친절하게 사장실이 있는 쪽을 가리켜주었다. "수고하십쇼, 아저씨." 수위와 인사 수작을 마치고 만두는 곧 사장실로 향했다. 문 앞 에 서서 노크를 했더니, 들어와요, 하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 다. 도어를 열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끝자리에 놓여있는 대표 양만성(梁萬成)이란 명패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앞대머리 가 반쯤 벗겨진 사장이 집무용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의자 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이, 클럽의 부장님께서 예까지 어인 행차신가?" 양사장이 필요 이상으로 반기며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만 두가 졸개와 함께 나란히 앉고 맞은편 소파에 양사장이 와 앉았 다. "한데, 대체 여긴 어인 용무로……?" 양사장이 목을 쭉 내밀며 나지막이 물었다. "근처를 지나는 길에 그냥 한번 들려봤습니다." "아무리……?" 하고 양사장이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사실은, 밀린 세금을 수금하러 왔습니다." 만두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양사장이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그렇더라도 그래, 세금을 받으러 회사까지 쳐들어오면 사장되 는 사람의 체면이 뭐가 되는가?" 하면서 슬슬 발뺌할 눈치를 보 였다. 아가씨 끼고 앉아 부어라 마셔라 목구멍 속으로 양주를 넘길 때의 만고강산하던 때의 기분과, 뒷날 외상값 지불할 때의 삼팔 따라지 같은 심정이 그야말로 천양지차라, 순순히 돈지갑을 열어 척하니 계산을 하는 위인은 열의 하나나 둘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보름 가까이 클럽에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 고전을 면치 못했 습니다. 게다가 우리야 뭐 대부분 현찰박치기로 거래를 트기 일 쑤인데, 단골 손님들의 외상장부는 나날이 새끼를 치고……. 한 마디로 죽을 맛입니다. 기왕에 죽는 거 돈벼락이라도 맞고 죽는 다면 여한이 없을 지경입니다." 만두가 앓는 소리로 일장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렇담, 미리 연락이라도 좀 줄 일이지, 츠츳!" 양사장이 안되었다는 듯 혀를 찼다. 말을 자꾸 돌리는 것으로 보아 호락호락 돈지갑을 열 태세는 아닌 듯했다. "물론 한꺼번에 장부를 털어 버리자는 건 아닙니다. 기왕지사 예까지 발걸음을 했으니 깔아놓은 세금의 절반이라도 수금을 했 으면 합니다. 요즘 전자업계가 호황이라던데 그쯤이야 어렵잖겠 죠?" 만두가 입막음조로 그렇게 몰아붙이자, "앗다, 어디서 유비통신을 귀동냥한 모양일세. 사실은 우리 업 계도 요즘 사정이 전같지가 않아요. 현금이 씨가 말랐다니깐!" 이어 뭔 생각에선지 혼자 까불까불 턱짓을 해대더니만, "내가 지난 번에 아주 망신을 당했어요. 미스 주라나 하는 아 가씨를 데리고 베갯머리까지 동행을 했는데 말씀야. 나 원, 클럽 에 오래 드나들어 봤지만 고런 맹랑스런 년은 보다가 처음일세." 하고 화제를 엉뚱한 곳으로 잡아트는 것이었다. "왜요,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만두가 일단은 양사장의 비위를 맞추었다. 언젠가 양사장의 잠 자리 파트너로 따라갔다가, 옴팍 피박을 뒤집어쓰고 돌아왔다며, 투덜투덜하던 주양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왜요고 일본요고 간에, 고런 생뚱맞은 년을 보았나. 지가 거시 기에 금테라도 둘렀다면 내가 부장 앞에서 이런 말까진 안해요. 솔직히 톡 까놓고 얘기해서, 클럽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야 이 놈 하고도 어울리고 저 놈 하고도 어울리는, 이를테면 노류장화 요 사공 없는 나룻배가 아닌가 말씀야. 거기에 나같은 사람이 한 번 올라탔다고 치자구. 그거야 뭐 한강 모래사장에 침 한번 뱉기 요, 강물 위로 유람선 한 차례 지나간 폭밖에 더 되겠는가 말씀 야. 사실대로 톡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한데 고년이 요리 빼고 조리 빼고 영 밑을 대줄 생각을 않는 거 있지? 그러니 제대로 일이 성사되겠는가 그 말씀야. 세븐 클럽에선 기생 대신 에 지조 높은 열녀를 데려다놓고 장사를 하는가 보지?" 뱀장수처럼 느글느글 뱉아내는 너스레를 듣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리고 창자가 꼬여서 만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날 잠자리에서 벌어졌던 일은 나도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 습니다. 사장님이 술이 너무 췌갖고 양물이 도무지 서지를 않자, 주양이 갖은 노력봉사를 다했답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합 궁을 이루지 못한 것은 사장님에게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지 주 양의 책임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주양이 클럽에 와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가 직접 귓전으로 들었습니다." 만두가 사건의 본말을 들은 대로 발설했다. "허어 참, 고 맨망스런 년이 뭐라고 쫑알대며 생사람을 잡던 가?" 양사장의 안색이 불그락 푸르락 변했다. "양물이 말을 듣지 않자 사장님이 주양 앞에 그 놈을 꺼내놓고 써니텐을 해달라, 쭈쭈바를 해달라, 하고 온갖 주문을 다했다면서 요? 어차피 잠자리까지 따라나선 마당이라, 주양으로서도 딴에는 갖은 노력봉사를 다했던 모양이데요. 그랬는데도 사장님의 양물 이, 나 오늘은 죽었수다, 하고 일어서질 않으니 주양인들 신이 아 닌 다음에야 어찌해볼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두 남녀가 술이 엔간히 취한 상태였던지라, 결국엔 할딱거리다가 지친 주양 이 그냥 잠이나 자자고 했다합디다. 그랬더니만 사장님이 발칵 성깔을 부리면서 주양의 볼따귀를 찰싹 후려갈겼다면서요? 그 날 의 진상이 그렇게 돌아갔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뭔 소리야? 내 나이 아직 쉰밖에 안되었는데 그럴 리가 있는 가 말씀야. 고년이 영판 딴 생각을 먹고는 요리 빼고 조리 빼면 서 밑을 대어주지 않으니까 합궁을 못이룬 것이지." 양사장이 실감나게 자기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들어 대면서 억 울함을 호소했다. 도대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위 인이었다. 성질같아선 귓방망이를 예배당 종치듯 후려갈기고 싶 었으나, 그 놈의 돈이 제갈량이라, 꾹꾹 눌러참고는 듣기 좋은 말 로 타일러 보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담들이 허구한 날 교육을 시키는데 설 마하니 애들에게 그 따위로 놀라고 가르치겠습니까? 클럽을 말아 먹기로 작정을 하지 않는 한 그같은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 도 기억이 납니다만, 그 날 사장님이 술이 너무 과했더랬습니다. 젊은 놈들도 술이 억병으로 췌면 양물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하기 일쑤인데, 쉰이 된 사장님이야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 날 정녕 잠자리까지 갈 의향이 있었더라면 술을 자제했어야 옳지 요. 그리고, 그만한 일로 주양의 볼따귀를 후려갈기고 설상가상으 로 화대까지 안주어 내쫓는 경우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광화문 한복판에서 길을 막고 백 사람 천 사람에게 물어봐도 사 장님이 너무했다고 손가락질을 할 겁니다." "세상천지에 어떤 골빈 놈이 허탕치고 화대를 내놓는단 말씀 야. 그랬다가는 날 아주 호구로 취급하라구?" 뭐 이 따위 인간이 다 있는가 싶을 정도로 양사장은 밥맛없는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더 참기로 하고, "어떻게 그게 그냥 허탕짓거리가 됩니까? 써니텐도 해주고 쭈 쭈바도 해줬다던데요. 그 정도의 서비스면 허다 못해 허름한 골 목 안 이발소에만 가도 배춧잎 두어 장은 찔러준다고 합디다. 그 래 주양이 골목 안 이발소의 칼잽이만도 못하단 말씀입니까? 그 리고 말입니다. 일이 그렇듯 성사가 안될 때일수록 아가씨를 더 위해주고 화대도 두둑이 챙겨주면, 사장님의 주가가 더 올라가면 올라갔지 결코 호구로 책잡히진 않습니다. 클럽 아가씨들 사이에 좋게 소문만 나보세요. 서로 달려들질 못해 안달방아를 찧을 겁 니다. 내가 보기에, 사장님은 아무래도 한량으로서의 큰 그릇은 못되는 모양입니다. 나중에라도 클럽에 한번 들르시면 주양에게 지난 번엔 미안했다며 얼마간 쿡 찔러줘 보십시요. 대번에 태도 가 확 달라질 겁니다." 조근조근 잘못한 행동에 대해 지적해주는 한편 반성의 방법까 지를 소상히 일러주었다. "이런,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꼴일세." "아무려나, 주양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 덮어두기로 하고, 내가 찾아온 용건은 세금 수금에 있으니까 이제 계산을 해주어야겠습 니다." "이봐요, 부장도 남자라면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 봐요. 내가 지금 세금낼 기분이 나겠는가 말이야, 엉?" 끝까지 나오는 수작이 빤하여 수금하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허 나 아예 걸음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회사까지 찾아온 마당에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남의 지 갑을 차압할 수도 없어서, "세금은 어디까지나 세금이고 주양 건은 그거완 근본적으로 차 원이 다른 문젭니다. 내 입에서 거친 말이 나가기 전에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지금까지는 고객으로 점잖 게 대접해드렸지만 술값을 떼어먹으면 그때는 사장님이 아니라 도둑님이 되니, 이쪽에서도 대접이 백팔십도로 바뀌게 됩니다." 하고 가볍게 공포탄 한 방을 쏘아 올렸다. 데리고 간 졸개가 눈치가 있어 그때를 기하여 어깨를 한번 으 쓱해 보인 다음 천천히 자기 주먹을 주물렀다. 그러자 우두둑 우 두둑 뼈마디 어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양사장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더니만, "내가 먹은 술값이니 떼어먹지는 않아요. 하지만 오늘은 내 수 중에 이것밖에 없으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나머지는 경 리과에 얘기해서 수일 내로 입금시키도록 할테니 그렇게 알아 요." 하고 지갑에서 오십만 원권 자기앞수표 한 장과 십만 원권 두 장을 순순히 꺼내놓았다. 공포탄 다음엔 실탄이 날아간다는 사실을 짐작할 줄은 아는 모 양이었다. 말투도 훨씬 공손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다음 주말쯤 해서 거래처 손님 모시고 들를 테니 대접이나 잘 해주시오. 주양에게는 상황 봐가면서 내가 사례하리다." 사람이 아주 싹 달라보일 정도였다. "그처럼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다음에 클럽을 찾아주시면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마담들에게 지시해 놓겠습니다. 그럼, 바빠 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결례한 게 있다면 너그러이 덮어두시지 요." "아니요, 천만의 말씀을!" 양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뛰는 시늉을 해보였다. 만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사장과 악수를 나누고는 게운 치 않은 입맛을 다시며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막 시동을 거는데 옆자리에 앉은 졸개가, "명색이 사장이란 작자가, 참말로 더럽고 치사한 놈이더만요." 하고 툴툴거렸다. "세상에, 치사하고 더러운 놈이 어디 한 둘이냐. 하지만 사람보 다 더 더럽고 치사한 요물이 있으니 그게 바로 돈이니라." 만두가 쓴웃음을 지으며 부르릉 차를 출발시켰다. 다음으로 심방할 고객은 양사장과 마찬가지로 공단 안에서 중 소기업을 운영하는 오달봉 사장이었다. 생산한 물품을 동남아 각 국으로 전량 수출하는 업체의 대표인데, 수출하는 재미가 쏠쏠하 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오사장은 룸에 앉아 조신조신 술을 마시 다가도 걸핏하면 목울대에 핏대를 세우면서, "수출만이 살 길이다! 요즘 세상은 왜정 때와 달라서 독립군보 다도 수출 많이 하는 사람을 진짜 진짜 애국자로 떠받들어야 한 다!" 하고 입가에 침버캐를 묻히며 떠벌이는가 하면, "나 오달봉이야말로 수출 산업의 캡방이다!" 라면서 클럽이 떠 나가도록 외쳐대는, 일테면 자기 나름의 만만치 않은 자부심을 먹고 사는 위인이었다. 그러면서도 공장의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노조라도 결성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사생결단을 낼 듯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결사반대하는 작자였다. 실제로 인근의 양아치 무리들을 끌어들여 두어 차례나 노조 결성을 피박살낸 경력이 있어, 공장 의 노동자들 사이에선 흡혈귀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술과 여자는 누구 못잖게 밝혀대는 축이어서 클럽 의 고정 고객 명단에 명함을 들이민지 이미 오래였다. 클럽에 깔 아놓은 외상값만도 기백만원 대에 이르는 걸 보면 일년에 술값으 로 탕진하는 액수만도 상당한 지경에 이를 것이었다. 오사장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보태는 말이지만, 여럿이 둘러앉 아 값비싼 양주를 2차 3차까지 목구멍 속으로 넘기고, 막차에 이 르러 아가씨의 아랫도리마저 포식하려면 모르긴 해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두어 사람의 한 달치 봉급이 하룻저녁에 훌렁훌렁 날아가기 일쑤일 터였다. 그 비용을 알뜰살뜰 모아 두었다가 추 석이나 설 대목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부를 축적해준 고마운 공장 의 노동자들에게 특별 보너스로 지불한다면, "아이구 하느님 사장님 감사하고도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코끝이 땅에 닿도록 절하며 고마워할 지도 몰랐다. 한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또한 자본의 흐름이란 것이, 애당 초에 좋은 쪽으로는 잘 안굴러가는 속성을 지닌 반면에, 마시고 또 마시고 췌고 또 췌서, 하는 쪽으로는 윤활유 먹은 기계 마냥 잘 돌아가는 자동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수출 산업의 역군 오달봉 사장이 바로 그런 전형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밀린 세금 수금하는 데 있어 둘째 가라면 앞사람의 목덜미라도 잡아채고 나설 만두가, 오달봉 사장을 만나 기백만원의 외상값 중에서 겨우 일백만원을 수금하는 데 한 시간이 넘도록 식은땀을 삐직삐직 흘렸을 정도라면, 알조로 알아 모셔야할 위인임에 틀림 없었다. 만두가 오달봉 사장과 헤어진 다음 마지막 코스로 신사장의 사 무실에 들렀을 때는 이미 다섯 시가 임박해져서 곧 업소로 돌아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전 날 김양과 노양의 드잡이 사건을 유발시키기기도 했던 신사 장은 부동산업자이자 땅투기꾼이었다.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면 서 한 순간에 졸부로 급부상한 사람이었다. 돈이 많아서 그러려 니 하건만, 조자룡이 헌칼 쓰듯이 기분 내키는 족족 펑펑 돈을 뿌려대는 몇 안되는 고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만두가 신사장의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는 주인 외에도 두 사람 의 부동산업자가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어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셨네. 그렇잖아도 오늘 저녁 클럽 에 들를까 하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잘 왔소. 부장의 승용차로 아 예 직행하면 쓰겠구만." 신사장이 껄껄 웃으며 만두의 방문을 반겼다. 기업체를 운영하 는 사장족보다 역시 졸부들 쪽이 화통한 데가 있었다. 하긴 무엇 빠지게 일해서 닥닥 긁어모은 돈과, 하루 아침에 땅값이 천정부 지로 치솟아 거저 굴러 들어오다시피한 돈이, 같은 돈이긴 하되 꼭 같다고 볼 수 만은 없을 것이었다. 졸부인 신사장은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이게 언제부터 내 돈이었냐, 너도 가져라 그래 너도 가져라." 하고 마구 뿌려대는 특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왕에 마구 뿌려댈 양이면 고아원이니 양로원이니 하는 사회 의 그늘진 구석을 밝게 채색하는 일에 보탤 수도 있으련마는 그 게 또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짐작컨대 돈을 쓰는 데도 맛이 라는 게 따로 있어서, 술 마시고 계집 몸뚱이 주무르는 일에 뿌 려댈 때는 무언가 손맛이 찌릿찌릿한 반면에, 남들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보태는 일에는 영판 구미가 당기질 않는 모양이었 다. 어쨌거나 그건 돈줄 쥐고 있는 임자 마음의 요량이므로 타인이 밤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할 계제가 아닐는지 몰랐다. 특히나 클럽 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신사장과 같은 졸부들이야말로 가장 떠받들어 모셔야 할 노다지 줄이었다. 아니, 서울 장안의 쌔고 쌘 클럽과 룸살롱 그리고 스텐드바 하는 곳들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데에는 졸부들의 도움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게 사실이었다. "우리끼리 하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갑갑하더라도 소파에 앉아 잠시만 기다립시다." 신사장이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어 바로 응대하지 못함을 양 해바랐다. "괜찮습니다, 마음 편안히 말씀들 나누십시요." 만두가 대답하고 졸개와 함께 소파의 빈 자리에 궁둥이를 걸쳤 다. 그러니 자연 신사장과 부동산업자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요즘 물 좋은 곳이 나왔다면서?" 신사장이 묻자 부동산 거간꾼 하나가 맞장구쳤다. 인상이 느물 느물한 삼십 중반의 사내였다. "물이 좋아도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지." 이어, 신사장과 두 거간꾼 사이에 부동산과 관계된 쑥덕공론이 한동안 오고갔다. 만두는 점차로 흥미가 동하여 그 이야기를 귀 담아 들었다. "그래, 물 좋다는 그 곳이 대체 어디야?" "시흥에 있는 산본과 금정 지역이야." "옳아, 맞어.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지역 중 한 곳이로구만. 땅 값 허벌나게 뛰게 생겼네. 대체 대지가 얼마나 되누?" "대지가 백삼십육만 평이라나 아마 그렇다지." "엄청나구만. 그걸 통째로 꿀꺽 삼켜버린다면 대한민국 제일의 갑부는 따놓은 당상일세 그려. 허나 그건 어려울 테고, 그럴싸한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야 쌔고 쌨지. 우선 크게 먹는 방법으로, 그 중의 몇 십 만 평이라도 사제끼고 보는 게야. 그렇게 되면 돈방석에 올라앉 는 건 시간 문제일세. 허나 땅을 내놓을 작자가 나설지 의문이구 만. 그러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 쓰겠는데……. 신도시가 들 어앉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 지역이 현재 개발제한구역으로 묶 여 있단 말씀이야. 매일같이 항공기로 촬영을 해서 브로꾸나 반 네루로 가건물만 지어놓아도 다음 날 제꺽 철거반이 들이닥쳐 박 살을 내는 판국이거든. 건축물을 새로 짓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 쇄하고 있다는 얘기일세. 한데 말이야, 세상사에 빈 틈이 없는 일 이란 하나도 없기 마련이에요. 즉 허허벌판에 비닐하우스가 엄청 들어앉아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그 놈을 웃돈 얹어주 고 몽창 사들이는 거라." "그래 가지고, 뭘 어떻게 한다는 게야?" "이 사람이 그 쪽으론 아주 숙맥이로구먼. 비닐하우스를 사들 여서 그 위에 두툼한 보온덮개를 덮는단 말씀이야. 그런 다음 비 닐하우스 안에서 공사를 시작하는 거라. 뭔 공사냐구?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방을 들이는 것이야. 비닐하우스 한 동이면 순식간 에 삼십 개에서 오십 개까지 방을 들일 수가 있어요. 바닥에 돌 멩이 조금 깔고 공구리하면서 연탄보일러 놓고 그 위에 싸구려 비닐 장판을 깔면 그게 바로 방바닥이라. 얇은 베니어판을 사다 가 칸을 막고 벽지를 바르면 거긴 벽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다가 전기와 수도 공사만 대충 해놓으면 사람 들어가 사는 데는 아무 런 지장이 없다 그런 말씀이지. 그러고는 그 놈을 팔아제끼는 거라. 방 하나에 오백만 원만 받 아도, 너도나도 전라도하면서, 여기서 서울역까지 주욱 나래비를 선다니깐. 오백만 투자하면 나중에 아파트 입주권이 하나 떨어지 거든. 소위 딱지라고 하는 거 말일세. 그렇듯 부처님 손바닥 안에 서 빤하게 돌아가는 판세인데, 세상에 어떤 해골 빈 놈이 그걸 마다하고 자빠졌겠나, 안그래? 에에, 그러니까 설라무네 비닐하우스 한 동에 방 오십 개를 들 인다 치고 오오이십오, 한 동만 팔아먹어도 2억 5천이야. 공사비 몇 천만 원 제하면 앉은 자리에서 2억이 떨어진다는 계산이 나 와. 그러니까 비닐하우스 열 동만 사들이면 자그만치 20억이 넘 는 돈이 우리 손바닥 위에, 늦가을 익은 감 떨어지듯 톡톡 떨어 지는 거라. 어디 그것 뿐인가? 비닐하우스 땅값은 땅값대로 나중 에 아파트가 들어설 때 몇 곱절로 쳐서 보상을 받아낼 수 있거 든. 요즈음 시러베 발기를 할 놈들의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서 이빨 쑤시니, 일석삼조란 이를 두고 이른 말일세." "땅 짚고 헤엄치기가 따로 없군 그래." "비닐하우스 뿐만이 아니야. 돼지막이고 우사(牛舍)고 가릴 것 없이 마구 사들여서 그 안을 깨끗이 청소하면 손바닥만한 쬐깐한 방을 얼마든지 들일 수 있어요. 부잣집 화장실만한 방이라도 없 어 못팔 지경이지." 만두는 신사장과 두 거간꾼이 나누는 이야기 내용에 점차 흥미 를 갖기 시작했다. 은근히 구미가 당기는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부동산업자라는 놈들의 돈 버는 수작이 뭐 별다른 것도 아니구 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클럽을 운영하는 것보다 열 배 이상은 쉽게 돈을 긁어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럽을 운영하면서 깔아 놓은 외상값이 대체 얼마인가. 게다가 오백씩 현찰박치기라니 만 두는 혀가 내둘려질 지경이었다. 해서 계속해서 그들의 사업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복잡한 거 싫어하는 내 성미를 잘 알잖나. 간단명료하 게 몇 십만 평 사들였다가 신도시가 들어앉을 시점에 몇 배로 엎 어쳐서 되팔면 그것이 앗싸리하고 깨끗한 장사 같은데?" "어디, 그만한 물량을 확보하기가 쉬워야지." "그건 그렇고, 신도시는 언제쯤 들어앉을 것 같은가?" 신사장이 나지막이 묻자 느물느물한 사내가 즉각 말을 받았다.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내후년에는 들어앉을 모양이야. 빨리 서둘러야 돼. 벌써 하안동과 철산리 재개발 지역에서 한 몫 챙긴 놈들이 산본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거야 보나 안보나 쇠똥에 똥파리 끓듯 하겠지." "그러니까 먼저 선점하는 놈이 임자라니깐! 산본의 어느 한 귀 퉁이만 장악해도 평생 동안 떵떵거리며 먹고 살 자금은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좋아, 차차 치밀한 작전을 세우기로 하고. 오늘은 내가 한턱 쓸 테니 클럽으로 자리를 옮기지 그래. 마침 단골로 드나드는 클 럽에서 부장이 어려운 걸음도 했고 하니 그만 일어들 서자구. 가 보면 알겠지만 쏠쏠한 아가씨들이 제법 많아요. 내가 오늘 자네 들 주장군을 싱싱한 연못에 목욕시켜 줄까?" 그리고 누가 뭐라 한 것처럼 키득키득 웃더니만, "서로간에 인사나 나누지? 이쪽은 세븐 클럽의 영업 부장이시 네." 하고 자신의 패거리를 만두에게 인사시켰다. "세븐 클럽의 영업 부장입니다, 자주 놀러 오십시요." 만두가 명함을 꺼내 건네며 인사하자 두 사람이 차례로 악수를 청하며, "강두만이올시다." "나는 변천수라고 합니다." 하여 통성명을 나누었다. 수인사에 통성명까지 끝나자 신사장이 좌중을 휘이 둘러보고 는, "가만 있자, 지금 클럽으로 가기엔 시간이 좀 이른 것 같군. 어 디 가서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청사초롱 밝힐 때쯤 해서 클럽 으로 가는 게 좋을 듯싶은데?" 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럴 것 없이 내 승용차로 클럽 가까운 곳으로 가시죠. 음식 잘 하는 집을 알고 있습니다. 안내해드릴 테니 저녁 잡숩고 고스 톱이나 치면서 소화를 시키고 계시면, 적당한 때에 아가씨를 하 나 보내겠습니다. 그때 클럽으로 오셔서 마음껏 놀다 가십시요. 괜찮은 아가씨들을 미리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만두가 제안했다. "그게 좋겠구만. 어차피 술 마시러 가는 길이니, 우리 차는 주 차장에 그냥 파킹해 두고, 부장의 승용차를 타고 가자구." 신사장이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 르 신사장의 사무실을 나왔다. 차례차례 만두의 승용차에 올라탔 다. 다섯 명이라 아귀가 딱 맞았다. 차가 클럽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그제서야 만두가, "지나는 길에 들르긴 했습니다만, 실은 신사장님 밀린 세금을 받으러 간 길이었습니다." 하고 찾아갔던 용건을 말했다. "아, 그랬었구만." 신사장이 까닭없이 푸후하하 웃더니만, "좋아, 오늘 좋은 사업 건도 하나 물고 했으니, 진탕 마시고 밀 린 세금까지 한꺼번에 싹 정리해주지. 그럼, 되었소?" 역시 신사장은 돈에 있어서 만큼은 화끈했다. "고맙습니다, 오늘 나들이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만두가 핸들 잡았던 오른 손을 들어올리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양과 노양이 죽기살기로 신사장을 독차지하려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업체를 경영합네 하는 쫀쫀한 고객들은 팁은 물론이거니와, 화대까지 깎으려 들거나 한 술 더 떠서 외상 을 긋는 치사 빤스족도 없잖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따위 족속 서넛보다 신사장 하나가 오히려 풍족할 지경이었다. 만두가 신사장 일행을 음식점 입구에 내려놓고, "넌 사장님 모시고 들어가서 좋은 자리 잡아드려라. 그리고, 주 인 아줌마에게 특별히 잘 해드리라고 부탁하고……. 그런 다음 바로 클럽으로 오너라." 하고 옆에 앉은 졸개에게 일렀다. 클럽으로 돌아온 만두는 곧바로 사장실로 직행했다. 젊은 사장 은 소파에 다리를 턱하니 걸치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난데없이 독서를 다 하십니다, 형님." 만두가 허리를 구십도로 꺾으며 인사치레로 말했다. "누가, 하도 재미있다고 해서 읽는 중인데, 난 통 싱거워서 못 읽겠어." 사장이 읽던 책을 덮어 탁자 위로 툭 내던지며 자세를 고쳐 앉 았다. "무슨 책인데요?" 하며 만두가 소파의 맞은편 자리에 가 앉았 다. "추리소설인데, 뭐 그렇고 그래." 만두가 그러냐는 듯 건성으로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린 다음, "밀린 세금을 받으러 외출했다가 방금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 고 운을 떼고는 천천히 담배를 피어물었다. "싱거운 놈, 그거야 노상 있는 일이 아니냐." "그런 게 아닙니다, 형님. 부동산업자인 신사장이란 단골 고객 이 있는데, 거기 사무실에 갔다가 놀랍고 기막힌 정보를 엿들었 습니다. 해서 형님께 조용히 말씀드리고 상의하기 위해 곧장 이 리로 달려온 길입니다." 만두가 넌지시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놀랍고 기막힌 정보가 있어?" 사장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관심을 드러냈다. 만두가 신사 장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산본 신도시 건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단숨에 좌악 풀어놓았다. 그리고 생색이라도 내려는 듯 이, "그걸 우리가 꿀꺽 삼켜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하고 히 쭉 웃어 보였다. "으음……" 하고 사장이 생각에 잠겨들다가, "말이야 그럴 듯해도 세상에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떡이 있을라 고?" 선뜻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믿져봐야 본전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현지 답사를 다녀와서 결정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마술사가 손을 한번 쥐었다가 펴는 순간 포르르 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 듯, 20억이란 거금이 금방이라도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처럼 만두는 마음이 조급했다. "바람도 쐴 겸 현장 답사를 다녀오는 것이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지." "톡 까놓고 말씀드려서 클럽 운영에만 기대선 조직을 키울 수 가 없습니다, 형님. 지난 번 강민파로부터 기습을 받은 일도 따지 고 보면 우리 조직이 놈들에게 얕잡히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함 으로 거금을 벌어들이고 더 나아가 조직까지 확대시킬 수 있다면 일거에 양득이 아니겠습니까. 산본 신도시만 우리 손아귀에 들어 오면 조직을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크게 키울 수 있으리라고 저 는 확신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먹 세계를 천하통일하는 건 시간 문제이고, 형님은 주먹 세계의 대부로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 희들에겐 그때 가서 지역 하나씩 떼어 맡기면 될 것이고 말입니 다." 만두의 구상에 사장은 비로소 귀가 솔깃해졌다. 클럽 운영만으론 더 이상의 세력확장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현 재도 재정이 빈약하여 허덕허덕하는 판국이었다. 사방에 깔아놓 은 외상값을 일거에 회수한다면 모를까, 세력확장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렇다고 외상 깔아놓지 않고 클럽을 운영한다는 것도 무리였 다. 또한, 평생 클럽이나 부둥키고 앉아 있기엔 사장의 피가 너무 뜨거웠다. 현상유지란 한 마디로 사장의 욕심에 안차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세력확장을 위해선 절대적으로 자금이 필요했다. 현재 로선 50명 정도의 수하를 거느리기에도 벅찬 실정이었다. "조직을 키울 수만 있다면 수화를 가릴 게 없지." 사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형님. 20억쯤은 문제없을 것 같고 경우에 따라서 는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쓸만한 놈으로 2 백 명은 수하에 거느릴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조직 단독으로 처 리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신사장 패거리와 동업을 할 수도 있을 테구요." 만두는 당장에라도 20억이 손아귀에 들어온 것처럼 흥분했다. "이왕이면 크게 먹어야지 신사장 패거리는 왜 불러들여. 난 동 업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아무려나, 내일 현장 답사는 떠나는 걸로 하지요. 몇 시쯤이 좋을까요?" "가서 점심이나 먹고 오지."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그리고 말야, 방금 한 얘기는 당분간 비밀로 해 둬라.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말을 꺼낼 테니까." "네, 형님." 하고 만두가 사장실을 나갔다. 그 다음 날 이른 11시쯤 사장은 만두와 망치를 대동하고 산본 으로 내려갔다. 신사장의 사무실에서 엿들은 바 그대로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산본과 금정 지역은, 누에처럼 생긴 기다란 비닐하우 스가 십여 동씩 이십 동씩 군데군데 밀집해 있고, 야트막한 야산 이며 둔덕 주위에는 젖소를 키우는 우사와, 돼지를 기르는 돼지 막이 듬성듬성 눈에 띌 뿐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상전벽해란 말도 분수가 있는 것이지, 휑뎅그렁하니 바람만 휩쓸고 지나가는 벌판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 았다. 한 마디로 산본 신도시란 계획에도 없는 낭설인 것만 같았 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찔끔찔끔 비까지 뿌려 주변의 풍 경조차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장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사 방을 돌레돌레 돌아보던 망치 역시 기가 턱 막히는지, "나무관세음……. 세상에, 이 따위 허허벌판에 무슨 조화를 부 려 신도시가 들어앉는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통 감이 잡히질 않는 데요? 혹시 신사장 패거리가 거짓말을 퍼뜨린 게 아닐까요? 말이 좋아 부동산업자지 사실은 사기꾼에 협잡꾼들이 아닙니까?" 하고 투덜거렸다. "글쎄 말야, 막상 와서 보니 신사장 패거리가 거짓말을 씨부렁 댄 것도 같네." 만두 역시 우뚝우뚝 아파트가 솟아있는 신도시의 풍경이 도대 체 감득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즈이들끼리 쑥덕쑥덕 입방아 찧는 소 리를 들었는데 자못 심각했거든." 만두가 멀뚱멀뚱 빈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보슈 거 입이 있으 면 속시원히 대답 좀 해 보슈,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허허벌판이라 신도시가 들어앉기엔 안성맞춤이군." 사장이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어디 가서 우선 점심이나 먹지." 잠시 후 세 사람은 자리를 떴다. 버스 종점 부근에 허름한 식당이 눈에 띄었다. 사장이 말없이 종점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망치가 우산을 들고 곁에 바싹 붙었 고, 만두는 두어 걸음 뒤쳐져 뒤를 따랐다. "깨끗한 음식점이 눈에 뜨이지 않는데, 중국집에 들어가 오랜 만에 청요리나 시켜 먹는 게 어떻겠습니까?" 망치가 제안했다. "너 좋을 대로 하자." 사장이 찬동했다. 해서 세 사람은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이층에 있는 중국집으로 올라갔다. 바깥 날씨가 으슬으슬해 서 청요리에 빼갈 한 독구리를 쳐 훈훈하게 몸을 데운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형님?" 만두가 종점 다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발길을 종점 다방으로 돌 렸다. 반네루로 대충 벽을 둘러치고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허름 하기 짝이없는 다방이었다. 전에는 다방이 없었던 곳인데 신도시 바람이 불면서 외지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하자 임시로 가건물을 지어놓고 장사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실내는 좁고 음침했으며 겨 우 열 평이 될까말까했다. 그런데도 다방 안은 북쩍북쩍 손님들 이 들끓었다. "꼴세를 보아하니 복부인들 같지 않습니까, 형님?" 만두가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다방에 앉아있는 여자들의 옷차림새가 그 지역에 사는 아줌마같지는 않 았다. "하는 얘기들이 신도시가 어떻구 입주권이 저떻구 해쌓는 걸 보니 복부인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망치도 거들고 나섰다. 사장은 그러나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오락기와 더불어 시간을 감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락기와 다 탁을 겸용으로 활용하는 다방이었다. 백동전을 먹여주면 탁자 화 면에 높음 또는 낮음을 누르라는 신호가 떨어지는데, 높음에 오 백원을 걸고 버튼을 눌러 높음이 나오면 천원을 받고, 낮음이 나 오면 오백원을 잃게 되는 단순한 놀이었다. 이를테면 홀짝 게임인 셈인데, 확율상 승패가 반반인 것으로 언뜻 생각하기 쉬우나 결단코 그렇지가 않았다. 사람의 마음 바 탕에 깔려있는 욕심이란 놈과, 아편처럼 끈질긴 노름의 계속성 때문에 자꾸 덮어쓰기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다 잃고 손을 털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니 돈을 잃었으면 잃었지 딸 확률은 1할도 못 되었다. 오락을 즐긴 만큼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치부하는 수밖 에 없었다. 그런 오락 기구를 탁자 대신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짭짤하니 부 수입을 올리자는 목적이 일차적으로 작용했을 터였다. 그렇긴 하 지만, 다방을 찾아드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잠시 다리를 쉬며 차 한 잔 홀짝이고 떠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 록 진을 치고 앉아서는 무언가 다른 꿍꿍이속을 차린다는 걸 암 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좁은 다방 곳곳에서 오락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둘 씩 셋씩 머리를 맞대고 앉아 속닥속닥 밀담을 나누는 부류도 눈 에 더러 띄었다. 신도시 바람이 이미 불기 시작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종점 다방은 투기꾼, 부동산 중매 장이, 사기꾼, 산본과 금정 지역의 주민들, 거간꾼, 복부인, 그리 고 그밖의 떨거지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 는 곳으로 활용되는 장소에 다름아니었다. 사장은 귀를 쫑긋 밖으로 열어놓은 채 한 시간이 넘도록 오락 에만 열중했다. 그 결과 3천원을 오락기에 떼어먹혔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지." 사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 사람은 그 길로 종점 다방 을 나서 클럽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부터 젊은 사장은 망치만을 데리고 하루에 한 차례 씩 산본의 종점 다방으로 내려와 틀어박혔다. 그리고 이삼만 원 쯤을 오락기에 먹여주고는 훌쩍 서울로 돌아가곤 했다. 그와 같 은 행동을 보름 가까이 지칠 줄도 모르고 반복했다. 하루는 망치가 오락에만 미쳐있는 사장이 보기에 딱했던지, "형님, 번번이 잃기만 하면서 웬 오락을 그렇게 즐기세요? 형 님이 오락을 그 정도로 좋아하시는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 다. 종점 다방의 오락기에 돈 먹여주지 못해 환장을 했습니까? 제가 클럽에 있는 형님 사무실에 오락기 한 대 사들여 놓을까 요?" 하고 퉁명스레 따져물었다. "넌 눈치 구멍도 없니?" 사장이 망치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만, "이것도 다 투자다." 하고 뜻 모를 소리를 내뱉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사장은 오락 귀신으로서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산본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먹이 동정을 다 살핀 노회 한 사자가 한껏 기지개를 켠 다음 털레털레 사냥을 떠나듯이. 다방에 죽치고 앉아 오락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사장은 이미 그 곳 단골 손님들의 안면을 두루 익혀둔 터였다. 종점 다방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손님들은 대개 산본에 부는 바람과 어떤 형 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부류들이었다. 사장은 한발짝 한발짝 그들과의 접촉을 시도했고, 급기야 그들의 세계 한 가운데로 깊 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종점 다방에 드나드는 무리 중에는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꽤 많 았다. 종점 다방이야말로 정보 입수를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사장은 복부인은 물론 투기꾼과도 과감히 접촉을 시도했다. 어떤 사람이건 정보 입수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주저하지 않고 마 주쳤다. 그리하여 온갖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정보를 긁어모을 수 있었다. 하안동 철산리에서 한 몫 챙기고 넘어온 부동산 중매장 이들의 정보가 그 중 가장 쓸만했다. 마침내 사장은 산본에 부는 바람의 정체를 거울을 들여다보듯 훤히 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후발 주자로 뛰어든 신 참들로부터 점차 사장을 정보통의 핵심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그 동안 입수한 정보를 취사선별했다. 그 결과 가장 막강한 힘과 이권을 장악하고 있는 단체가 산본 과 금정 지역의 토박이 청년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신도시 개발 바람에 편승하여 한 몫 챙기고 떠나려는 외지 사기꾼들이었다. 이를테면,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말할 때의 그 한 철을 노리고 뛰어든 메뚜기 떼에 다름아니었다. 하지만 그 지 역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단체인 청년회는 메뚜기들과는 근본적 으로 처한 입장이나 위상이 달랐다. 그러니까 청년회는 산본과 금정 지역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청년회 조직에는 조상 대대로 그 지역을 지키며 살아온 토박이 로부터 신도시 개발 계획이 세워지기 이전에 외지에서 굴러들어 와 그 곳에 터를 잡은 반토박이, 그리고 뿌리를 박은 지 이제 겨 우 십여 년 안팎에 이르는 신흥 이주집단에 이르기까지 두루 결 집되어 있었다. 허나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청년회가 대개 그렇 듯이 그 지역을 이끌어가는 청년회원들 역시 오합지졸에 불과했 다. 그 지역에 남아 농사를 짓는 순수 토박이 청년은 별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었다. 객지로 나가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고 향 마을에 이상스런 바람이 분다니까 하루 아침에 고단한 삶을 청산하고 돌아온 부류를 비롯하여, 장사꾼, 노가다, 핫바리 월급 쟁이로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하다가 역시 하루 아침에 덜컥 손을 털고 고향으로 돌아온 족속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종다양한 부류 들이 섞여 있었다. 산본과 금정 지역 청년회는 조직을 이끌어갈 강력한 리더가 부 재했다. 그러니 자연 전문 사기꾼들에 비해 정보가 뒤졌고, 확실 한 정보통이 없으니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종점 다 방으로 사장을 찾아와 이것저것 정보를 캐묻기도 했다. 그런 점 으로 미루어볼 때 청년회가 얼마나 엉성한 단체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청년회에 어수룩한 인물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니었다. 외지 사람들이 꾸역꾸역 산본으로 몰려들고 있는 현상을 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는 정도는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만 뜨면 보고 듣고 쑥덕거리는 이야기가 산본 에 불고 있는 바람과 무관하지 않는데, 구제불능의 청맹과니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 바람 속에서 돈 냄새를 맡지 못하랴. 굼 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법이었다. 산본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들이 바 로 그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향 마을로 돌아와 기웃기웃하다가 보면 아파트 한 채는 건질 수 있으리라, 저마다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벌써 비닐하우스를 여러 동 사들여 신 속히 방으로 개조한 다음, 산본으로 몰려드는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을 해주고 돈을 챙기는 발빠른 족속들도 발생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그리고 다른 여타 지역에서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 든지 간에 그 지역에 발만 들여놓으면, 머잖아 아파트 한 채가 떨어진다는데, 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쓸개빠진 작자는 아무 도 없었다. 그러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하는 작전으로 겁 없이 덤벼드는 족속들이 많았다. 그 틈서리를 이용하여 사기꾼 투기꾼들의 농간이 횡행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수룩한 청년회라고 해서 그런 현상을 빤히 지켜만 보고 있었 던 건 아니었다. 서로 쉬쉬 하는 가운데 불법을 자행하곤 했다. 헛간에 방을 들이고 가난한 친척들을 불러 들인다거나, 돼지막이 나 우사의 한쪽 귀퉁이에 표나지 않게 방을 들여 조심스레 뒷거 래를 트기도 했다. 그 정도는 그러나 비닐하우스를 개조해서 팔 아먹는 전문 사기꾼들에 비하면 원시적이고 순진한 수법에 지나 지 않는 것이었다. 디 데이를 잡고 사장이 청년회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그 지역 에 첫발을 내딛은지 한 달쯤 경과한 후였다. 보디가드인 망치가 사장을 수행했다. 두 사람이 청년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다섯 명의 사내가 일시에 달갑잖은 눈길을 던졌다. 대개 한 두 차례씩은 종점 다방에서 안면을 익힌 치들이었다. 대낮부터 청년회 사무실에 죽치고 있는 걸 보면 명색이 간부급들인 모양이 었다. "사장님이, 청년회 사무실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 중의 한 녀석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사장이 서울에서 큰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는 녀석 같 았다. "손님이 찾아왔으면, 우선 앉으라고 권하는 게 예의지." 사장이 소파가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다가가며 한 마디 툭 던 졌다. "그러믄요, 우선 자리에 좀 앉으시죠." 처음 말을 붙인 녀석이 예를 차렸을 때는 사장이 이미 소파의 빈 자리를 찾아 착석한 다음이었다. 망치가 사장이 앉아 있는 뒤 쪽에 장승처럼 우뚝 버티고 섰다. "청년회장이 누구냐?" 사장이 탁자 위에 구둣발을 척 올려놓으며 청년회 간부들을 쏘 아보았다. "김성만인데요?" 역시 처음 말을 붙인 녀석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청년회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 뭐니?" "총무를 맡고 있는 장수원이라고 합니다." "장수원이라……, 수원에서 태어났니?" "네, 고향이 수원입니다." "산본엔 언제 이사왔어?" "다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이곳으로 밀려왔습니다. 국민학교 와 중학교를 모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산본 사람이나 뭐 진배없습니다." "지금 생업으로 하고 있는 일이 뭐야?" "상고를 졸업하고, 시흥에 있는 조그만 기업체에서 일하다 가……, 지금은 떼려치우고 청년회 일을 돕고 있습니다." 장수원이 오른 손을 뒤로 가져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면상을 보아하니 스물 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개의 혓바닥이 핥고 지나 간 밥그릇처럼 해끔한 인상이었다. 그나마 상고를 나왔다고 총무 일을 떠맡긴 모양이었다. "청년회장은 지금 어딨어?" "점심 먹으로 집에 들어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서,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고, 속히 이리로 데려와." "네, 제가 곧 다녀오겠습니다." 장수원이 부리나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네 사람은 핼끔핼끔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뭔가 불안한 눈초리를 떨쳐버리 지 못하고 있었다. 찾아온 사람은 둘이었으나 어쩐지 풍겨대는 분위기가 노골노골해 뵈지 않았던 것이다. 십 분쯤이 지나자 장수원이 청년회장을 데리고 왔다. 청년회장 김성만은 투박한 인상에 천성이 고지식해 뵈는 삼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당신이 청년회장 김성만이오?" 사장이 김성만에게 차가운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왔습니까?" 김성만은 어디까지나 고분고분한 어투로 응대했다. "할 말이 있으니, 우선 좀 앉으시오." 사장이 눈짓으로 건너 편 자리를 가리켰다. 김성만이 주저없이 사장이 지목한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청년회 간부들이 민적 민적 김성만의 주위로 다가서며 보호막을 둘러쳤다. 사장이 실쭉 웃으면서, "그렇듯 긴장할 것까진 없어. 난 청년회를 돕고 싶어 찾아온 사람이니까. 지금부터 하는 말 잘 새겨듣고 판단은 여러분들 스 스로 하도록 해." 하고 허두를 뗀 다음, 차분히 마음에 담아간 말 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 보기엔……, 청년회는 힘이 너무 없어. 주먹이 약하는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 앉아있는 나보다도 정보가 어둡다 그 말이야.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며, 온갖 투기꾼과 사기꾼들의 농간에 대항하여 이 지역을 지켜내겠어? 또 한, 신도시가 들어서는 대가로 땅값이며 집값을 적절히 보상받아 야 할텐데, 청년회가 나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야. 내가 여러 루트를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는 산본과 금정 지역의 땅값은 평당 3만 원에 불과해. 한 데, 눈에 보이지 않는 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지역은 평당 100만 원을 넘어선지 벌써 옛날이야. 무려 삼십 배 이상이나 손 해를 감수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 말이지. 청년회에선 어떤 기 준치를 산정하여 보상금 협상에 임할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청년 회 조직으론 평당 10만 원을 받아내기도 어려워. 적어도 내가 보 기엔 그렇다 그 말이야. 간단하게 얘기를 끝내는 게 좋겠군. 산본과 금정 지역이 직면 하고 있는 일 일체를 내게 맡겨준다면 최소한 평당 50만 원에서 많게는 70만 원까지 받아낼 자신이 있어. 하지만 청년회 힘만으 론 어림도 없지. 관청과 끝없는 줄다리기를 해서 이겨낼 승산이 없다는 뜻이야. 왜냐, 우선 주민들을 단합시켜 조직적으로 대항해 야 하는데 청년회부터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형 국이거든. 그러니 어떻게 전체 주민들을 하나로 똘똘 뭉쳐 막강 한 공권력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야. 과연 이 지역 청 년회가 중심이 되어서 공권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겠는지……, 회 장이 한번 의견을 말해 보시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장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던 청 년회장 김성만이 좌우의 간부들을 한 차례 둘러본 다음 입을 열 었다. "물론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외지 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어떡하든 우리 역량을 총동원해서 밀고 나갈 작정입니다." 그러자 사장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진 않을 거야. 요즘 이 지역에는 수많은 외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지. 하루에도 십수 명씩 이사를 오느라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걸 청년회에서도 직접 보았을 테니 잘 알 거야. 비닐하우스고 우사고 돼지막이고 가릴 것 없이 마구 방을 들여 마치 아파트를 분양하는 양 팔아먹고 있 는 실정이거든. 그런데 대부분의 이권이 돈 있고 정보 빠른 투기 꾼 사기꾼들에게 넘어가 이 지역의 실질적인 주인인 청년회는 그 야말로 속빈강정이란 말이야.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그걸 막아내 야 하는데 속수무책이고. 왜냐, 청년회 측에서도 남몰래 슬쩍슬쩍 방을 들이고는 아는 사람을 통해 팔아 넘기고 있거든. 그러니 사 돈 남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해서 작금에 이르러 산본과 금정 지역엔 본래의 주민들보다 외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어. 그런데도 그에 따른 대책을 세 우거나 조정을 하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실정이 야.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결국엔 죽도 밥도 안되겠지. 누군가가 나서서 전체 지역 주민들의 권익을 대변해 주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이전까지 이 지역을 강력히 통제를 하지 않으면 안돼. 바로 그걸 내가 나서서 대신 해결해 주겠다, 뭐 그런 말이야." 하 고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절제된 동작으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자 측후 방에 바싹 붙어서 있던 망치가 신속하니 라이터불을 켜 대령했 다. "사장님은, 무슨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장수원이 고양이처럼 낯간지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지금은 없어. 그러나 이 지역 청년회에서 나를 믿고 따 라 준다면 가능하지." 사장이 길게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어디까지나 저희들이 나서서 처리할 문젭니 다." 청년회장 김성만이 사장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이봐, 총무!" 사장이 총무인 장수원을 지목했다. "네, 말씀하십시요." "청년회 회원이 몇 명이나 되나?" "현재까지 등록된 회원이 오륙십 명쯤 됩니다." "당장에 확답을 들으려고 꺼낸 말은 아니니 지금부터 내가 하 는 말 잘 들어. 오늘 저녁에 청년회 비상총회를 소집하도록 하고, 방금 내가 제안한 안건을 가지고 총회의 의견을 물어주었으면 좋 겠어. 그리고 내일 정오까지 그 결과를 내게 직접 통보해주기 바 래. 종점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알겠나?" 사장이 총무에게 지시하고 시선을 청년회장 김성만에게로 던졌 다. "그거야 뭐 어려울 게 없지만, 총회를 소집한다고 결과가 달라 지진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저 고마운 이야기를 들은 걸로 하겠 습니다." 김성만의 입장은 끝내 완강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고, 어렵지는 않 다니 일단 총회에 안건을 올리시오. 다만, 미리 한 가지 분명하게 못박아 두겠는데, 총회의 결과가 나중에 불상사를 초래하지 않기 를 바래." "……?" 순간 청년회장을 비롯하여 여러 간부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 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내일 정오에 만납시다. 결과에 상관없이 회장과 부회장과 그리고 총무 세 사람이 함께 나와서 보고하시 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회 사무실을 등졌다. 청년회 간부 들은 난데없이 쇠망치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사람들처럼 서로를 쳐다보면 눈동자를 뙤록거릴 뿐, 잘 가라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를 못했다. 다음 날 정오가 임박하여 사장은 망치를 데리고 종점 다방으로 들어섰다. 청년회에선 아직 아무도 나와있지 않았다. "총회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형님?"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며 망치가 물었다. "넌 어째 그렇게 눈치 구멍이 없니, 츠츳!" 사장이 망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니, 제가 뭘요……?" 하고 망치가 꿍얼거렸다. "불을 보듯 빤한 일을 묻고 있으니 하는 말이야. 힘이 붙이더 라도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쪽으로 결정을 보았겠지. 아 니, 어쩌면 어제 총회 자체를 소집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녀석들은 잔뜩 겁을 집어 먹고는, 오늘 이 자리 에도 안나타나기가 쉬워." "결과를, 그렇듯 빤히 내다보고 있으면서 그런 주문은 왜 했습 니까? 철딱서니 없는 애들을 상대로 말장난을 하자는 것도 아닐 었을 텐데요?" 망치가 입주둥이를 쭝긋 내밀며 물었다. "이런, 숙맥을 보았나? 니 눔은 콩과 보리도 분별하지 못하니? 큰일을 도모하자면 사리에 맞게 순서를 착착 밟아나가야 하는 거 야. 즉, 어제의 일은 내일의 순서를 밟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는 말이다. 너도 아이큐가 있으면 한번 생각을 굴려봐라. 어떤 골이 텡텡 빈 놈들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이권을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뜻 넘겨주겠어? 너라면 그렇게 하겠니?" "어리석은 놈들. 형님이 무서운 사람이란 걸 아직 몰라서 그러 지요. 이 참에 제가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망치가 주먹을 주무르며 어깨를 거들먹거렸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종점 다방에서 30분을 기다렸지만 청년회 간부들은 모습을 나 타내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종점 다방을 찾아왔다가는 공연히 일에 동티가 날까봐 코빼기도 안비치기로 작심한 것 같았다. 똥 이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고 마음 속으로 한 가닥 위안을 붙잡으며. 사장이 망치에게 눈짓을 보낸 다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 일이세요? 내가 뭘 잘못했나,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 게?" 종점 다방의 마담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면서 꼬리를 흔들었 다. 돈 많고 힘 있어 보이는 사람 앞에선 무작정 꼬리를 치고 보 는 것이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여자들의 몸에 밴 습성이었다. 사 장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마담의 응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찻값을 지불한 후 곧바로 다방을 나섰다. 바로 그 다음 날, 만두와 망치가 행동대장이 되어 일곱 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가서 청년회 사무실을 급습했다. 망치가 구둣발로 청년회 사무실의 문짝을 냅다 걷어차고 씨근 벌떡 앞장 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예닐곱 명쯤 되는 청년회 간 부들이, 콩이야 팥이야 쑥덕공론을 까불리고 있다가 화닥닥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휘둥그래진 녀석들의 얼굴은 일시에 하 얗게 질려 있었다. "대체, 무, 무슨 일로 이러십니까?" 청년회장 김성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호기를 부렸다. 그 러나 그의 허벅다리가 먼저 겁을 느끼고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 다. "뭐야, 이 개새끼야! 점잖게 하는 말은 말같지가 않다며?" 망치가 독수리 병아리 쳐다보듯 하며 말을 씹어뱉자, "죄, 죄송합니다. 조용히 마, 말로 합시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김성만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사정조로 나왔다. 허나 그런 사정이나 고분고분 듣고 있을 망치 가 아니었다. "일 없어, 이 더러운 새끼야. 꼭 맛을 봐야 시원하겠다, 그 말 이지? 몸 성할 때 알아서 기면 앓던 이가 덧난대니! 온야, 몸이 근질근질해서 때라도 벗겨낼 판인데 마침 잘 걸려들었다. 개새끼 들, 죽기 전에 염불이나 외워둬!" 망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목자를 위아래로 부라렸다. "어제, 종점 다방에 못나간 건 다름이 아니오라……" 김성만이 핑계를 늘어놓았다. 망치가 대뜸 말허리를 붙잡아, "입가생이를 찢어놓기 전에 주둥이 닥치지 못하겠니!" 하고 탁 분지른 다음,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린 이유는, 나중에 우리 형님한테 가 서 고시랑고시랑 늘어놓기로 하고, 우선 약속을 깨뜨린 맛이 어 떤 것인지 보여주마. 맥아지를 비틀어 버려도 시원찮을 새끼들!" 김성만의 턱주가리를 향해 날센 망치 주먹을 날렸다. "아윽!" 김성만이 양 손으로 자기 면상을 감싸쥐며 그 자리에서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그것을 신호로 만두와 졸개들이 몸을 날렸다. 촌동네 청년회 간부들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거창한 몸놀림을 선 보일 필요가 없었건만, 졸개 하나가 부웅 몸을 날려 두 다리를 가위처럼 쫙 벌린 채 날아가서는 엉거주춤 서 있는 한 녀석의 가 슴팍을 강타했다. 무술 영화를 방불케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 다. "어이쿠, 사람 죽이네!" 청년회 사무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쇠파이프와 각구목이 춤을 추며 닥치는 대로 사무실 집기를 떼려 부셨고, 두 놈의 머리통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나머지 간부들도 몸에 적잖이 상처를 입고 한쪽 구석에 주저물러앉아 바들바들 몸을 떨 었다. 만두가 부리부리한 눈매로 청년회 간부들을 훑어본 다음, "회장, 부회장, 총무는 앞으로 나왓!" 하고 명령했다. 만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목을 당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자동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솟구치듯 일어섰다. "사타구니에서 방울 소리가 울리도록 후딱 이리로 못와!" "네에 네에, 지금 가, 가고 있습니다요." 총무 장수원이 대표로 주절거렸고, 셋이 경쟁적으로 앞으로 뛰 어나와 차렷, 하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군대의 선착순보다도 더 빠른 동작이었다. "이 놈의 새끼들, 봉고차에 태우고 대기해!" 만두가 졸개들에게 지시했다. 졸개들이 네, 하고 허리를 꺾어 보인 다음 부리나케 청년회 간부 셋을 데려다가 봉고차에 실었 다. "그리고, 너 이 새끼, 일어나!" 만두가 그 중 상처를 덜 입은 녀석을 지목하자, "네에 네에, 제가 뭔 잘못이라도……" 하며 쭈볏대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만두가 속주머니에서 만원권 지폐 한 다발을 꺼내 바른손 엄지 와 검지 사이에 끼고는 왼쪽 손바닥에 대고 두어 차례 탁탁 쳐댔 다. 그런 다음 일어서 있는 녀석의 발치께로 툭 내던지며, "대가리 다친 애들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치료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조용히 대기하고 있어. 그리고 부서진 집기들은 깨끗이 청소하고 필요한 만큼 새것으로 들여놓도록 해. 만약 소문이 밖 으로 새나갈 시엔, 너희들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흙구덩이 속에 파묻어 생매장을 시켜줄 테다!" 하고 못질을 했다. "네에,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이따가 밤에 다시 오겠다. 차질이 없도록 알아서 잘 해." "네에, 그 점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요." 일어선 녀석이 마치 조직의 졸개라도 되는 듯 고분고분 말대답 을 늘어놓고 있었다. 만두와 망치는 등을 돌려 청년회 사무실을 나왔다. 망치는 곧장 봉고차에 올랐고, 만두는 졸개 하나를 데리 고 자기 승용차로 갔다. 그로부터 30분쯤 후 청년회 간부들을 실은 봉고차와 만두의 승 용차가 산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내의 어느 대형 백화점 앞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일군의 무리가 우르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숍 안의 구석진 자리에는 사장이 미리 와서 대기 하고 있었다. 만두와 망치가 청년회 간부들을 데려다가 맞은켠 자리에 주저 앉힌 다음 사장의 양 옆자리로 가 앉았다. 청년회 간부들은 죄짓 고 붙잡혀 온 사람처럼 한결같이 고개를 푹 떨군 채 파들파들 몸 을 떨고 있었다. "김성만!" 사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청년회장의 귀에 전달되었다. "네에, 말씀하십시요." 김성만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개를 들고 말해야지! 사내 녀석이……" 김성만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화덕의 불씨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장의 눈빛과 마주치자 질겁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 종점 다방에 왜 나오질 않았니?" "그게, 사실은, 저어……" "시끄럽다! 약속을 어겼으니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하겠지?" "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김성만!" "네에, 마, 말씀하십시요." "동생들이 좀 과격하게 다룬 모양인데, 고깝게 생각하진 말아 라."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먼저 약속을 어겨 죄송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다. 그럼,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산본을 살리기 위해선 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공권력에 조직 적으로 대항해야 할 줄로 안다. 물론 너희들이 직접 나서서 처리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내가 나서는 것보단 열배 백배 이득이 적을 것이다. 더이상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청년회에서 나를 도와줬으면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청년회장 김성만이 좌우의 간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었습니다. 힘 닿는 데까지 성심껏 돕도 록 하겠습니다." 하고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와서 돕네 못돕네, 했다가는 또 어떤 풍파를 감당해야 될 지 자신이 서질 않았던 것이리라. 부회장과 총무도 잽싸게 눈치 를 채고는 고개를 끄덕여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임을 표시한 마당 이었다. "고맙다. 진즉에 그렇게 나왔다면 오늘과 같은 불상사는 없었 을 것을……." "그런데……, 한 가지 조, 조건이 있습니다." 김성만이 떠듬떠듬 말하며 사장을 쳐다보았다. "뭐냐? 기탄없이 얘기해라." "철거대책위원회를 언제쯤 발족할 생각이십니까?" "지체할 틈이 없다. 조만간에 서둘러야겠지." "저희들 생각도 그렇습니다. 한데, 대책위원회 실무진에 저희 청년회 간부들을 포진시켰으면 합니다. 사장님 의향은 어떻습니 까?" "조건이란 게 바로 그거니?" "그렇습니다. 다른 조건은 일절 없습니다." 잘라 말한 뒤, "그 정도는 들어주셔야 저희들이 나서서 청년회 회원들을 적극 설득할 수 있잖겠습니까?" 하고는 겁에 질린 눈망울을 굴렸다. "그건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다. 내가 청년회의 도움이 필요하 다고 말한 것은 기실 그런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사장이 팔을 뻗어 김성만의 손을 덥석 쥐었다가 놓으며, "오늘 저녁에 내가 한턱 쓰지!" 하고는 만두에게 눈짓으로 무 어라 일렀다. "산본 촌놈들 놀라 자빠지는 꼴 좀 구경하게, 클럽으로 데려가 아가씨들을 하나씩 붙여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형님?" 만두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가씨들까지 붙여준다 는 말에 청년회 간부들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 다. "그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두와 망치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 어섰다. 청년회 간부들도 궁둥이에 침을 맞은 사람처럼 동시에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청년회 사무실에 있는 애들도 뭘 좀 먹여야하질 않겠습니까?" 다시 만두가 물었다. "그것도 알아서 처리해." 이어 청년회장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갑니다. 대책위원회 발족 건을 비롯하여 오늘 이후의 일은 일체 여기 있는 이 사람과 상의해서 처리토록 하세요." 하고 만두를 김성만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깍듯한 어조일 수가 없었다. 청년회 간부들은 어리둥절 하여 정신이 미치미치했다. 만두와 김성만이 악수를 나누며 통성 명을 하자, 사장이 앉아 있던 자리를 뒤로 하고 조용히 커피숍을 등졌다. 망치가 그림자처럼 사장의 뒤에 따라붙었다. 만두를 비롯한 여러 졸개들이 사장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구 십도로 꺾었다. 얼떨결에 청년회 간부들 역시 허리를 구십도로 꺾고 있었다. 그 날 밤 청년회 간부들은 클럽의 룸으로 안내되었다. 난생 처음,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미끈미끈한 아가씨들을 접하 게 되자 월궁선녀를 꿈 속에서 보는 듯 눈알이 휘떡휘떡 뒤집힐 지경이었다. 청년회 간부들은 아가씨들의 권주가를 안주 삼아 헤 롱헤롱 술잔을 뒤집다가 기어코 만취하여 차례로 그 자리에서 뻗 어 버렸다. 산본의 청년회 사무실에서도 졸개 서너 명의 주도하에 시끌벅 쩍하니 술파티가 벌어졌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4. 축제 허허로운 벌판 위로 스산한 바람이 휘익휘익 지나갔다. 비닐하 우스의 쓰레기 더미에 쌓여 있던 흙먼지와 비닐 쪼가리들이 바람 에 실려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며칠째 날씨마저 우중충하여 벌 판은 묘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하루라도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산본과 금정리 의 경계선상에 블록과 반네루 루핑 따위의 자재를 동원하여 스무 평 남짓한 가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산본과 금정 지역 철거대책 위원회'란 현판을 내걸고 성대하게 개소식을 열었다. 정월 대보름 날의 축제보다도 거창한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마장동 도살장에서 백정으로 활약하다가 고향 마을로 돌아온 청년회 회원 하나가 즉석에서 돼지 한 마리를 도살했다. 한켠에 선 마른 장작을 뽀개 불을 놓았고, 듬성듬성 돌멩이를 괴고 그 위에 깨진 함석스레트를 주워다가 얹으니 그럴 듯한 돌판구이가 되었다. 사무실 주변 곳곳에 설치된 함석스레트 위에 갓잡은 돼 지 살점이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막걸리와 소주가 짝으로 배달 되어 너나없이 흥겨운 술판이 벌어졌다. 마을의 노인정에선 꽹과리와 장고를 동원하여 띵까당 똥땅 축 제의 흥을 돋웠고, 날라리를 불어제끼며 분위기를 종횡으로 휘젓 고 다니는 영순네 할아버지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부녀회에서도 거족적으로 동참하여 잔일손을 거들었으며, 함께 술잔을 꺾어대 며 음양 묘합을 이루는데 크게 한 몫 보탰다. 청년회 회원들은 잔치마당의 주인이나 되는 양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을 사람들 의 수족이 되어 열심히 시중을 들었다. 그리하여 산본과 금정 지역에 뿌리박고 사는 주민들이 모처럼 자연스레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가 비닐하우스, 우 사, 돼지막 속에 비좁은 방 하나를 겨우 세 얻어 최근에 입주한 외지인들까지 합세하여 축제 마당은 난데없는 야단법석을 이루었 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인근의 주민들도, "이것이 웬 도야지 괴기야?" 하며 잔치마당에 끼어들어 고기와 술을 거나하게 췌도록 마셔댔다. 흥에 겨워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어대는 흥분파도 더러더러 속 출하고 있었다. 한낮에 시작된 잔치마당은 저녁 무렵이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건사해야 할 부녀회원들마저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 지을 생각을 망각한 채, "부어라 마셔라 인생을 살며는 몇 백년이나 살더란 말이냐. 살 아생전 시에 제멋대로 놀다가 가세나 헤에……" 하면서 제풀에 흥분하여 본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온 집안 식구들을 남김없이 대책위원회 사무실 안마당으로 집 결시켜, 돼지고기와 술과 떡으로 저녁까지 때우고 돌아갈 심산인 것 같았다.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기우는 저녁 해가 꼴깍꼴깍 가 쁜 숨을 몰아쉬고, 스멀스멀 땅거미가 몰려들기 시작하자 잔치마 당은 더욱이나 흥청망청 무르익어 갔다. 안면몰수하고 놀아제끼 기에는 훤한 대낮보다야 어두컴컴한 밤이 제격이라고 너나없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딴따라 출신으로 놀아보았던 청년회 회원 하나가, 환 장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제꺽 간파하고는 봉고차를 끌고 어디 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은 일락서산하던 때를 전후해서였다. 서울의 청계천에서 급히 사가지고 왔는지, 아니면 가까운 대학의 학생회에서 빌려왔는지, 신속히 앰프와 스피커와 마이크를 사무 실 앞마당에 설치했다. 한낮의 축제를 지배했던 노인정의 꽹과리와 장고와 날라리 소 리는 쿵쾅거리는 현대식 음악에 기가 질려 슬금슬금 자리를 물려 주고 뒤로 물러났다. 노는 것도 힘이라고 노인들 쪽에서 먼저 근 력이 딸렸던 것이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자 리를 양보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노인들이 앞 장서 하나 둘 궁둥이를 털고는 축제 마당을 떠났다. "형님, 분위기가 제법 씸벅씸벅하게 돌아가는데요? 이 정도라 면 개소식은 대성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입가생이가 귓불 아래까지 찢어진 만두가 사장을 쳐다보며 흐 흐흐 웃었다. 그때 사장은 대책위원회 사무실 안에서 느긋한 표 정으로 창 밖의 잔치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장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산본과 금정 지역의 노다지는 이제 내 영향권 안 으로 들어온 것이나 진배없다, 하는 생각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았 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만두가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따로이 할 말이라도 있는 눈치로군." 하고 사장이 돌아서서 만두를 쳐다보았다. "지금 밖에서 쿵쾅거리는 밴드 소리 들리지요? 눈치 빠른 녀석 이 어디서 앰프와 스피커를 가져와 설치했지 뭡니까. 분위기가 쉬이 사그러들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거겠지요. 저희로선 다행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떡 본 김에 제 사지낸다고, 엉성하게나마 무대를 꾸미고 클럽에서 아가씨 몇 명 데려다가, 노래도 시키고 춤도 선보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없 이 한번 놀아 보라고, 기왕지사 펼쳐놓은 멍석에 비단을 깔아 주 자는 겁니다." "……그래서?" 사장이 만두의 의도를 물었다. "그래서라니요? 한판 걸판지게 놀고 나면, 오늘 축제마당에 동 참한 주민들은 모두 한 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고, 또 나 중에 저희들이 펼쳐 나아가고자 하는 일에 너나없이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란 말이지요. 조선 사람의 심리란 게 일단 약을 꿀꺽 삼킨 다음엔 엔간해서는, 나 몰라라 하질 못하는 성미거든요. 선 거철만 되면 막걸리 멕이고 고무신 돌리고 돈봉투 확확 뿌려대는 게 다 약값을 뽑을 수 있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수작이 아니 겠습니까?" 만두가 제법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산본 사업을 앞장서 제안 한 장본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열의가 넘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사장이 흔쾌히 승락했다. "알겠습니다, 애들에게 지시하면 금세 뚝딱뚝딱 무대를 만들 겁니다. 알고 보니 청년회에 별의별 놈들이 다 있어요. 백정 출신 이 없나, 목수 출신이 없나, 딴따라 출신이 없나……. 나무 토막 과 판자데기만 있으면 순식간에 무대가 완성될 겁니다. 클럽엔 제가 직접 차를 몰고 가서 반반하고 걸쭉한 년으로 둘만 데려오 겠습니다. 그럼, 지금 곧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만두가 꾸벅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오갈 때 차 조심해서 몰아라." "염려마십쇼,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만두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밤이 점차로 농익어 가고 있었다. 난데없이 미녀 가수와 미끈 한 쇼걸이 출현하자 축제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 느낌이었다. 그 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청년회 회원들은 물론이었고, 마을의 부 녀회원들도 서로 뒤질세라 엉덩짝으로 박자를 맞추어가며 잘들 놀았다. 밤도 이슥해져 가거니와, 경산부들의 염치란 것이 일단 한번 벗어 던지면 그것으로 끝이어서, 노는 행태가 그렇게 적나 라하고 노골적일 수가 없었다. 인간의 마음밭에 자리잡고 있는 본성이란 결국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한켠에서는 디스코 경연대회가 열렸고, 다른 한켠에선 술판이 끝없이 이어졌으며, 노래를 선호하는 패들은 마이크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환호자약했다. 그러고는 마이크 를 손에 잡기 무섭게 누가 들어주거나 말거나 고래고래 목청을 찢어댔다. 그 통에 산본의 어둠을 비춰주는 별들이 옴머옴머 놀 라며 경기를 앓았다. 축축한 밤 공기도 홍역을 앓듯 열을 발산하 고 있었다. 술과 고기와 춤과 노래가 한 데 어우러진 난장판이었 다. "이제 우리 동네가 살판이 날 모양이여?" "누가 아니래나, 이렇게 좋은 줄을 알았으면 진즉에 대책위원 횐가 하는 것을 결성하는 건데! 우리 마을이 철거되고 아파트가 들어설 때 들어서더라도, 매일 밤 오늘같이만 놀아봤으면 원이 없겠네, 나는!" "청년회에서 끌어들인 사장이 수완이 보통이 넘는 사람이라데?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가 없데요. 세상에 그런 앗싸르비야한 신사는 보다가도 첨이라며 모두 수군 수군하더구만. 주먹도 엔간해서 수하에 졸개들이 수두룩하고 말 이여. 이제 철거반장 장또라이는 죽었다!" 이렇듯 대책위원회 발족이 때늦은 감이 있다며 안타까워 하는 남정네들이 있는가 하면, 부녀회원들은 관심의 초점이 다소 엉큼 한 데로 기울어져 있었다. "누가 뭐라든 난 사내답고 씩씩한 남자가 좋더라. 어깨가 떡 벌어지고 팔뚝에 근육이 불뚝불뚝하고 말이야. 오 년만 젊었어도 사장이란 사내를 어떻게 요리해볼 수 있을 텐데, 아이고 남주기 아까우에! 우리집 영감쟁이는 영판 시들시들해서 혹가다가 가죽 방아를 찧어대도 골패 쪽엔 기별조차 안온다니깐! 새끼들 땜에 죽지못해 사는 거지, 휴우, 이 녀러 신세." "애게게……, 그거이 어디 수만이 엄마한테만 해당되는 한숨이 래? 집영감 나이 들면 너나없이 오십보 백보지. 암튼, 주먹 센 남 자들이 가운데 다리 힘도 여간이 아니라데? 깔깔깔……" "그런 소리 지껄이지들 마셔. 그래도 우리네 신세가 과부보다 야 상팔자 아닌가뵈? 헌 자가용이라도 굴리는 사람들은 과부 허 전한 심정을 몰라요. 왜 요번에 비닐하우스에 새로 이사와설랑 시장터 구석에서 순대파는 매꼬롬하니 생긴 과부 있잖여? 얼마 전에 순대 천원어치 사면서 언뜻 들으니께 밤이면 물꼬가 허전해 서 당최 견딜 수가 없다는겨. 무얼 가지고서라도 이따금 그 놈의 째진 물꼬를 틀어막아 주지 않으면 심신이 근질근질해서 못살겠 다는겨." 술 췐 부녀회원들의 수다방아를 들어보면 이처럼 음습하 고 적나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저런 공염불을 안주 삼아 깔깔대는 맛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듯 부녀회원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아무려나, 부녀회원들과 청년회원들이 자진하여 수하로 들어온 셈이었으니, 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산본과 금정 지 역의 양대산맥을 다 장악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제 그들 을 밑천 삼아 사업을 벌리기만 하면, 황금이 눈덩이처럼 불 어날 것이었다. 어쩌면 10년 정도 클럽을 경영하여 벌어들 일 황금을 1년 안에 긁어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클럽 아가씨의 낭랑한 목청과 선정적인 춤 동작에 마을 남정네들은 대부분 혼이 달아났다. 외지 사람이란 게 흠이 긴 하나 젊은 사장을 대책위원회 회장으로 추대하기를 백 번 천번 잘 한 일이라고 서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에 바빴다. 젊은 사장이 아니라면 이런 엄청난 축제를 언감생 신 꿈이라도 꾸어 보았겠느냔 것이었다. 또한 아리따운 아 가씨들과 더불어 한판 걸판지게 놀아볼 수 있었겠느냐며 다투어 입에 침을 튀겼다. 클럽의 영업부장이었던 만두의 특별 지시를 받고 내려온 아가씨들은 촌동네 남정네들에게 갖은 애교를 부려가며 술 을 따라 권했다. 어디 그뿐인가. 손을 맞잡고 함께 춤을 추 어주기도 했으며, 은근이나 슬쩍 엉덩이 언저리를 침범하는 투박한 손길이 많았으되, 모르는 체 웃음으로 꼬리치며 곧 잘 받아넘겨 주었다. 촌동네 남정네들에게만 아가씨들의 인 기가 상한가를 기록한 건 아니었다. 부녀회원들도 한 데 어 울려 춤추며 놀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우리도 젊어 한 때 는 저만 못지 않았더니라, 하는 향수에 취하는 재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늙수그레한 할망구들도 뒤켠에 쳐져서 구경을 즐겼는데, "저것들이 신식 기생들 아닌가뵈?" 놀라 합죽한 입을 벌리는 할망구가 있는가 하면, "기생은 뭔 기생, 내 눈에는 꼭 양귀비가 환생하여 내려 온 것 같구먼!" 하고 다리가 미끈미끈하고 얼굴에 곱게 화 장을 한 클럽의 아가씨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할망구도 있었다. 하기는 늙은쟁이들의 허풍이란 게 이렇듯 터무니없는 측 면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축제는 좀처럼 파장을 맞을 분위기가 아니더니, 자정이 임박해지면서 하나 둘 나가 떨 어지기 시작하여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을 보았다. 2백 근이 넘는 통돼지 한 마리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자취를 감추었고, 막걸리와 소주도 각각 대여섯 짝씩 동이 났다. 어지간히들 먹고 마시고 논 셈이었다. 시루떡 두 말 과 기타 자잘한 안주들도 바닥이 났다. 청년회 회원들과 클 럽의 졸개들이 남아 뒤처리를 했다. 만두가 졸개 10여 명을 데리고 대책위원회 사무실에 남았고, 사장은 승용차 편으로 서울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 사장은 클럽의 간부들을 남쪽 하우스로 집결 시켰다. 남쪽 하우스는 클럽에서 남쪽 방향으로 얼마 떨어 져 있지 않은 안마시술소의 옥상에 위치해 있었다. 예닐곱 평쯤 되는 공간을 제법 꾸며놓아 분위기가 아담했다. 만두가 먼저 그 동안의 경위를 간략하게 보고했다. 수금 차 신사장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정보를 얻게 된 데에서부 터 산본 청년회 조직을 장악하여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개 소하기에 이른 데까지. 그러고는 이제 본격으로 신사업에 착수할 시점에 다다랐음을 강조한 다음, "조직확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고 봅니다. 전원 사활을 걸고 이번 사업에 총매진해야 할 줄로 압니다만, 클 럽 운영과 산본 사업의 추진이란 두 가지 사안이 동시에 가로놓여 있는 까닭에, 조직 개편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사려됩니다. 그에 따른 자세한 지시사항은 형님이 직접 말 씀해주실 겁니다. 그럼, 형님에게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하고는 사장과 바통텃치했다. "조직확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느라, 한 달여 동안 너희 들과 자주 대면하지 못했다. 그 점 먼저 양해바란다. 그럼, 만두가 지적한 대로 곧바로 조직 개편에 대해 말하겠다." 그렇게 운을 뗀 다음 좌중을 좌악 훑어보았다. 모두들 사 장의 입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긴장한 채 시선을 집중 했다. "그 동안 여러 각도에서 고민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 면 클럽 운영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클럽파와, 산본에서 신 사업을 추진해나갈 산본파로 조직을 양분하기로 마음을 굳 혔다. 조직이 재통합되는 시점까지 클럽 운영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클럽파부터 먼저 발표하겠다. 그 동안 줄곧 우리 조직의 2인자로 있던 총지배인 쌍칼이 클럽파의 실질적인 보스가 된다. 그리고 클럽 쪽에서 잔뼈가 굵은 상무와 맴버 가 그 뒤를 떠받든다. 현재 연예부장인 단검은 행동대장인 꾀보의 역할까지 맡아주기를 바란다. 당장엔 어깨가 무겁겠 지만 책임감을 갖고 잘 헤쳐나가도록! 산본파는 내가 직접 지휘통솔하겠다. 만두와 꾀보, 망치 는 나를 따라 산본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현재의 조직에서 아이들을 스무 명쯤 추려 데리고 내려갈까 한다. 나머지 아 이들은 총지배인이 데리고 클럽 운영에 최선을 다 하도록. 부족한 인력은 그때 그때 보충하여 차질이 없도록 해라, 이 상이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같은 결정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의견을 말해라." 하고 말을 마쳤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형님이 결정하신 일에 따로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총지배인 쌍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좋다, 뭐든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해." "망치야 형님이 늘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녔으니 그렇다 손 치더라도, 만두와 꾀보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클럽으로 선 여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의 하나, 지난 번 강민파의 기습과 같은 일이 재현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 역시 그 점 염려되긴 마찬가지다. 조직 내에서 쓸 만 한 녀석을 선별하여 세울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보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땐 총지배인이 알아서 중간 보스급으로 한두 놈 스카웃해서 배치하도록 해. 그리고, 앞으로는 책임을 맡 은 총지배인이 클럽에서 발생하는 일은 알아서 결정하고 처리하는 게 좋겠어." "네, 잘 알겠습니다." 이어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더니만 총지배인이, "이참에 목포의 불나비를 불러 올리는 방안은 어떻겠습 니까, 형님?" 하고 자신의 의향을 내비쳤다. "그건 말이 안돼. 불나비는 총지배인과 동급이고 서로 막 역한 관계가 아닌가. 한 조직에 보스가 둘이 될 수는 없다. 신중하게 생각해." "죄송합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총지배인이 고개를 푹 떨구자 이번에는 연예부장 단검이 한 마디 했다. "이의를 다는 건 아닙니다만, 가능하다면 형님을 따라 저 도 산본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이제 클럽 일이라면 신물 이 납니다." "시끄럽다. 너마저 없으면 쌍칼이 누굴 믿고 클럽을 이끌 어가겠니? 오히려 애들을 더 보충해야 할 시점이야." 단검이 그만 자라처럼 고개를 쏙 집어넣었다. "저야말로 클럽 일이라면 이젠 목구멍에서 신물이 넘어 올 지경입니다. 형님을 따라 내려가고 싶습니다." 클럽의 상무 남욱이었다. 남욱은 사장이 각별히 아끼는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형제가 없이 자라난 사장으로선 이 따금 남욱에게서 혈육과 같은 정을 느껴 보기도 하는 것이 었다. 허나 사사로운 정을 내세울 계제가 아니었다. "너도 지금은 안돼! 너희들에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못박 아 두겠는데, 조직의 분리가 곧 하나의 힘이 반쪽으로 각각 반분되는 것이 아니다. 두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 각별히 명심해라. 즉, 클럽이 영업적인 측면에서나 조직적인 측면에서 지금보다 그 힘이 약화된다 면 나중에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뜻이다." 이어 상무 남욱을 향해 말했다. "정 나를 따라 내려가고 싶으면 너만큼 일할 수 있는 놈 을 하나 잡아다 앉혀놓은 다음에, 다시 말해, 네가 빠져나 와도 클럽 운영에 지장이 없는 시점에라야 가능하다는 점 명심하도록 해, 알겠니?" 남욱 역시 더이상 대꾸를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산본파도 조직을 키울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형님?" 만두가 산본파 쪽으로 관심을 이동시켰다. 사장이 눈짓으 로 그 말도 옳다 하는 표정을 짓자, "중간 보스급으로 데려다 쓸 만한 친구를 제가 한둘 알 고 있습니다. 애들 십여 명쯤 거느리고 독자적으로 활동하 는 친구들입니다." 만두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그 일은 차차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하도록 하자." "네, 잘 알겠습니다." 만두마저 그만 입을 봉하게 되자 사장이 다시 말했다. "더이상 조직 분할에 대한 이견이 없다면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도록 한다. 망치 데리고 먼저 산본으로 내려갈 테니 까, 만두와 꾀보는 쓸 만한 놈들로 스무 명쯤 추려 가지고 뒤따라 내려오도록 해." "클럽에도 이따금 들르십시요, 형님!" 총지배인의 표정에 아쉬움과 걱정스러움이 스쳤다. "물론이다. 하지만 클럽 운영에 대해선 일체 관여하지 않 겠다." "형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이것으로 회의를 끝낸다." 사장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과 망치가 먼저 산본으로 내려갔고, 나머지는 클럽으로 돌아갔 다. 산본파는 클럽에서 분리 독립하는 그 즉시로 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비밀리에 신사업을 위한 구 체적인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산본에 정착한지 열흘만에 비닐하우스 다섯 동을 손아귀에 넣는 쾌거를 일 궈냈다. 대책위원회 회장이란 명패를 달고 있었으므로 그런 일에 사장이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사장은 어디까지나 주민들 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주민들의 공복으로서 동 분서주하기에도 바쁜 나날이었다. 사장이 대책위원회 회장 으로서 주민들을 위해 내건 공약은 이랬다. 우선 인근 지역과 동등한 가격으로 땅값 보상의 현시가 를 산정하고, 그 금액의 70퍼센트 선까지 협상금액을 끌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본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 의 이주비를 최대한 보상받고, 아울러 세입자를 위한 보호 대책도 세운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산본과 금정 지역에 새 로 입주한 뜨내기까지 포함하여 자체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시청 철거반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산본 지역의 주민들은 때 아닌 구세주가 강림했다면서 너나 할것없이 좋아했다. 사장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 고 나날이 치솟아 올랐다. 청년회원들을 비롯하여 부녀회원 들까지 사장의 말이라면 껍벅 죽는 시늉을 할 정도였다. 한편, 비닐하우스 공작은 만두와 청년회 총무 장수원이 주동이 되어 이루어졌다. 어차피 이권이 크게 걸려있는 사 업이었으므로 만두는 우선 장수원을 구어 삶아야겠다고 판 단했었다. 한데 일이 아귀가 맞으려고 그랬던지, 청년회 총 무 장수원은 생긴 것은 해끔하고 얄상스러웠으나 상고 출 신답게 이재에 매우 밝은 편이었다. 자기 편에서 먼저 발벗 고 나서는 열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운영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금이 필 요하다. 수십 명에 이르는 조직원을 관리하는 것만도 여간 벅찬 일이 아니거든. 해서 하는 말인데, 비닐하우스 몇 동 사들여서 공사를 벌여봤으면 싶다. 한데, 주민들에게 소문 이 나버리면 대책위원회의 신망이 땅에 떨어진단 말이야.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좋은 방법이 없겠니?" 장수원을 남 몰래 클럽까지 데려가 양주를 먹여가며 만 두가 공작을 벌였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사람들 은 대부분 외지 사람들입니다. 물론 땅임자야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지요. 허나 땅을 임대한 계약서가 있기 때문에 주 인으로서도 당장에 내놓고 떠나라며 윽박지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비닐하우스라면 모두들 벌겋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판인데, 예 있수다 그 동안 잘 썼으니 그만 가 져가슈, 하고 선뜻 내놓을 쓸개빠진 작자가 하나나 있겠습 니까. 씨가 먹혀들질 않는 소리지요. 설령 비닐하우스를 내 놓더라도 턱없는 보상을 요구하고 나설 게 뻔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랑 은밀히 상의하는 게 아닌가, 이 사람 아!" "제 힘으로 다섯 동은 언제든 불하받을 수 있습니다, 형 님." "뭐야, 임자가 누군데?" "저희 외삼촌이 비닐하우스 다섯 동에 직접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형님이 적절한 선에서 보상만 해준다면 내일이라 도 당장 빼돌릴 수가 있습니다. 땅값이야 언제고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니 목돈을 미리 찔러주고 비닐하우스만 빌리 자는 것이지요. 단,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형님도 지적 했듯이 이같은 사실이 다른 청년회 회원들이나 외부에 밝 혀지는 날에는, 파장이 자못 심각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어 떻게 하시겠습니까, 형님?" 장수원은 조직의 똘마니나 되는 듯이 거침없이 형님이란 용어를 남발하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건 염려 안해도 돼.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만 우리 조 직은 사람 몇 명쯤 쥐도 새도 모르게 생매장해 버릴 수도 있어. 그만큼 철저하게 비밀이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지." "사실은, 저 역시 그 정도 믿을 만하다고 판단되어 선뜻 형님의 제안에 응하고 있는 겁니다." "좋아, 이익금은 섭섭찮도록 자네 몫과 외삼촌 몫으로 따 로따로 떼어줄 테다. 잘 타협하여 일단 비닐하우스를 확보 해. 그리고, 비닐하우스를 더 입수할 수 있는 루트를 알아 봐. 자네도 이 참에 아파트 한 채는 챙겨야 할 게 아닌가. 확실한 정보만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소문 안내고 수중 에 넣을 테니까." "네, 저는 그저 형님만 믿습니다. 제가 뭐 힘이 있습니까, 아니면 뒷빽이 든든합니까?" "알았어. 자네 뒤는 우리가 충분히 봐줄 테니, 염려 말어. 단, 자네 입에서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 시엔, 목숨을 부 지하기도 힘들어, 명심해!" "여부가 있습니까. 제 몫이나 확실히 챙겨 주십시요. 그 럼,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좋아, 한번 믿었으니 끝까지 믿도록 하지. 우리는 이제 동업자야." 만두는 그 날 장수원에게 반반한 아가씨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클럽 아가씨를 다루는 요령까지도 세세히 귀띔해 주었다. 잠자리에서 아가씨에게 줄 팁도 넉넉하게 찔러 주 었음은 물론이다. 제아무리 만두가 붙여주어 잠자리까지 동 행한다지만, 아가씨 입장에서는 계산은 또 어디까지나 계산 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만두와 장수원의 합작에 의해 비닐하우스 다섯 동에 200 여 개의 방을 들이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주로 야간 에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번듯한 방을 들이는 게 목적은 아 니었으므로. 분양하는 사람이나 분양을 받는 사람이나 오매 불망 방 하나에 목을 매달고 있는 형국이니 다른 것은 문 제될 소지가 별로 없었다. 지역 주민들이나 청년회원들은 그같은 사실을 물론 까맣 게 몰랐다. 투기꾼이나 사기꾼이 공작을 벌이는 것으로 넘 겨짚을 뿐이었다. 200여 개의 방을 하나당 500만 원을 받고 분양해주면 10억이란 거액이 순식간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 다. 공사비를 지불하고 장수원과 그의 외삼촌 몫으로 일부 떼어준다고 해도 7억쯤은 고스란히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실제로 분양을 시작한지 20여일 만에 그 절반의 현금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입주자를 계속 물색한다면 목표액을 달성하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었다. 만두는 사장 의 지시에 따라 수입으로 잡힌 황금을 서울의 각 은행에 비밀리 예치했다. 산본으로 몰려드는 인구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하루에도 대여섯 대의 이삿짐 차가 새로운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그 러니 자연 시청의 철거반에서도 강력한 대응책 마련이 불 가피하게 되었다. 임시 동사무소는 전입 신고를 받느라 분 주했고, 파출소는 또 파출소 대로 바삐 돌아갔다.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들어앉은 지 한 달쯤 지난 무렵이 었다. 기어코 시청의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쳤다. 동이 트기도 전 인 이른 새벽녘이었다. 대책위원회 사무실 역시 불법 가건 물이란 게 철거의 명목이었다. 백번 지당한 주장이었다. 허 나 사무실이 헐려 땅바닥에 나앉게 되면 그 동안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함으로 앉아서 당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포크레인을 앞장세운 채 시청에 소속되어 있는 수십 명 의 철거반원들이 곡괭이, 해머, 빠루 따위를 어깨에 둘러메 고 사무실을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세 대의 닭장차에 실려온 전투경찰들이 뒤에서 철거반원들을 엄호했다. "크르르릉, 크르르릉!" 지축을 울려대면서 새벽 찬 공기를 가르는 포크레인의 캐터필러 구르는 소리를 듣고, 새벽잠에서 깨어난 조직원들 이 헐레벌떡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을 때는 철거반원들이 턱 밑에까지 들이닥친 후였다. 암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 다. 청년회에 소속된 몇몇 대책위원회 간부들은 겁부터 집 어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에 바빴다. 철거반장 장또라이가 선두에서 일군의 철거반원들을 인 솔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세도 등등이 저벅저벅 접근해 들 어오고 있었다. 철거반 뒤쪽에서는 최루탄을 장전한 전투경 찰 대원들이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집단적인 항거가 있 을 시엔 최루탄을 난사하여 대열을 흐트러뜨린 다음, 그 틈 서리를 이용하여 닥치는 대로 치고 떼려 부술 작전인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런 식의 철거전술은 이미 여러 차례 성공 을 거둔 바 있었다. 나무토막을 가져다가 얼기설기 바리케 이트를 치고, 폐타이어 위에 석유를 들어붓고 불을 싸질러 대며 항거해도, 무자비한 최루탄의 난사 앞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철거반장 장또라이는, 비닐하우스, 우사, 돼지막 가릴 것 없이 방을 들여 분양하는 까닭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 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철거반원들을 투입, 공비들의 비트를 박 멸하듯 가건물을 싹 쓸어 버리는 일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가 불법 주거공간 을 차지한 주민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위험성도 없지 않 았다. 허나 불법 가건물에 입주해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입장에 선 목숨을 걸고라도 철거를 막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코 딱지만한 방이나마 헐려 내쫒기는 날엔 5백만 원이란 거금 이 하루 아침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셈이었다. 게다가 집 없는 자의 설움을 어떡하든 모면해 보자는 심산으로 모 험을 감행한 그들이고 보면, 우리 방이 불법으로 지은 것이 라니 옛수 떼려 부수시오, 할 처지가 못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말이 좋아 철거지 실상은 전쟁을 방불케하는 처 절한 투쟁이었다. 떼려 부수면 밤 사이에 몰래 새로 짓고, 또 떼려 부수면 숨어 다시 짓고, 하는 숨바꼭질을 이미 여 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 입주자도 수두룩한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비닐하우스 방을 분양받은 사람들이 모두 가난 한 서민인 것만도 아니었다. 그 중에는 사기꾼도 끼어 있 고,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집 없는 시늉을 하며 내숭을 떨 어대는 독종들도 있었다. 아무튼 철거반장 장또라이는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불법 가건물의 상징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랬으니 눈엣가시 처럼 느껴졌을 법도 했다. 더욱이 대책위원회가 발족된 후 로도 끊임없이 외지인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니 그냥 묵과할 수 없어 새벽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책위원회 사무실도 따지고 보면 불법 가건물인데, 왜 힘없는 서민들의 집만 떼려 부수려는 거요? 시청에서 이렇 듯 일을 불공정하게 처리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나앉아 죽으라는 나랍니까, 대한민국이!" 그런 식의 항의도 적잖이 받은 게 사실이었다. 해서 그 날 새벽의 1차 철거 목표물을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작정한 것이었다. 대책위원회 건물 안에는 세 개의 방과 하나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 중 방 하나는 사장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었 고, 나머지 방 두 개는 조직원들이 숙소로 이용하고 있었 다. 청년회 소속 회원들은 집에 가서 잠을 잤으므로 방이 따로이 필요치는 않았다. "형님, 놈들을 어떻게 할까요?" 만두와 꾀보 그리고 망치가 사장을 둘러싼 채 대책을 숙 의했다. 그러는 사이 사무실 앞까지 당도한 포크레인이 지 붕을 퍽퍽 내리찍기 시작했다. 연장을 든 철거반원들도 사 무실의 벽을 부수느라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애 하나 빵에 보낼 작정으로 몇 놈 작살을 내놓겠습니 다. 제게 맡겨 주십시요, 형님. 이대로 주저물러앉았다간 계 획된 사업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만두가 흥분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좋다, 본보기로 몇 놈 그어 버려! 단, 너희들이 직접 나 서는 건 곤란하니까 확실한 애들에게 지시해." "알겠습니다, 형님." 만두가 사장의 명령을 받고 즉각 조직원들을 집합시켰다. 포크레인이 얼추 3분의 1쯤 사무실을 먹어 치웠을 때였다. 희뿌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그때였다. 빤스 바람에 식칼을 든 대원 둘이, "멈춰라, 이 개새끼들아!" 하며 철거반원들을 향해 맹렬 히 돌진했다. 몸에 문신을 새긴 울뚝불뚝한 근육질의 사내 둘이 저돌 적으로 돌진해오자 일손을 딱 멈춘 철거반원들이, "……어엉?" 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피도 눈물도 없니, 이 씨불할틀 놈들아! 집도 절도 없어 설움에 눈물밥을 먹는 심정을 너희들이 알기나 해?" 다시 한번 소리치고는 두 대원이 적진 깊숙이 침투해 들 어갔다. 나머지 조직원들이 손에 손에 쇠파이프와 각구목을 들고 두 대원을 엄호했다. 한 대원이 악명 높기로 소문난 철거반장 장또라이의 면상에 칼을 긋고 이어 옆구리를 푹 푹 쑤셔댔다. 철거반장 장또라이가 허억, 숨 넘어가는 소리 를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나동그라졌다. 피가 흘러내려 땅 바닥을 적셨다. 이어 또 한 대원이 해머를 들고 앞장서 설 쳐대던 철거반원을 나꿔챈 다음 뒤에서 등짝을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두 놈이 칼침을 맞고 나동그라지자 분위기는 삽 시간에 반전되었다. 두 대원이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다 죽인다아, 이 개새끼들아!" 소리치며 생피 먹은 짐승 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칼침을 놓을 다음 상대를 물색 했다. 그러자 철거반원들이 대보름 날 윷가락 흩어지듯 천지사 방으로 도망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이 새벽의 전투를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모처럼 피를 본 지역 주민들 역시 흥분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쥑여라아! 저 놈들을 다 잡아 쥑여라아!" 목청이 터져라 외쳐대는 주민들이 곳곳에서 속출했다. 그 동안 철거반원들에게 당한 분풀이를 그렇게 소리라도 질러 대며 해소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저어기, 포크레인 운전수부터 잡아 쥑여라아!" 한 주민이 포크레인 운전수를 지목하며 소리쳤다. 포크레 인 운전수는 언제나 선봉에 서서 철거를 자행했으므로 표 적이 된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포크레인 운전수의 눈알이 갑자기 휘둥그래졌다. 그러고는 스턴트맨처럼 운전석에서 한 순간 에 바닥으로 부웅 뛰어 내리더니만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 다. 식칼을 들고 웃통을 벗어제낀 용감무쌍한 두 대원을 선 두에 세우고 쇠파이프와 각구목을 높이 치켜든 조직원들이 이번에는 우르르 전투경찰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함성을 지 르며 달려갔다. "네 놈들도 다 쥑인다아!" 소리치며 그 뒤를 흥분한 주민들이 뒤따랐다. 그 기세에 질려 버렸는지 전투경찰들도 주춤주춤 꼬리를 사리더니 이내 대오를 이탈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닭 장차가 정차해 있는 곳으로 줄행랑을 쳤다. 공격 부대가 계 속 기세를 몰아 달려들자, 부르릉 시동을 건 세 대의 닭장 차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만세! 산본 독립 만세!" 난데없이 산본 독립 만세를 외쳐대는 주민도 있었다. 그 리하여 전쟁 아닌 전쟁은 식칼 두 방으로 싱겁게 대책위원 회 측의 승리로 끝나 버렸다. 빤스 바람에 식칼을 들고 설 쳐댄 두 대원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영웅적인 환호를 받았 으나,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태가 수습되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 에 짱박혀서 좀 쉬고 있거라." 사장이 두 영웅을 곧바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만두와 꾀보를 불러 부서진 사무실을 신속히 원 상복구하라고 지시했다. 주민들이 앞다투어 팔을 걷어붙이 고 덤벼드는 바람에 반나절만에 사무실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철거반장 장또라이와 등짝을 찍힌 철거반원은 병 원으로 즉각 후송되었다. 철거반장 장또라이는 누가 보더라도 나사가 한두 곳쯤 덜 조인 듯한 위인이었다. 직책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행동거지며 하는 수작이 열의 아홉은 주먹구구식 이었다. 철거 대상 건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평무사하게 작업을 지시했더라면 칼침을 맞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 는 자기가 무슨 사단장이나 되는 양 어른 팔뚝만한 지휘봉 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이 놈 부수어 버려! 저 놈도 부수어 버려!" 하며 예사로 철거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러니 철거반장의 지휘봉이 가 멈추는 곳은 여지없이 박살이 나게 되어 있었다. 철거를 당하는 주민들의 눈에 철 거반장이 고깝게 보이지 않는 건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 주먹구구식 행태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또라이였고, 장가 성을 가졌다고 해서 장또라이가 된 것이었다. 철거반이 들이닥쳤던 그 날 새벽 이후, 산본에는 묘하게 도 두 가지 상반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대책위원 회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도가 하늘이 낮다 하고 높아간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투박하고 어수룩하던 청년회 소속 회 원들이 하나 둘 일없이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건달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괜스레 아무 사람이나 건드리며 시비 붙기를 예사로 했 다. 이를테면 지나가는 죄없는 사람의 어깨를 먼저 툭 건드 리며, "야, 이 새끼야! 니는 누시깔도 없어, 왜 사람을 툭툭 치 고 지나가니!" 한다던가 상대방이 별 이상스런 놈 다 보겠다며 눈이라도 치뜨면, "왜 꼰아보니, 엥꼬와? 사람 알아보는 눈이 아직 미숙한 모양인데, 어이구 주먹이 운다. 이걸 치고 개값을 물어봐, 어째!" 하면서 턱없이 행패를 부리며 설쳐대는 것이었다. 사장을 위시한 대책위원회 조직원들을 믿고 그래보는 것 이었으리라. 하여 만두와 꾀보가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놈들 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야, 이 놈들아! 건달은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니? 송충이 는 솔잎을 먹어야지 너희들이 언제부터 주먹을 썼다고 행 패를 부리고 다녀. 이제 그만들 해. 각자 자기에게 맞는 일 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도록 해." 하고 좋은 말로 타일렀다. 허나 한번 재미가 붙은 뒤끝이라 아주 버릇이 고쳐지진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큰 사고를 저지르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긴 촌놈들이 뭔 깡다구가 있어 큰 사고를 저지 르고 다니겠는가. 철거반원들이 대대적으로 몰려왔다가 피를 보고 돌아간 다음부터 산본 지역엔 평화가 찾아왔다. 불법 가건물을 철 거하겠다고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 었다. 악명 높기로 소문 난 장또라이 역시 칼침을 맞은 후 부터는 슬금슬금 대책위원회의 눈치를 살피며 얼씬을 삼갔 다. 철거반장이 그런 지경이었으니 산본과 금정 지역에 뛰 어든 메뚜기들도 점차로 대책위원회를 무서워하는 눈치를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대책위원회는 지역 주민들 의 권익을 대변하고 보호해주는 명실상부한 실세였다. "아이구, 회장님 어디 출타하십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장이 사무실을 나와 거동이라도 할라치면 보는 족족이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아는 체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녀회원들은 다투어 김치를 담가온다, 빨래를 해준다, 하며 조직원들의 시중을 들어주 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장은 그런 주민들을 위해 성심껏 일했다. 시청 민원실을 수시로 들락거렸고, 경찰서장을 만나 주민 들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법원을 찾아다니며 보상금 협상을 위한 유리한 법적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는 한편 부동산쟁이들을 만나 이런저런 정보를 입수하여 만사 불여 튼튼으로 대책을 세우기에 바빴다. 사실이지 산본 주 민들을 위해 사장은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러는 한편, 만두가 사업 추진의 중심이 되어 장수원과 더불어 계속적으로 일을 벌여나갔다. 꾀보와 망치는 조직원 들을 통솔하며 지역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꾀보가 시장통에서 순대를 파는 과부와 찹쌀떡처럼 찰싹 붙어버린 것은 그 무렵의 언저리였다. 꾀보는 총각인 데다 가 생김새가 우락부락해 그런 쪽으로 굶주려 있는 여자들 에게 제법 사내로서의 매력을 발산하곤 했다. 어느 늦은 밤이었다. 한 바퀴 순라를 돌고 대책위원회로 돌아온 조직원들이 정답게 모여 앉아 술판을 벌이던 자리에서였다. 그 날 서울 로 돌아가지 않은 사장도 마침 동석을 했는데, 꾀보가 술기 운이 얼큰하게 오르자, "내가요, 형님. 요즘 육덕좋은 과부를 만나 연애를 걸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세상에 참 끝내주는 여자도 다 있습디 다. 사내를 환장하게 밝히는 여잔데 말이죠, 클클클……!" 하며 혓바닥을 놀려댔다. 그러자, 새벽이면 어김없이 불뚝불뚝 텐트를 치는 통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망치가 군침을 삼키며, "누군데, 그러우? 밤도 이슥한데, 거 연애 이바구 좀 들 읍시다." 하고 턱살을 치켜들며 대들었다. 그 바람에 모두의 귀가 솔깃해져서 꾀보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꾀보가 곰시랑거리며 이야기 주머니를 털어놓았 다.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꾀보가 시장통을 한 바퀴 도는 데 마침 뱃속이 출출하던 참이라, 뭐 간단하게 요기할 게 없을까 하고 사방을 돌레돌레 휘둘러 보았는데, 때마침 김 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가 눈에 번쩍 띄더란 것이었다. "아줌마, 순대 천 원어치만 주우." 꾀보가 대뜸 순대 파는 아줌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랬더니, 순대 파는 아줌마가 순대는 썰어줄 생각을 않 고, 정신나간 여자처럼 멀뚱멀뚱 꾀보를 쳐다보더니, "총각, 몸 한번 실해서 보기에 참 좋다, 잉." 하며 염치 불구하고 꾀보의 팔뚝과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코맹맹이 소 리를 내더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희한한 아줌마도 다 보겠네……' 내심 당황이 되어 움찔했으나 꾀보 역시 여자 속살 구경 한 지가 솔찮이 되었던 터라, 순대 파는 아줌마의 얼굴을 슬그머니 뜯어보았다. 했더니 표정은 쌍글쌍글해도 바탕이 반질반질한 것이 밉상이 아닐 뿐더러 허리 아랫동네 둔부 에 팡팡하니 물이 오른 것이 몸성이 제법 실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목구멍으로 넘긴 꾀보가, "왜 그러우? 이 아줌마 마음 속에 엉큼한 생각이 들어앉 은 모양일세. 구미가 당기면 솔직히 말해보슈. 내 돈 안받 고 홍콩으로 곧장 보내줄 테니까." 하고 수작을 걸어보았 다. 했더니만 순대 파는 아줌마가 순식간에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와 반색을 하면서, 꾀보의 귀를 입 가까이로 잡아 당기 더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귓속말로 몇 시쯤 어디서 기다 리겠노라며 노골적으로 한 수 더 뜨더라나! 게다가 순대까 지 공짜로 듬뿍 썰어주더라나! 실없는 장난이겠거니 하면서도 속아봐야 본전이다는 심 정으로 시간을 맞춰 일러준 장소로 털레털레 나가 보았다. 한데, 순대 파는 아줌마는 없고 곱게 화장을 하고 옷도 산 뜻한 것으로 갈아입은 야한 아줌마 하나가 대번에 눈에 띄 더라나. 외양이 별안간 돌변하여 긴가민가 처음엔 못알아 보았는데, "총각, 나 여기 있어!" 하고 순대 파는 아줌마가 손을 까 닥까닥 해보여서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튼 두 선남선녀는 덜컥 배짱이 맞아떨어져 낯간지러 운 절차 쓱싹 무시해 버리고 여관방으로 직행했다. 옷가지를 훌훌 벗어던지고, '온야, 한판 붙어보자!' 댓바람 에 몸부터 섞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봤더니 과부 아줌마 라, 얼마나 환장을 하고 덤벼드는지 한동안은 정신머리가 산란해질 지경이었다. 또한 여자 쪽에서 너무 드세게 덤벼 드니까 양물이 질겁을 하고는 번데기만하게 위축되는 것만 같았다. 남자야 그러거나 말거나 과부 아줌마는 연신 콧소 리를 킁킁거리면서 괴상한 신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는 데, 옆방에서 누가 들을까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 그래, 니 좋은 걸 낸들 어쩌누. 갈 때까지 가보자!' 하고 본정신을 되찾은 꾀보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용 을 써주었다. 그렇게 연속적으로 내리 삼합을 치른 후에야 과부 아줌 마는, "끄응!" 하고 겨우 나가떨어지더니 숨을 헥헥거리더라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베갯동무 자세로 나란히 누워 과부 아줌마의 저간에 자리잡은 사정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과부 아줌마 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데리고 비닐하우스에 방 을 세 얻어 산다고 했다. "오백 주고 두 달 전에 이사왔어.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아파트 입주권이 생긴다던데 사실일까? 순대 팔아 겨우겨 우 연명하는 주제에 입주권을 받더라도 웃돈 얹어받고 되 파는 수밖에 없겠지만 말야." 과부 아줌마는 방 이야기부터 슬금슬금 말문을 열었다.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아파트 입주권은 따놓은 당상이 라고 하데." 꾀보가 박자를 맞춰주었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알어?" 과부 아줌마는 아직도 성이 덜 찼는지 꾀보의 가슴팍을 쓰다듬던 손을 아래 동네로 주르르 미끄러뜨리더니만 왈칵 풀 죽은 꾀보의 주장군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손장난이라도 놀면서 이야기를 계속할 모양이었다.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그것도 모를까 봐?" 그러면서 꾀보는 과부 아줌마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자기, 비닐하우스 방 구경해본 적 있어?" 과부 아줌마는 걸핏하면 '자기'라는 낱말을 입에 올렸다. 몸을 섞으면 그 순간부터 모든 남자가 '자기'로 돌변하기라 도 하는 듯이. "아직은……, 그런데 그건 왜?" "사람 못살 곳이 바로 거기야." 하면서 과부 아줌마가 한 숨을 포옥 내쉰 다음 길래길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 다. 비닐하우스 방이란 곳이 대개가 얇은 베니어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과 나란히 붙어 있는데, 과부 아줌마의 옆 방에는 신혼부부인지 동거하는 남녀인지 시퍼런 청춘남녀 둘이 살림을 산다고 했다. 한데, 문제는 밤마다 년놈들이 그 짓거리를 하는데 색색거리는 여자의 숨소리며, 떨크덩떨 크덩 방아찧는 소리가 천장을 넘어 소상하게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과부 잠자리라는 것이 허전하기 한량없어 전전반측하며 잠을 못이루기 십상인 판이라, 옆방에서 년놈 들이 시근벌떡 정사를 치르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진 저리를 치게 되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기 손이 골패 쪽으로 이동하여 꿈쩍꿈쩍 손장난을 치게 된다는 것 이었다. 차라리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것이라면 속이 덜 부글거 릴지 모를 일이었다. 얇은 베니어판 사이로 건너오는 방아 찧는 소리란 것이 사람의 상상력을 십분 더 간살스럽게 자 극하여 깜북깜북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실제 로 손톱으로 허벅지 살점을 꼬집어 뜯고, 혓바닥 대신에 베 개를 물어 뜯기도 하는 것인데 다 소용이 없더라나……. 게다가 년놈들이 토끼처럼 후딱 일합을 끝내고 그만 잠 잠해졌으면 좋으련만, 젊은 년놈들이라 힘이 그 쪽으로만 죄다 쏠렸는지 허구한 날 삼합은 보통이라는 것이었다. 시 간도 오래 끄는 편이어서 자정쯤에 도용도용 방아타령을 시작하면 새벽 두세 시까지 어리렁출렁 끝낼 줄을 모른다 고 했다. 더욱이 염치 콧구녕도 없는지 방사 중에 계집년이 어찌 나 괴상망측한 소리를 질러대는지, 심지어는 식칼을 들고 뛰어들어가 년놈들의 배창자를 푹 쑤셔버리고 싶은 끔찍한 충동마저 일어난다고 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계집년의 지랄발광하는 괴성을 듣고, 곤히 잠들었던 딸 아이가 부시시 깨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 는데, 제 딴에도 무언가 수상스러운 느낌이 밀려오는지, "엄마, 옆방에서 짐승 소리가 나는 거 같아?" 하고 묻는 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머리끝까지 버럭 역정이 치밀어 올라서, "그래, 두 짐승이 오밤중에 난리 부르스를 추는 모양이 다. 넌 이불 푹 뒤집어쓰고 어여 잠이나 자!" 하고는 딸 아 이에게 이불 푹 뒤집어 씌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딸 아이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쏙 빼어 내밀고는, "엄마, 난리 부르스가 뭐야?" 하고 묻기 일쑤이고, "시끄러, 이 년아! 난리 부르스가 난리 부르스지." 하고 알밤을 쥐어박으며 입을 틀어막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간 속이 상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딸 아이 교육상에도 비닐하우스란 데가 살 곳이 못되 었다. 다행이 딸 아이가 나이가 어려 그렇지 머리가 더 커 지면 남우세스러워라도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여튼, 식칼을 들고 옆방으로 뛰어들어가 두 년놈들을 차마 난도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 어떡하든 자체적 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루는 시장바닥에서 바나나를 세 개 사가지고 왔다. 저녁 무렵에 딸 아이랑 사이좋게 하나씩 까 먹고는 하나는 찬장에 남겨두었다. 그 날 밤이 이슥하여 년 놈들이 또 그 짓거리를 시작하려는지 부시럭부시럭 옷벗어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흥겨운 방 아타령이 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 겨울에 한 데에서 몸을 파들파들 떨다가 갑자기 따순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당최 참고 버팅겨낼 재간이 없었다. 잠자는 딸 아이 가 깰까봐 살금살금 일어나 찬장에 남겨둔 바나나를 꺼내 신속히 이불 속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껍질을 벗겨내고 자신의 물꼬에 남성 대용으로 살그머니 그 놈을 심었다. 사람 사는 즐거움란 것이 본시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 는 것이련마는, 그 순간만큼은 심신이 온통 골패 쪽으로만 쏠려 있었던 터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실 성을 해버릴 지경이더라고 했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중심에 그 놈을 심었는 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제 맛이 안 나더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입으로 먹는 것만 못하더라고 했다. 그쯤에서 이야기 한 단락을 토막치고, "자기, 왜 그런지 알어?" 하고 과부 아줌마가 물었다. "바나나가 좀 가늘었던가 보지?" 꾀보가 그러려니 하고 응수했더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위에서 묵직하게 눌러대는 남 자 몸뚱이가 없어서 그래. 나도 처음엔 왜 그런가 몰랐는 데, 곰곰 생각해보니 바로 그거더라구. 오늘 시장에서 자기 를 봤을 때 문득 그때 생각이 떠오르겠지. 해서 염치 불구 하고 자기 몸을 막 더듬어본 거야." 다시 고개를 치켜든 꾀보의 주장군을 꽉 움켜쥔 과부 아 줌마가, "여자에겐 요놈의 물건도 요긴하게 쓰이지만, 남자의 묵 직한 몸뚱이와 들척지근한 숨소리가 곁에 없으면 허전해서 영 맛이 안나. 빤스없는 고무줄이고 찐빵 없는 앙꼬라니 까." 하며 느닷없이 깔깔대었다. 과부 아줌마는 모처럼만에 흡족한 표정을 되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날 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서 로의 인생역정을 도란도란 주고받았다. 그 후, 꾀보는 틈나는 대로 과부 아줌마의 몸뚱이를 저울 삼아 자기의 육중한 체구를 달아보곤 했다. 그때마다 과부 아줌마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이 사람이란 사실을 망 각하는 것 같았다……. 꾀보의 걸쭉한 연애담이 끝나자 즉각, "나도 어디 가서 쌈팍한 과부 하나 업어오던가 해야지. 허전해서 도무지 살 맛이 안나." 하고 부러운 나머지 투덜 투덜 토를 단 것은 망치였고, "불쌍한 과부에게 육보시하는 것도 살아생전에 큰 공덕 을 쌓는 일이겠지만, 사업에도 잔신경을 더러 써야지." 자못 점잖게 나무란 것은 만두였으며, "과부 밝히다가 꾀보 골병들라!" 농으로 받아넘긴 건 사장이었다. 그러나 꾀보는 이렇다 저렇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아 버지의 얼굴이 불현듯이 떠오른 것은 무슨 조화였을까. 꾀보는 이따금 아버지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은 꾀보의 나이 일곱 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정식 이혼이 아니라 돌연한 잠적이었다. 그러 나 그 정도의 일은 꾀보가 살던 공장동에선 흔히 있는 일 이었다. 오다가 가다가 만난 사람들이 서로 등 맞대고 살면 그것이 사랑이었다. 그리고 맞대었던 등을 다시 돌려세우면 그것이 곧 이별이었다. 공장동 사람들의 특이한 인생살이의 한 단면이었다. "이혼이란 것도 있는 사람들의 팔자소관이지, 츠츳!" "누가 아니래. 가난이 사람의 정마저 끊어버리는 타락한 세상이 되었으니 장차 이 일을 어쩌누." "남 얘기가 아니여. 넨장맞을, 다음엔 뉘 차례가 될지!" 어머니가 집을 나갔을 때 이웃에 사는 어른들이 아버지 를 위로한답시고 뱉어낸 말들이 대강 이랬다. 꾀보네가 아버지를 따라 공장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 은 그의 나이 네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공장동 일대에 커다란 공업 단지가 들어서게 된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 정책으로 치달리기 시작하여 너나없이 눈에 불똥을 튀기며 허리띠를 졸라매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 이전의 공장동 주민들은 농토를 일구어 일년을 먹고 사는 소박한 농부들이었다. 그리고 서울 변두리의 소시민들이었다. 공장 건물이 여기저기 난립하게 되면서 본래의 땅주인들 은 대부분 농토를 팔고 살 만한 곳을 찾아 떠나버렸다. 그 대신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그러나 먹고는 살아야 할 무 지렁이들의 이합집산의 장으로 공장동은 탈바꿈하게 되었 다. 한 집 건너 술집, 한 집 건너 음식점, 한 집 건너 찻집, 미장원, 이발소, 약국, 전자오락실, 잡화상, 양품점, 만화가 게, 당구장, 문방구, 정육점……. 그리고 공장의 수많은 굴 뚝들. 공장동은 그렇게 변모되어 갔다. 아버지도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많은 무지렁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꾀보네 이웃에 사는 어른들도 인생살이의 촌수가 아버지와 엇비슷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장에 나가고 없는 시간에 꾀보는 거의 누이와 함께 하루 해를 보냈다. 누이가 국민학교에 입 학한 후에는 참으로 외로운 아침 나절을 혼자 보내지 않으 면 안되었다. 비가 몹시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칠 때는 원시 인처럼 죽음같은 공포에 떨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 시절이 그래도 행복했다는 걸 알았다. 어머 니가 집을 나가버린 뒤부터였다. 갑자기 집안이 텅 빈 것처 럼 느껴졌었다. 하루종일 을씨년스런 바람만 불어왔다. 어 머니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얼마나 크고 위대했었는지 남은 가족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버지는 집 나간 어머니 를 찾는다며 다니던 공장을 때려치웠다. 그것은 그러나 아 버지의 엄청난 계산 착오였다. 공장동을 버리고 떠난 여자는 비단 어머니뿐만이 아니었 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기 이전에도 많은 어머니들이 앞장 서 가출하는 시범을 보여 주었었다. 정식 이혼이 아니라 하 나같이 급작스런 증발이었다. 정식으로 이혼에 합의한다는 건 남의 동네 이야기였다. 따라서 이혼한 후 어느 한쪽이 위자료를 받고, 또 자식들의 양육에 따른 책임을 분담하는 일 따위는 애당초 의미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다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의 일이었다. 공장동 사람들은 위자료를 주고 받을 만큼 부자가 아니었다. 그런 기본 조건을 갖추고 살아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근근히 살아가기에도 급급 한 하루살이 인생들이었다. 하여 어느 한 쪽이 홀연히 자취 를 감추면 그 동안의 공동체 생활은 한 순간에 깨져 버리 고 마는 것이었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중에서 스스로 공장동으로 되돌아 온 경우는 그때껏 한 차례도 없었다. 아니, 꼭 한번 그런 어머니가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몇 달을 견디지 못하 고 또 다시 자취를 감추어 버림으로써 아버지들의 기대감 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하여 가출이란, 아이고 어른이고 간에 공장동에선 별반 놀라워할 사건이 못되었다. 암탉이 달걀을 낳는 것만큼이나 일상사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를 찾는 데 실패했다. 한강 모래밭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것 같았으리라. 자식까지 버리고 떠난 여자를 쉽사리 찾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아버지가 어리석었다. 아버지는 나날이 폐인이 되어 갔다. 당신의 인생을 위안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술뿐 이라고 아버지는 철썩같이 믿는 듯했다. 거일 매일같이 술 을 입에 대었다. 집안 꼴은 말 그대로 말이 아니었다. 어린 누이가 어머니 대신 기우는 집안을 건사해 보려고 발버둥 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꾀보가 처음으로 가출을 시도한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 였다. 공장동에 사는 두 친구와 함께였다. 겨울방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으나 갈 곳 이 마땅치 않았다. 수중에 돈을 가지고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집구석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하루종일 거리를 쏘다니다가 밤이 깊어 허기진 배를 움켜 쥔 채 지하철 정거장을 찾아들었다. 지하철 정거장의 콘크리트 동굴 속에서 숨어 들어갔다. 다행히 동굴 속에는 가마떼기가 하나 깔려 있었다. 낡고 꾀 죄죄한 담요도 한장 놓여 있었다. 거지가 하룻밤을 자고 간 곳인지 몰랐다. 동굴 바닥에 부탄가스 통이 한가로이 나뒹 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마도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잠시 혼몽한 정신을 내던지고 간 곳인 모양이었다. 추위 때문에 허리를 노래기처럼 웅크렸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지하철 정거장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이 그나 마 따스한 불씨가 되어주었다. 집을 나간 어머니는 몇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소식 조차 없었다. 먼저 공장동을 떠난 다른 어머니들과 하등 다 를 바가 없었다. 술주정뱅이가 된 아버지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 새벽같이 잠에서 깨어났다. 꾀보와 두 친구 는 콘크리트 동굴 속에서 나와 새벽 지하철을 탔다. 언 몸 뚱이가 풀리자 한결 살 것 같았다. 따뜻한 순환선 전철 안 에서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며 몇 바퀴를 돌았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전철을 버리고 거리로 나왔다. 자장 면이라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야말로 돈이 웬수 였다. 그 날 저녁 황혼이 핏빛으로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저녁이 되면서 기온이 급강하했다. 또다시 지하철 의 콘크리트 동굴 속으로 돌아가 잠을 자야 하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밥을 먹기 위해 남의 것을 훔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골몰해 보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니 가출의 보람이 너무 없는 듯했다. 꾀보는 돈을 훔치기로 작정했다. 돈만 있으면 일단 여유가 좀 생길 것 같았다. 거리에서 30대 아주머니의 핸드백을 채 가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둑이야, 소매치기다!" 아주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셋은 전 방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질주했다.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 으로 좁은 골목 안으로 방향을 꺾었다. 한데 운이 나빴던 것일까. 한 친구가 어떤 어른의 발길에 채여 골목 앞 길바 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꾀보는 우뚝 뜀박질을 멈추었다. 차마 친구를 버리고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붙잡혔다. 핸드백을 잃어버린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다가오 더니 꾀보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위이잉. 귓속에 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두겹 세 겹으로 셋을 에워쌌다. 그들은 가까운 파출소로 넘겨졌다. 순사나리에게 돌아가면서 꿀밤을 먹었다. 셋은 벌받는 아 이들처럼 파출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술에 취한 모 습으로 아버지가 파출소에 나타난 것은 밤이 꾀나 깊어서 였다. "면목없심더, 면목없심더." 순사나리 앞에서 아버지는 똑같은 말을 십수 차례나 반 복했다. 그때 꾀보는 아버지의 충혈된 눈가에 이슬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에게 왠지 미안했다. 두 친구의 부모들도 곧 파출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셋은 곧 훈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아버지는 차츰차츰 술을 자제하 는 모습을 보였다. 누이는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돈 을 벌겠다면서 걸핏하면 눈물을 찔끔거리곤 했다. 공장을 그만 둔 아버지는 막노동을 시작했다. 집안이 다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없는 집은 나머지 세 사 람에게 결코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국민학교 4학년에 되면서부터 꾀보는 수시로 가출을 일 삼곤 했다. 아버지와 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이 싫었 다. 그에게 집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나 누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집은 어머니가 부재하는 삭막한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꾀보는 마침내 집 을 나왔다. 국민학교 5학년에 다니던 가을이었다. 집을 나 온 꾀보는 자연스레 양아치의 무리에 섞였다. 세상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숱한 고생을 몸으로 체득했다. 그러면서도 어른이 되기 전에는 집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 했었다. 실제로 꾀보는 그 후 다시는 집을 찾지 않았다. 어 른이 되고 건달 세계에 몸담을 때까지 단 한 차례도 공장 동 쪽으로 발길을 돌려보지 않았다. 언제고 한번쯤은 아버 지와 누이가 살아가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 두 사람의 모습 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스스 로도 알 수가 없었다. 꾀보는 이따금 아버지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다. 꿈 에 아버지와 누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집을 나간 어머니는 그러나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 니에 대한 야릇한 그리움에 홀로 몸부림쳐 보기도 했다. 어 쩌다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 할 때 문득 잃어버린 어머니를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란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꾀보는 아 직 결혼을 꿈꾸어본 적이 없었다. 꼭 정이 들어서라기 보다 꾀보는 산본의 시장통에서 순 대를 파는 과부를 어쩐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 까닭을 확연하게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자기 딸을 버리지 않고 최소한 함께 살고 있는 까 닭이었다. 5. 대도 그로부터 사나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만두와 장수원이 사업 확장을 위해 한창 공론하던 중에, "차암, 그렇지!" 하며 장수원이 격절탄성을 내질렀다. "뭔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이니?" 만두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장수원을 쳐다보았다. "지난 번 비닐하우스 다섯 동으론 성이 안차지요, 형님? 방금 제게 두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하고 괜스레 뜸을 들인 다 음, "저희 외삼촌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최판석씨라고 있습니 다. 이보게 판돌이, 하고 부르는 어른들도 더러 있지요. 비닐하우 스 예닐곱 동에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행실이 수더분하고 건실한 편입니다. 허나, 외삼촌한테 스리슬쩍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 면 어쩌면 비닐하우스 네댓 동은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외삼촌과 호형호제하며 의좋게 지내는 사이거든요. 또 하나, 저쪽 언덕배기에서 돼지를 키우는 박영감이라고 있어 요. 사람이 약간 모자라는 듯싶기도 한데, 그 집에 남아 돌아가는 돼지막이 여러 칸 있습니다. 그 영감이 워낙이 술을 좋아하는 술 꾼인 데다가 한량없는 게으름뱅이라서 겨우 돼지 서너 마리 기르 는 것도 죽지못해 하는 것 같습디다. 그러니 자연 돼지막이 남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제대로 돼지를 사육했다면 아 마도 지금쯤 서른 마리는 족히 꿀꿀거리고 있을 겁니다. 그 영감의 마누라쟁이가 누구인고 하니, 종점 다방 옆에 왜 허 름한 식당이 하나 있잖습니까, 뚱뚱보집이라고? 그 식당 주인이 바로 영감의 마누라쟁입니다. 식당을 하다보면 음식 찌꺼기가 엄 청 나오게 되잖아요? 영감은 하루에 한 차례씩 리어커를 끌고 식 당에 가서는 음식 찌꺼기를 가져다가 돼지를 먹입니다. 그 영감 이 얼마나 웃기는 위인인지 한번 들어보실랍니까?" 장수원의 이야기가 난데없이 박영감에게로 넘어갔다. "아무려나, 자네 좋을 대로 해." 만두가 상관않겠다는 투로 대꾸하자, "그럼, 이야기가 박영감 쪽으로 넘어갑니다." 하고 장수원이 돼 지막 영감의 인생 스토리 한 토막을 소개했다. 영감은 돼지 서너 마리를 기르는 데도 잔꾀가 나는지 제대로 건사를 못해 주야장천 마누라쟁이에게 욕설을 바가지로 퍼먹는다 고 했다. 한편 마누라쟁이는 돼지 키우는 삯으로 하루에 천 원씩 을 남편 되는 영감에게 찔러주는 모양이었다. 영감은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으며 일차 해장술을 걸치고, 음식 찌꺼기를 통에 담 아 리어커에 싣고는 타박타박 돼지막이 있는 비탈길을 올라 집으 로 돌아가는데, 마누라쟁이가 찔러준 돈으로 매일같이 가게방에 들러 막걸리를 두 병 사가지고 간다는 것이었다. 영감은 돼지 키우는 일보다는 막걸리 마시는 일을 하루일과 중 가장 으뜸으로 치부하는 사람 같았다. 하루종일 적당히 술에 췐 상태를 유지하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혼자 유유자적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 었다. 허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영감을 가리켜 술꾼이라 손가락 질 했고, 어떤 사람은 주태백이 또는 모주영감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한 때는 박처사라고 추켜세워주던 사람도 있었으나 요즘은 아니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영감이 마을의 그 누구와도 다정스 레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감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 가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영감의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이 환갑쯤 돌아온 사람이면 줄잡아 네댓 씩은 자식을 거느리게 마련인데 뭔 곡절이 있는지 알 수 없다고들 했다. 영감이 유리걸식하는 꾀죄죄한 모양새로 산본 마을로 들어온 것은 십여 년쯤 전의 어느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했다. 뉘엿뉘엿 검붉은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 무렵 홀홀 단신으로 마을 어귀에 쓰러져 있는 것을 청년들이 사랑방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하 여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었다. 마을의 청년들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자비심이 발동해서 그리했던 건 아니었고, 다만 난데없이 객지 송장을 치우게 되는 일이 마음에 언잖아 우선은 살려놓고 보자는 심산이었다고 했다. 한데, 끊어질 듯한 숨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고 몸도 사뭇 가뿐하게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감은 도시 산본 마을을 떠 날 생각을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 죽어가는 중늙은이 송장을 겨우 살려놓고 혹독한 겨울 바람 속으로 내쫓기엔, 마을 인심이 그리 사나워서 뭐 좋을 것이 있겠는가 싶었다. 하여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게 되었었다. 더욱이 그대로 마을 에서 내쫓았다간 이내 행려병자가 되어 객사하기 꼭 알맞은 꼴세 여서, "이보세요, 고향이 어디세요?" "이 추운 겨울에 우리 마을엔 어쩐 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 까?" "이제 몸도 많이 좋아졌고 하니 그만 떠나야 되지 않겠어요? 집이 어딥니까? 돌아갈 곳은 있는 겁니까?" 앞다투어 마을 청년들이 물었으나 도리머리를 만들어 보일 뿐 통 대꾸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오갈 데가 없는 거렁뱅이 인가 보다 생각하고 마을 청년들이 공론한 끝에 영감에게 언덕배 기 있는 허름한 빈 집을 천거했다. 그 집은 몇 해 전에 살던 주 인이 목을 매달고 죽은 후 그대로 방치해둔 일종의 흉가였다. 해 거름녘만 되어도 귀신이 나온다며 마을 사람들이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얼씬을 삼가는 곳이었다. 그같은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처를 마련해 준다는 말에 영 감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더란 것이었다. 마을 청년들이 흉가 로 버려졌던 집의 방구들을 뜯어고치고 안팎을 깨끗이 단장한 다 음 영감에게 헌사해 주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밤사이 영감이 귀신에 홀려 죽어 나자빠 지지나 않았나 궁금하여 삼오삼오 짝을 지어 아침 인사를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영감은 말짱한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을 맞이했다. 귀신이 나온다는 말은 헛된 소문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마을 사 람들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무서움증이 귀신이란 가공의 형 상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몰랐다. 영감은 이따금 마을의 사랑방으로 내려와 관상이며 사주 따위 를 보아주며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하며 그 해 겨울을 넘겼다. 지 금도 마을의 노인들 중에는 관상이며 사주를 보는 영감의 실력이 귀신을 홀릴 정도라며 혀를 내두르곤 하는데, 아무튼 대단한 이 인(異人)이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영감은 쌀과 찬거리가 떨어질 때쯤이면 마을의 사랑방으로 내 려왔고, 두어 사람 원하는 대로 관상이나 사주를 보아주었다. 그 리고 그 답례로 쌀과 찬거리를 얻어 가지고 언덕배기로 되돌아가 곤 했다. 현금을 한사코 거절하는 습성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로 서도 외려 부담이 적었다. "그저 놀라우에, 내 살아온 과거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더라니 깐!" "아 글쎄, 십여 년 전에 조부 묘 이장한 것까지 다 알아맞히데. 그러면 말 다한 거 아니겠어?" "어디 그뿐인 줄 아는강! 우리 내외 잠자리 재미가 뻑뻑한 것 까지도 콕 찝어 맞히데, 뭐. 우리 마누라가 위장이 안좋아서 그렇 다고 해쌓더구만. 그래서 토극수(土克水)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가 발생해서 방사를 할 때 마누라 옥문 안짝에서 음수가 별로 샘 솟지를 않는다는 게야. 가뭄에 마른 샘물처럼 음수가 말라 버렸 으니 여자 쪽에서 뭔 재미가 동하겠느냐. 그 속이 뻑뻑하여 방사 를 할 때면 불이 날듯 통증이 심하니, 남편이 가까이 접근하려고 만 해도 질겁을 하고 꼬랑지를 사리게 된다는 게야. 내 원 참 세 상에 별 희한스런 경우도 다 보겠다 싶어, 사실이 그러한가, 하고 마누라의 옆구리를 슬쩍 찔러보았지. 그랬더니 그 말이 영락없이 꼭 들어맞는다는 게야. 해서 나중에 박처사를 조용히 찾아가 그 럼 양물에 춤이라도 바르고 들어갈까요, 하고 의논을 청했더니 말없이 처방전을 써서 내밀며 하는 말이, 한약방에 가져가서 이 대로 한 첩 지어 달여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그러더구만." "그 약을 먹은 후, 박처사의 처방전대로 마누라쟁이 옥문 안짝 에 음수가 제법 흥건하던가?" "흥건하다 뿐인가. 음수가 흘러넘쳐 찌꺽찌꺽 해. 파하하하 ……!" "이제야 세상 사는 재미를 느꼈겠구만 그래?" "두 말하면 잔소리를 왜 묻나!" 영감에게 관상이나 사주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 살아온 인생을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그 오묘한 조화통에 그만 넋을 잃 곤 했다. 그리하여 영감의 소문이 인근동까지 차츰차츰 그 범위 를 넓혀가기에 이르렀다. 영감은 그러나 쌀과 찬거리가 있는 한 누가 찾아오더라도 관상이나 사주를 보아주지 않는 이상스런 고 집을 부렸다. 한편, 받아가는 복채가 워낙 적었으므로 그 해 겨울 이 물러갈 즈음엔 마을 어른들의 절반 정도가 영감으로부터 관상 이나 사주를 보았고, 너나없이 그 신통함에 고개를 훼훼 내둘렀 다. 이윽고 상큼한 바람과 함께 봄이 찾아왔다. 어느 날 버스 종점 부근에서 허름한 식당을 경영하는 삼십 대 후반의 과부 아줌마가 소문을 듣고 언덕배기에 있는 영감의 집을 찾았다.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언제쯤 환한 햇빛을 볼 수 있으려 나, 아니면 과부 신세를 청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려나, 대체 무엇이 궁금하여 과부 아줌마가 영감을 찾았는지는 아무도 소상 히 아는 바 없었다. 다만 그 과부 아줌마와 영감이 허름한 방 안에서 한동안 무어 라 속닥속닥하였다는데, 영감이 과부 아줌마의 관상을 보고 그녀 의 살아온 생애를 마치 자기 삶을 회고하듯 주절주절 주워섬기면 서 앞날의 길흉득실까지 덤으로 점쳐주었는지, 그것도 소상히 아 는 바 아무도 없었다. 어쨌거나 늙수그레한 영감과 온갖 세상 풍 파를 견뎌온 과부가 댓바람에 눈길이 마주쳤는지, 아니면 하복부 가 찹쌀떡처럼 찰싹 들러붙었는지, 거추장스런 절차를 일절 생략 한 채 엄벙덤벙 내외간이 되었더라나. 그리고 얼마 안있어 각기 다른 살림처를 한 곳으로 모아 궁색한 살림에 윤기를 보탰다고 했다. 과부 아줌마와 영감의 나이가 물경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던데, 정작 본인들에겐 문제거리가 안되었던지 금세 영감 마 누라를 찾아 쌓더라고도 했다. 암튼간에 짝을 잃고 헤매던 외로운 두 마리 기러기가 한 곳에 둥지를 틀게 되자, 영감은 그나마 쌀과 찬거리를 위해 행보하던 마을의 사랑방에 발길을 뚝 끊어 버리더라나. 그러고는 마을 사 람들의 관상이나 사주를 보아주던 일도 빈 손을 털듯 탁탁 털어 버리더라나. 영감의 그같은 처신이 얼마나 철저했던지, 세월이 몇 굽이 돌아 흐르자 마을 사람들은 영감으로부터 자신들이 사주나 관상을 보았던 사실까지도 까마득히 망각할 지경이었다고 했다. 그 후 영감은 무위도식으로 한 세월을 축낼 뿐이었다. 새로 얻은 마누라가 식당을 경영하니 우선 입에 풀칠할 걱정이 없었고, 허름한 집일망정 찬 이슬은 넉근히 막아주니 내외간 잠 자리 걱정할 일도 없었으며, 옷이야 마누라가 새것으로 갈아입혀 주면 입고 그렇지 않으면 단벌신세를 고수하면 되었으니, 의식주 로부터 완벽한 자유인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대추나무에 연 걸 리듯 자식놈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세상을 상대로 아등바등 살 필요를 전혀 못느끼는 모양이었다. 하루종일 집구석에 틀어박혀 영감이 뭔 짓거리를 하며 소일하 는지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영감이 하는 일 없이 너무 펀둥거린다고 판단했던지 마누라가 갖은 성화를 부려 하는 수 없이 언덕배기 빈터에 돼지막을 짓고 돼지를 사육하게 되었었 다. 그렇게 시작한 돼지 치기가 십년 가까이 영감의 몫으로 주어 진 유일한 소일거리라고 했다. 처음엔 돼지를 열댓 마리 키웠는 데, 어느 해인가 돌림병으로 돼지가 떼죽음을 당한 뒤, 그야말로 심심풀이로 서너 마리 키우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돼지 먹이야 음식점에 지천으로 남아도니 그 또한 부러 시간을 쪼개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돼지를 키우면서부터 마누라와 굳건히 약조를 했는지 영감은 하루에 천 원씩의 용돈을 건네받아 그것으로 막걸리를 사먹는 일 을 이 세상 유일한 낙으로 삼는 것 같았다. 관상이나 사주를 보 아주던 박처사에서 술꾼인 모주영감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영감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차츰차츰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영감 스스로가 노 린 수법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영감이에요." 박영감의 인생 스토리를 대충 마감한 다음 장수원이 계속해서, "어쩔랍니까, 형님? 최판석씨의 비닐하우스는 외삼촌을 통해 다리를 놓아 서서히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고, 박영감네 돼지막은 당장에라도 찾아가 접수하면 별 문제가 없을 듯싶은데요? 술값이 나 두둑이 찔러주면 마다하지 않을 줄로 사려됩니다." 하고 곧장 일을 추진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어쩐지 뒤가 좀 츱츱하긴 한데……, 말뚝 뽑은 김에 이빨 쑤 신다고 말 나온 차에 한번 움직여 봐, 어째?" 만두가 다소 민적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장수원이 팔을 걷어붙 이며, "형님답잖게, 그깐 놈의 일에 뭘 망설입니까? 저하고 형님하고 망치 형하고 셋이서 한번 들이닥쳐 보자구요." 하고 졸랐다. "망치는 지금 어디 있니?" 만두가 망치의 행방을 물었다. "종점 다방에 죽치고 앉아 노닥거린다는 소릴 아까 전에 들었 습니다. 또 모르죠, 꾀보 형님의 뒤를 잇는답시고 과부를 꼬시고 있는 중인지." 장수원이 대답하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애 하나 보내서 속히 망치 좀 데려오라고 해라." 만두의 지시가 떨어지고 반 시간쯤이 지난 뒤 망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왜 바쁜 사람을 불렀수? 뭔 좋은 일이라도 있나?" 망치가 툴툴거리며 만두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과부는 하나 건졌니?" "말 말우. 꾀보 형이 과부 씨를 말렸는지 잘 걸려들질 않네." "싱거운 놈, 나가자!" "어디루?" "가보면 알겠지. 가까운 곳이니 후딱 다녀오자." 그리하여 만두는 망치와 장수원을 거느리고 언덕배기에 있는 영감의 돼지막으로 갔다. 영감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겉절이를 안 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겉보리단 거꾸로 묶어놓은 것 처럼 매우 볼품이 없어 보이는 영감이었다. 만두는 영감의 존재 를 싹 무시하고 우선 돼지막부터 살펴보았다. 살아 꿀꿀거리는 돼지는 달랑 세 마리뿐이었으나 돼지막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방 쉰 개쯤은 무난히 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오이십오, 줄잡아 2억5천이라! 얼라들 껌값은 아니로군.' 속셈을 하며 만두가 돼지막을 기웃기웃할 때였다. "왜 남의 돼지막은 기웃거려!"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 았다. 영감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만두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빛은 분명 게슴츠레하였으되, 무언가 섬뜩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왜요, 돼지막 기웃거리는 것도 영감의 허락을 맡아야 합니까?" 만두 대신 망치가 이죽거렸다. "네 놈들 눈에 꿍꿍이속이 들어앉아 있으니 하는 말이야." 영감이 막걸리를 쭈욱 들이킨 다음 잔을 툇마루에 탁 내려놓았 다. "그래요오? 그렇담, 뭔 꿍꿍이속인지 영감이 한번 알아맞혀 보 슈." "사지 멀쩡한 놈들이 할 짓거리가 없어 도적질을 해먹니?" 그 말에 망치가 그만 울컥 화가 치밀어서, "이 놈의 영감탱이 보자하니 말을 마구 씨부렁대네." 하고 영감 에게로 한 발짝 바싹 다가섰다. "그래, 니 깐 눔들이 무서워서……?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 칼 무서워하는 것 내 못보았네라." 영감이 일어나 비틀비틀 마당으로 내려섰다. "정말, 이 놈의 영감탱이가 사람 석죽이누만!" 망치가 오른 주먹을 왼손바닥에 탁탁 부딪치며 폼을 잡았다. "그만들 돌아가. 여긴 내 집이야." "못돌아간다면 어쩔 테여, 이 놈의 영감탱이!" 망치가 제 풀에 흥분하여 연방 '이 놈의 영감탱이'를 주문처럼 외워댔다. 종점 다방에서 과부 낚시를 못한 화풀이를 영감을 상 대로 풀어볼 작정인 것 같았다. 만두와 장수원은 그저 굿이나 보 고 떡이나 얻어 먹는다는 심정으로 멀뚱멀뚱 지켜 보고만 있었 다. 한데 영감은 망치의 기세에 전혀 꿀림을 보이잖고 외려, "고분고분 말할 때 돌아가지 않으면 혼찌검을 당하지." 하는 것 이었다. "뭐야, 된맛을 못봐 이러나. 어째 성질을 살살 돋궈!" 망치가 영감을 한 손에 패대기칠 기세로 와락 멱살을 움켜잡았 다. 그러자 영감이 술 취한 사람 특유의 몸짓으로 이리 비틀 저 리 비틀 하면서, "아서 아서, 이러면 못써." 하며 뒷걸음질쳤다. "못아서, 이 놈의 영감탱이야!" 망치가 멱살 쥔 손에 잔뜩 힘을 넣으며 영감을 번쩍 허공으로 들어올려 맨땅에 패대기를 치려했을 때였다. "어어억!" 하는 비명 소리가 만두와 장수원의 고막을 때렸다. 그런데 맨땅에 나동그라진 것은 영감이 아니라 뜻밖에도 망치 였다. 망치는 목각인형처럼 뻗뻗하게 굳어진 자세로 허옇게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숨이 탁 멈추었는지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아 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장 수원은 물론 만두조차 영감이 무얼 어찌했기에 망치가 저런 지경 이 되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망치의 복수를 위해 영감에 게 달려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영감이 맨땅에 고꾸라져 있는 망치에게로 비틀비틀 다가가 가 슴팍 근처를 발길로 툭 걷어찼다. 그러자, "푸후우……" 하고 그제야 망치가 숨을 내쉬었다. 황당무계한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영감이 다시 비틀비틀 걸어 툇마루께 로 갔다. 영감이 막걸리를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는, "돼지막이 탐나거든, 너희 놈들 두목을 직접 이리로 데려와!" 하면서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돼지막이 탐나서 기웃거린 것까지 죄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러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두가 영감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장수원과 양쪽에 서 망치를 부축한 채 언덕배기를 내려왔다. 곧바로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돌아온 세 사람은 육하원칙을 무시한 채 방금 벌어졌던 일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사장에게 보고했다. "형님이 직접 가서 만나 뵙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두가 사장의 의향을 물었다. "내가 꼭 그 영감에게 가볼 필요가 있을까?" 사장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혹시 또 압니까? 그 영감이 형님에게 선뜻 돼지막을 내놓을 지. 형님을 직접 데려오라는 말을 남긴 걸 보면, 무언가 다른 속 셈이 있는 것도 같습디다." 만두가 재촉하듯 말하자, "제 느낌에도 큰 형님이 한번 가보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장수원이 곁다리를 걸치고 들어왔다. "그럼, 그래볼까? 가서 얼굴이나 한번 보고오지, 뭐?" 사장이 눈을 꿈벅꿈벅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여 사장을 앞장세우고 이번에는 네 사람이 언덕배기에 있는 영감의 돼지막 으로 올라갔다. 네 사람이 영감의 허름한 집 마당 안으로 마악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어서, 방으로 들어들 와!"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감의 목소리가 분명했는데 아까완 달리 어쩐지 목소리에서 기운이 철철 넘치는 것 같았다. "들어오라니, 일단 방으로 들어가지요, 뭐?" 장수원이 세 사람을 돌아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 들어가 보자." 사장이 말하고 성큼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 뒤를 세 사람이 황급히 뒤따랐다. 하여 네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영감은 아랫목에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아 까 전에 막걸리를 마신 태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었다. '아무래도, 예사로운 인물은 아닌 것 같군.' 속셈을 마친 사장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나 머지도 얼떨결에 사장을 따라 영감에게 큰절을 올렸다. "한번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사장이 바른 자세로 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돼지막이 탐이 나거든, 회장이 직접 와서 나와 단판을 지을 것이지, 어찌 되어먹지 못한 애들을 보내 어른을 욕보이나?" 영감이 대번에 꾸지람으로 응수했다. 사장이 대책위원회 회장 이란 사실까지도 영감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 니 개소식을 하던 날 사무실 마당에 잠깐 얼굴을 내비친 것도 같 았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애들이 아직 혈기방장하다 보니 어른을 몰라 뵙고……. 한데, 영감님이 저같은 사람을 보자고 청한 까닭 이 무엇입니까?" 사장은 가급적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그저, 이야기나 한 토막 들려줄까 해서 불렀어." "난데없이 이야기라뇨? 무슨 이야긴데요?" "도적놈 이야기야." "네에?" 사장을 비롯한 네 사람의 눈동자가 돋보기를 씌운 듯 일시에 확장되었다. "왜 놀라나, 그럼 자네가 도적놈의 두목이 아니란 말야? 남의 등을 쳐서 간을 꺼내먹는 그런 도적놈 말야!" "말씀이 좀 과하십니다, 영감님." 사장이 쓴 입맛을 다셨다. 영감은 그러나 아랑곳을 않고, "일전에, 우연찮게도 자네 상(相)을 보았거든……" 하면서 자기 할 말을 계속할 기세였다. "상이라면, 관상 말씀입니까?" "그렇지. 해서 내 조용히 일러줄 말이 있었는데……, 오늘 마침 자네 수하에 있는 되어먹지 못한 도적놈 셋이서 제 발로 찾아와 돼지막을 기웃기웃하더구만 그래. 도적놈 입장에서 보면 탐이 날 법도 해. 그걸 내 모르는 바 아니야. 해서, 겸사겸사 자네를 불렀 어." "암튼 좋습니다. 일단 영감님의 이야기 한 토막 들어보지요." "자네 상을 보니, 큰 도적이 되기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눈에 띄더구먼. 내 재미나는 옛날 이야기 한 토막 들려줄 테니까, 거기 에서 자네의 부족한 점을 찾아보도록 해. 어차피 도적놈뿐이 더 는 못될 상이니 말이야." "도적놈 도적놈 하지 마시고, 어서 옛날 이야기나 들려주시지 요." 사장은 도적놈 소리가 적잖이 귀에 거슬렸다. 하기는, 곰보에게 너는 곰보다 라고 말하고, 미친놈에게 너는 미친놈이다 라고 말하고, 과부에게 너는 과부다 라고 말하고, 위 선자에게 너는 위선자다 라고 말하는 것 듣기 좋아하는 위인 찾 아보기 어렵듯이, 도적놈에게 너는 도적놈이다 라고 말하는 것 듣기 좋아할 도적놈도 세상에는 흔치 않을 것이었다. "장자(莊子) 잡편(雜篇) 끝부분에 도척편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도적놈 이야기가 실려 있어." 영감이 이윽고 옛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공자(孔子)의 친구 중에 유하계(柳下季)란 사람이 있는데 그에 게는 척이란 유명한 아우가 하나 있었다. 척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9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천하 를 횡행하면서, 위로는 제후들을 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 협하여 마소를 앗아갈 뿐아니라, 심지어는 여자까지도 납치해 가 는 잔악무도한 대도(大盜)였다. 어찌나 욕심이 많고 성깔이 사나웠던지 일가 친척은 물론이거 니와, 친형제도 염두에 두지를 아니하였고, 조상의 제사 같은 것 도 전혀 거들떠보지를 아니할 정도로 윤리 도덕이 문란한 위인이 었다. 하여 도척의 무리가 온다는 소문만 나면, 큰 나라고 작은 나라고 간에 황급히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발발 떠는 형국이어서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를 보다못한 공자가 어느 날 유하계를 찾아갔다. "어버이는 자식을 가르칠 의무가 있고, 형은 아우를 지도할 의 무가 있질 않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일컬어 보기드문 현인(賢 人)이라 하는데, 못된 동생 하나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함은 이 름에 걸맞지가 않소. 내가 직접 당신의 동생을 설득하고 싶은데, 의향이 어떠하오?" 그러자 유하계가 즉각 답변했다. "물론 부형된 사람에게 그같은 의무가 따름은 당연한 일이겠지 요. 허나 상대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형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는데, 당신의 변설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내 아우 척으로 말하면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기략(機略)과, 질풍 같은 행동력, 쉽사리 상대를 무찌를 수 있는 완력, 검은 것을 희 다고 둘러붙일 수 있는 변재를 두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오. 다행 이 자기 기분에 들면 공손히 대접을 할 테지만, 심사가 어그러지 면 당장에 화를 내고 예사로 사람을 모욕하는 녀석이니 모르는 체 덮어두시오. 공연히 헛걸음을 하게 될까 염려되오." 공자는 그러나 유하계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고, 안회(顔回)를 마부로 자공(子貢)을 수행원으로 삼아 먼 길을 총총히 떠나갔다. 공자 일행이 이윽고 도척이 머물고 있다는 태산 남쪽 기슭에 당도하였다. 때마침 도척은 부하들을 그늘에 쉬게 하고는 사람의 간을 회쳐서 먹고 있던 중이었다.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알자(謁 者)에게 말했다. "나는 노나라의 공구(孔丘)라는 사람이오. 장군의 높으신 이름 을 사모하여 뵈옵고자 하니 부디 말씀을 전해 주시오." 알자가 도척에게 가서 공자의 말을 그대로 아뢰었다. 그러자 도척이 으적으적 씹어먹던 사람의 간을 퇴 하고 내뱉더니만, "무어야, 공구란 놈이?" 하고 노발대발하였다. 두 눈에는 쌍지팡이가 돋았고 성난 머리털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사실대로 아뢴 죄밖에 없는 알자가 그 서슬에 질겁하여, "저는 그저 사실대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고 발명하였다. 그러자 도척이, "저 노나라의 위선자 말이냐?" 라고 외치면서 고슴도치 같이 쭈볏쭈볏한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네, 그 위선자 놈이 분명한 듯하옵니다." 알자가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고하였다. 도척이 잠시 무 슨 생각에 잠겼다가, 가서 공자에게 전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 했다. "너 즉 공구의 행동은 무거운 죄에 해당한다. 교묘한 말로 문 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道)를 쳐들고, 장식을 단 관과 쇠가죽 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르고는 유해무익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 쑤이다.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제멋대로 시비와 선악을 논하며, 제후들을 그릇되게 인도하고, 학자들을 옆길로 끌어넣으며, 효백 행지본(孝百行之本) 운운하며 공연한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닌다. 모두가 자기 출세를 위한 허튼 수작들이다. 너같이 세상에 해독 을 끼친 인간은 천하에 다시 없을 것이다.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너의 시뻘건 간이 내 밥상에 오르게 될 줄이나 알아라!" 알자를 통해 도척의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그러나 뜻을 굽히 지 않고, "나는 장군의 형님 되는 유하계란 분의 소개를 얻어 저 노나라 땅에서 불원천리 멀다않고 찾아온 사람이오. 모든 것을 용서하시 고 장군의 발 아래 엎드려 뵈옵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알자에게 대신 간청하였다. 알자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도척은 그제서야, "그렇담, 면상이나 보게 이리로 안내해라." 하고 겨우 승낙했다. 공자가 재빠른 걸음걸이로 도척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자 리에 앉지도 않고 두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정중히 인사의 예를 올렸다. 그러나 도척은 노염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두 발을 힘 차게 딛고, 칼자루에 손을 걸치고, 먹이를 노려보는 호랑이처럼 두 눈을 흡뜨면서, "네가 공구냐?" 하고 소리쳤다. "그렇소, 내가 공구올시다." "앞으로 썩 나서거라. 네 지껄이는 소리가 내 기분에 들면 모 르거니와, 그렇지 못할 시엔 목숨을 부지키도 어려우리라!" 그러자 공자가 도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무릇 사람에게는 세 가지 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당한 체 구와 훌륭한 얼굴을 지녀 젊은이나 늙은이나 귀한 이나 천한 이 나 모두 보고 좋아하는 것이 상덕(上德)이옵고, 천지를 덮는 영지 (英知)와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중 덕(中德)이옵고, 용맹 과감하여 많은 무리를 동원하고 군대를 통 솔할 수 있는 것이 하덕(下德)이옵니다. 이 중의 하나라도 몸에 지닌 사람은 임금될 자격이 있다 했거 니와, 오늘 태산에 와서 직접 뵈오니 장군께서는 그 세 가지 덕 을 두루 갖추고 계십니다. 당당한 체구, 빛나는 얼굴, 붉은 칠을 한 듯한 입술, 조개를 세운 듯한 치아, 황종(黃鐘)의 가락에 맞는 목소리……. 그런데도 이름만은 도척으로 불리고 있으니, 장군을 위하여 결코 좋은 일이 못된다고 사려됩니다. 장군께서 만일 제 의견을 따를 의향이시면, 저는 남쪽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노나라, 동쪽으로는 송나 라와 위나라, 서쪽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에 사자로 가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볼까 합니다. 그리하여 장군을 위해 사방 수백 리 에 미치는 성을 쌓고, 호수(戶數) 수십 만에 이르는 나라를 세우 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은 제후로서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백 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을 그치 고,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며 조상의 제사를 받든다면, 그것이 바로 성인(聖人)이 취할 일이며, 또한 만백성의 염원일 것입니 다." 말이야 나무랄 데가 없건만, 공자의 말을 들은 도척은 격노하 였다. "그만 지껄여라, 듣기 싫다!" 도척이 공자의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연해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이라면 혹 모르겠으되, 내가 그깟 이익에 동요 되고 달콤한 네 변설에 넘어갈 것으로 보였더란 말이냐. 내가 당 당한 대장부로서 모든 사람의 흠모를 받는 것은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네 더러운 입으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진즉에 알 고 있는 사실일 따름이다. 무릇 남이 보는 앞에서 아첨하기 좋아하는 놈 치고 숨어서 험 담하지 않는 놈 못보았거니와, 게다가 성(城)을 주고 큰 나라를 주겠다는 네 놈의 더러운 소리는 더욱 귀에 거슬린다. 맑게 흐르 는 물에 내 귀를 세척하고 싶은 심정이다. 네 놈이 이익으로써 내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수작을 하고 있음을 내 알거니와, 그것 은 바로 나를 어리석은 백성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냐. 큰 나라는 그만두고 온 천하를 고스란히 준다해도 그런 것이 어찌 영구히 보존되겠느냐. 요(堯)나 순(舜)은 천하를 지배했건만 자손은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었고, 탕왕과 무왕은 천자가 되었 건만 그들의 자손들은 끊어져 종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듯 큰 이익일수록 잃기 쉬운 법이 아니더냐." "……!" 공자는 대꾸할 말을 잃고 멀뚱멀뚱 눈을 굴리었다. 무쇠 같은 주먹으로 텅 하고 머리통을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도척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내 너에게 인간의 성정(性情)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본래 사람 의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려 하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려 하며, 입은 맛난 것을 찾으려 하고, 마음은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 며 살고 싶어하는 법이다. 사람의 수명은 오래 살아야 백, 보통은 여든, 짧으면 예순이다. 그나마 병과 죽음과 그 밖의 걱정근심 없 이, 진심으로 즐거운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고작해 나흘이나 닷새가 될까말까하다. 우주는 영원한 것이지만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우리는 유한 한 생명을 영원한 우주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날랜 말(馬) 이 문틈 사이를 달려 지나가는 것처럼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 다. 함으로 사람은 이 한 순간의 짧은 일생에서, 정신을 충족시킬 수도, 삶을 온전히 향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도(道)를 체 득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런 까닭에 도를 아는 양 지껄여 대는 너와 같은 놈의 주장에 귀 기울일 내가 아니다. 또한 그럴 생각이 호말(毫末)만큼도 없으 니, 날이 어둡기 전에 속히 너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행여 다시 나를 찾아와 허튼 문자를 늘어놓을 생각일랑은 버리란 말이다. 네가 주장하는 도는 도대체가 본성(本性)에 위배된 엉터리 공론 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는 그만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는 도척에게서 물러나왔다.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올라타기는 했으나 그만 말고삐를 놓쳐 버 렸다. 눈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숙인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공자가 겨우 노나라 동문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유하계와 마주 치게 되었다. 유하계가 공자의 행색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요즘 통 볼 수가 없던데, 수레를 보아하니 어디 먼 곳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입니다 그려. 혹시 내 아우 척을 만나고 오는 길이 아니요?" 하고 물었다. 공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다고 고백했다. "결과가 어떠했소? 내 아우 척이란 놈이 혹 당신을 물어 뜯으 려고 호랑이처럼 덤벼들지는 않습디까?" "그렇소. 이를테면 나는 병이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공연히 쑥 뜸질을 해보겠다고 덤벼들었던 것 같소. 내 생각에만 골몰한 나 머지 너무 급히 달려갔던 게 아니었나 지금 후회막급이오. 가서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수염을 만지작만지작 하려다가, 하 마터면 그 놈의 이빨에 간을 씹힐 뻔했소." "그래 내 뭐라 합디까, 공연히 헛걸음하지 말라고 이르지 않습 디까!" 유하계가 공자를 쳐다보며 끌끌끌 혀를 찼다. "도척의 주제에 그만한 철학을 품고 있다니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오. 나는 아직껏 그만한 대도(大盜)를 만나본 적이 없소." 공자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한편,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던 공자의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부하 하나가 낄낄거리며 배꼽을 잡다가, 문 득 제 정신을 차리고는 도척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한 다음, "도둑에게도 도(道)가 필요합니까?" 하고 물었다. "필요하다 뿐이겠느냐." 하고 도척이 응구첩대하였다. "그렇다면, 도둑에게는 과연 어떤 도가 필요합니까?" 부하가 다시 묻자 도척이 즉시 말을 받았다. "무엇을 하든 사람에겐 반드시 도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로 서는 가져올 물건이 어디에 있는가를 꿰뚫어보는 것이 성(聖)이 요, 맨 먼저 침입하는 것이 용(勇)이며, 맨 뒤를 지켜 철수하는 것이 의(義)이다. 또한, 전진과 후퇴를 그르치지 않도록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지(知)요, 얻은 것을 공평하게 나눠 주는 것이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 덕을 체득하지 못한 채 큰 도둑이 된 전례를 나는 아직껏 보지를 못했다." 도척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절하였다. 영감의 옛날 도적놈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그러니까……, 도적놈의 철학 즉 도(道)를 갖추라는 말씀 같습 니다." 사장이 금방 말귀를 알아차린 체하며 말을 붙였다. "내 이야기는 이미 끝났으니 가서 곰곰이 되씹어 봐." 영감이 그만 일어나 가라는 시늉을 했다. 사장을 비롯한 네 사 람은 밍기적밍기적 차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질 못하고 있었다. "내 돼지막은 자네 마음대로 처분해도 상관않겠으니……, 그만 돌아가!" 영감이 다시 손사래를 쳤다. "모처럼만에 아주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돼지막보다도, 이따금 영감님을 찾아뵙고 좋은 말씀이나 듣고 가도록 해주십시 요." 사장이 진심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거야, 자네 마음이지 내 마음인가?"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영감이 다시 말했다. "허나, 오늘처럼 꿍꿍이속을 따로 감춘 채 살금살금 오지 말고, 그저 늙은이를 벗삼아 잠시 놀다 돌아간다 싶을 때 술이나 한 병 사가지고 찾아와. 번거로운 건 마음에 짐이 되거든."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하지요." 영감에게 다시 절한 후 사장은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 날 밤 사장은 잠을 못이룬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했다. 도 척의 모습이 딱정벌레처럼 오래도록 시야에서 오락가락했다. 6. 전문가 시청 철거반의 장영달 반장이 병원에서 퇴원한 것은 입원한지 한 달이 채 안되서였다. 식칼 테러를 당한 안면과 복부의 상처가 의외로 깊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예닐곱 바늘을 꿰맨 이마엔 지 네 모양으로 반창고를 붙이고, 복부엔 붕대를 칭칭 동여감고 장 반장은 다시 시청에 출근했다. 그러나 한 차례 칼침을 맞은 후라서인지 철거반을 인솔하여 직 접 현장으로 뛰어드는 걸 한사코 꺼려했다. 그나마 이마와 복부 였으니 망정이지 모가지나 염통에 칼침을 맞았더라면 어찌 될 뻔 하였을까! 생각만 해도 장반장은 등골이 오싹오싹할 지경이었다. 목숨을 건져 천만다행이라고 장반장은 생각했다. 또다시 철거 현 장에 뛰어들었다가, 천운(天運) 사납게스리 지독한 종자에게 걸려 들어 치명타를 덧입히는 날에는, 언제 어느 순간 불귀의 객이 되 어 저승으로 호적을 옮겨갈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 자신의 실제 본분을 망각한 채 장반장은 슬금슬금 꼬랑지 를 사리기에 급급했다. 샘이 깊은 물이 마침내 강물을 이뤄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듯. 언덕 위에서 바퀴 달린 마차가 언덕 아래로 툴툴툴 굴러내리듯.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마라 풍월을 읊더라도 자고이래로 세월은 저절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런 까닭에 공무원 월급이란 세월 이 가면 자연뽕으로 똠방똠방 통장으로 입금되는 것이 현실이었 다. 자연뽕만 들고 있어도 솔직히 2등은 무난한데, 야박스레 한 놈 노리고 있다가 바가지를 씌우겠다며 굳이 눈동자를 충혈시킬 필요까진 없지 않겠는가. 장반장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차피 한번 왔다가는 인생이야 내남없이 마찬가지거니와, 아 직도 살아야할 날들이 삼사십 년 이상이나 남아 있는 자신의 미 래가 새삼스레 염려되는 것이었다. 집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쳐다 보며 턱살을 괴고 있는 데면데면한 마누라와 신퉁방퉁한 새끼들 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무리하게 철거반의 호걸남아가 되겠 다며 설쳐고 덤벼들 것까진 없지 않겠는가. 누구네 인생살이란 하냥 별유천지에서 노니는 것일까 보냐. 하루에도 여러 번씩 그런저런 상념이 들어와 박혀 장반장의 뇌 수를 찰방찰방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아아, 사람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새삼스레 인생살이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요즈음이기도 했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 호랑이는 죽어서 호피를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나, 악명 높은 철거반장 장영달이란 이름을 후세에 남겨 무엇할 것인가. 행여나 철거반 임무수행에 만전을 기했다 하여 누가 자신의 성명 삼자를 후세까지 전해주기 나 할 것인가. 또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실상 몇이나 될 것인 가. 그 따위 것이 삼강오륜(三綱五倫), 인의예지(仁義禮智) 운운하 는, 고리타분한 유학자들이 자의적으로 설정해놓은 일종의 도덕 적 사기(詐欺)일지 누가 알겠는가. 설령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된 다 하더라도 그렇지, 유구한 세월이 흐른 뒷날에 그것이 무슨 의 미가 있단 말인가. 다 부질없는 노릇인지 모를 일이었다. 국으로 남의 굿이나 구 경하고 떡이나 얻어 먹는 게 장땡 아니겠는가. 한 세상 그저 둥 글둥글 살다가면 그만이라는, 일반대중을 위한 인생철학도 그래 서 생겨난 것이 아닐 것인가! 장반장은 도무지 철거 작업에 앞장서고픈 염사가 없었다. 인생 만사가 시들시들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요즈음이었다. 누가 보더 라도 얼마 전까지 산본과 금정 지역을 종횡으로 설치고 다니던 철거반장 장또라이가 아니었다. 꼭 그래서였을까. "장반장님, 요즘 너무 몸을 사리는 거 아닙니까?" 철거반의 부하 직원들이 이따금 그런 눈총을 살포하곤 했다. 처음 서너 차례는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왈칵 부끄러움을 느꼈었 다. 그리하여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기도 했으나, 곰곰이 따져보니 꼭 그럴 일만도 아닌 것 같았다. 해서 요즘은 장반장 쪽에서 양 어깨를 활짝 열어젖히고는, "이 사람들아, 내 앞에서 그런 소리 아예 찌걸이덜 말어. 자네 들은 이런 훈장을 받아보기나 했간디? 철거 방해에 부딪쳐 분위 기가 험악하게 돌아갈 때면 핼끔핼끔 곁눈질이나 하고, 종당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꽁무니나 빼는 주제에 까불고들 있어!" 하며 이마에 지네 모양으로 부착된 반창고를 부하 직원들의 낯바 닥에 바짝 들이미는 것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리지만, 장반장만큼 철거작업에 용맹하 고 투철히 임한 사람은 시청 철거반 소속 직원 중에는 아무도 없 었다. 상부의 지시라면, 군대 시절 지휘관 명령보다도 더 철저히 받들어 수행하려고 애쓴 사람은 오직 장반장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장반장이 이제 와서 꼬랑지를 사린다고 이러쿵저 러쿵 힐책할 자격은 없는 셈이었다.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선 후를 따져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장반장이 철거업무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작금에 와서 어부지리로 신수가 편안해진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철거반 직원 들이었다. 그들이 철거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쥐꼬리만한 사명감 이라도 가슴에 품고 있었더라면, 장반장이 칼침을 맞고 병원 신 세를 지고 있을 바로 그 시점에, 이미 대대적인 철거작업에 들어 가 산본 일대의 불법 건축물을 싹 쓸어 버렸어야 옳았다. 그리하 여 억울하게 누워 있는 장반장을 위해 복수를 해주었어야 마땅했 다. 철거반 직원들은 그러나 장반장이 병원에서 이마를 꿰매고 복 부 수술을 받고, 에구데구 신음 소리를 깨물며 앓고 있는 동안, 한두 차례 순번을 정하여 면회를 와주었을 뿐 덩달아 일손을 놓 고 있었다. 장반장이 퇴원하여 또다시 진두지휘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한심한 작자들이었다. 그런 부하 동료들의 행태를 보아 서라도 장반장은 철거에 앞장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장반장부터 철거 작업이라면 학을 떼고 뒷전으로 자꾸 처지는 판국이라, 대책위원회 측은 한시름 놓은 채 발을 쭉 뻗고 잠잘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그런 틈서리를 십분 활용하여 불법 가건 물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들어섰다. 외지 사람들도 갈수록 꾸역 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산본과 금정 지역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불법이 횡행했다. 그러니 시청의 우두머리인 시장으로서도 골머리를 싸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부에서는 수시로 압력이 내려오고, 아파트 공사 입찰권을 손에 쥔 주택공사와 건설업체 측에서는 연일 협공 을 가해오고, 보상금과 관련된 지역 주민들의 민원 또한 폭주하 는 마당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장의 주재하에 '시청 철거반의 활성화 방안'이란 주제를 놓고 대책회의가 열렸다. 요컨대, 불법 건축물을 일거에 쓸어 버릴 수 있는 방안과 밀물처럼 밀려드는 뜨내기 외지인들을 큰 저항없이 추방할 수 있는 방안. 그리고 추방당한 외지인이 다시는 산본 지 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는 방안 따 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무리하게 철거를 강행할 시엔 지난 번처럼 불상사를 불러일으 킬 소지가 다분합니다. 즉 강제 철거만이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것이올시다. 철거에 임하는 철거반원들의 생명과 안전도 차제에 소중하게 인식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장반장의 주장은 어쩐지 발뺌부터 하려고 인상을 풍겼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요?" 시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책 회의에 참석한 몇몇 과장들은 자기 업무소관이 아니라며 무덤덤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물론 철거는 단행해야죠. 허나, 시청에 소속되어 있는 철거반 원들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대 책위원회 사무실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쳐 있을 뿐아니라, 대책위원회 회장을 비롯하여 그의 수하에 있는 놈들이 주먹께나 쓰는 건달들이란 점도 망각해선 안될 줄로 압니다. 따라서, 그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경우 철거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만무하거니와, 저희로서도 이로울 게 별로 없다는 얘 기올시다. 모두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철거반장인 나와 또 한 사람의 철거반원이 놈들이 휘두른 식칼에 맞아 선혈이 낭자한 상 태로 병원으로 후송된 게 불과 한 달 전이었습니다. 사태를 수습 하기 위해 즉각 경찰이 나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범인들이 종적을 감춰버린 뒤라, 결국 유야무야 처리되어 버리질 않았습니 까? 세상에 그게 뭡니까! 똥싸고 밑 안닦은 격이지! 어쨌거나 그런 일이 있은 후 대책위원회 놈들은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산본을 무대로 종횡무진 설쳐대는 실정이고, 반대로 시 청의 철거반원들은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기를 펴지 못하고 있 는 상태입니다. 함으로, 막강한 파워를 지닌 해결사(解決士)가 나 타나지 않고서는, 철거를 강행하기 곤란한 지경에 와 있다, 뭐 그 런 얘기올시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장반장이 길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듣기에 따라선 일목요연하 게 브리핑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대책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반장의 브리핑에 고개를 끄덕여 찬동을 표 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결사가 어디 가까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폴 짝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잖소? 장반장이, 아이들 만화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황금박쥐 같은 해결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잘 모 르겠으나, 철거반이 앞장서 하루속히 그 놈의 대책위원회를 무력 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게 아니냐 그 말이요, 내 말은! 대한민국이, 엄연한 법치국가인데 어떻게 건달들이 날뛰면서 관 청의 공무를 방해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느냐, 그런 말이에요!" 시장이 좌우를 둘러보며 목울대에 핏대를 세웠다. "제게, 한 가지 묘안이 있긴 합니다만……" 철거반의 간부 박문호가 손을 들고 시장의 눈치를 살폈다. "방법이 있으면 어서 말해봐요." 시장이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히 재촉했다. "무성기업이라고 혹 들어보셨습니까?" "몰라요, 난 들어본 적이 없소." "일테면, 도시 재개발 지역의 철거 작업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해결해주는 용역업쳅니다. 그 업체의 대표와 제가 안면이 조금 있습지요. 시장님도 아시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광명시의 하안동 과 철산리가 철거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철거민 대책위원회에 소 속되어 빛나는 활동을 벌였던 친구인데 주먹께나 휘두를 줄 아는 놈입지요. 휘하에 수십 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온데, 요즘은 그때의 노하우를 십분 활용하여 철거를 대행해 주는 용역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철거민 편에 서서 싸웠던 사람이 이번엔 관쪽에 붙어버린 셈입지요. 사람의 앞일이 란 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긴 합니다만, 인생칠십고래희라 고, 그 짧은 세월 동안 사람의 사는 모습이란 게 뭐 그렇고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그 사람에게 철거 용역을 맡기면 십중십 백중백 완전 무결하게 해결이 되리라고 저는 장담하는 바입니다. 열 손가락에 장을 짖으라면 그렇게 할 용의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완벽하 게 철거를 대행해주는 대신에 비용이 다소 비싸게 먹힙니다. 그 것이 흠이라면 흠입지요. 시장님께서 그렇게라도 하실 의향이 있 으시다면 제가 당장에라도 연락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주먹에는 주먹으로 맞서자는 것입니다." 박문호가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마구 섞어가며 떠벌였다. "글쎄……, 주먹을 물리치기 위해 주먹을 끌어들인다? 왠지 좀 켕기는군." 시장이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한때는 주먹을 휘둘렀지만 지금은 무성기업의 엄연한 대푭니 다. 건달이 아니라 기업가라는 말씀입죠.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드립니다만 다른 관청에서도 다들 철거 용역업체를 동원합니다. 그렇게 하질 않으면 시간만 질질 끌었지 도무지 해결이 나질 않 는 걸이요. 용역업체를 동원하지 않고 시청에 소속되어 있는 철거반원들만 가지고 해결할 작정이셨다면 시장님이 세상 변화에 너무 어두우 신 겁니다. 물론 전투경찰들의 지원을 받기는 합니다만, 걔네들이 야 어디 자기네 일처럼 나서던가요? 지난 번에 봤던대로 장반장 과 한 철거반원이 칼침을 맞고 쓰러지자, 우리는 모르는 일이외 다, 하고는 뺑소니를 치질 않습디까? 그러니 다 소용이 없습니다. 비용이 다소 비싸게 먹히더라도 용역업체를 데려다가 불법 건축 물을 일거에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지 시장님도 속 시원 하게 발을 뻗고 주무실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박문호의 입가에 어느새 거품이 돋았다. "길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용역업체를 끌어들이도록 하지요. 그렇다고 시청 철거반원들이 손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요." 장반장이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 그 정도라면 후미에서라도 철거 작업을 도울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월급이야 자연 뽕으로 해결이 된다지만 최소한의 자기 책임마저 회피할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현실이 그렇다면 고려해뵬 수도 있겠는데……. 헌데 말이요, 그쪽에서 비용을 얼마나 요구하길래 비싸다고 하는 거예요? 시청 의 철거반원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과 비교해서 한번 얘기해봐 요." "적어도 두세 곱절은 염두에 두셔야 할 걸이요?" 그러면서 박문호는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가락 두 개를 폈다가 곧바로 하나를 더 폈다. 마치 가락동 농수산시장의 경매꾼같은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그 대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걸 장담할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들은 철거 전문가들입니다. 장반장이 말한 해결 사보다도 확실한 꾼들이라고 제가 장담합니다." 박문호가 용역업체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극구 주장하는 데에 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장반장보다도 더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 기 때문이었다. 결단코 무성기업을 돕기 위해 그러는 것만은 아 니었다. "그러다가 불상사라도 일어나면 어쩔 것이오?" 나중에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염두에 둔 시장의 물음이었다. "사실은, 불상사로 인한 사태수습의 비용까지를 감안하여 책정 하기 때문에 비용이 비싸게 먹히는 겁니다. 산본 지역의 대책위 원회에 주먹들이 즐비하니 어쩌면 불상사가 발생하는 건 불가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장님께서도 그 점 또한 감안하여 판단을 내리셔야 할 줄로 압니다만, 다른 관청에서도 철거 중에 더러 불 상사가 발생하는 모양입디다. 허나, 대개는 유야무야 처리되고 넘 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제는 게편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단, 목숨을 빼앗는 불상사만 없다면 말씀입니다." "흐음, 그건 또 그렇겠군." 시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완벽하게 쓸어 버릴 수 있다면야 그것이 뭐 대수겠나. 위에서 옆에서 아래에서 무차별로 압박을 가해오는 통에 나 역시 요즘 죽을 지경이야. 밥맛도 없고 잠자리도 편치가 않아. 제에기, 말이 좋아 시장이지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니까!" 하고 신세한탄조로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문득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철거 용역업체에 위탁하는 것 말고 혹 다른 묘안은 없소?" 하 고 대책회의에 참석한 면면을 주욱 훑어보았다. 모두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대꾸 한 마디 없었다. "뾰족한 방안이 현재로선 없는 실정입니다. 대책위원회 측과 탁 까놓고 협상을 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그쪽에서 야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시청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침묵을 깨고 장반장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지금 당장 연락을 취해서 무성기업의 대표를 면담토 록 합시다." 이윽고 시장이 결단을 내렸다. "아주, 힘겨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박문호가 즉각 알랑방귀를 뀌었다. 그로부터 불과 1시간이 지 난 후 무성기업의 대표 강덕만이 시청으로 들어왔다. 족제비 강덕만은 한때 어둠의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던 건달이 었다. 족제비란 별명은 발놀림이 빠른 데에서 연유한 것인데, 그 가 연마한 무도만 해도 하나로 합치면 예닐곱 단은 넉근히 되었 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장, 합기도장, 실팔기도장 등을 거치면 서 성장한 전형적인 도장파 건달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그가 고향인 철산리로 내려온 것은 세 해 전의 일이었다. 동생 순만이 철산리 철거대책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형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했기 때문이었 다. 강덕만은 자신이 관할하던 지역을 직속 수하에게 일임하고 졸 개 대여섯 명만을 거느린 채 철산리로 내려왔었다. 그리고 동생 과 함께 철거대책위원회에서 새로운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강덕만은 고향 철산리에 머물면서 발톱빠진 사자처럼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철거반과의 끝없는 공방전으로 심신이 고달팠던 것일까. 어쩌면 철거반을 막아야할 명분도 철학도 그에 겐 없기 때문인지 몰랐다. 고향 마을의 주민들과 그곳에 세를 얻 어 살며 겨우겨우 하루를 연명하는 가난한 서민들. 그들을 위해 철거반을 물리쳐야 한다는 명목은 언제나 동생 순만의 몫이었다. 강덕만의 마음 속엔 애당초부터 그런 의식이 싹트지 않고 있었 다. 반면, 철거를 자행하는 관청의 철거반원과 용역업체의 깡패들 은 인해전술로 치고 내려오는 중국군처럼 지칠 줄을 몰랐다. 그 들은 철거 대상물을 향해 찰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철 거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종자들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덕만은 철거를 방어하는 임무보다는 철거를 자행하는 쪽에 훨씬 강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핏줄 속에서 꿈틀꿈틀 용트림하는 파괴 본능 때문인지 혹 모를 일이었다. 그같은 심사를 동생 순만이 간파했더라면 아마도 소스 라쳐 놀랐을 게 틀림없었다. 강덕만은 철거반과의 지지부진한 싸움을 청산하고 서울의 관할 지역으로 되돌아가고픈 유혹에 시달렸다. 닥치는 대로 치고 부수 고 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으면 맞았지, 반대편에서 공격자를 방 어하는 역할은 전혀 그의 구미에 당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강덕만이 철산리를 떠나지 못했던 것은 동생 순만의 청을 차마 물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건달들의 성장기 배경을 들여다보면 대개 행보다 불행 쪽으로 기울어져 있듯이 그들 형제도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를 졸지에 여윈 데에서 비롯되었 다. 아버지는 근무조건이 열악한 조그마한 주물공장의 노동자로 일 했다. 거기서 아버지는 펄펄 끓는 쇳물을 주형(鑄型)에 옮겨붓는 작업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석면으로 된 발싸개와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작업에 임했다. 그러다가 똑같은 일을 수 년째 반복하 여 손아귀에 익자 안전장치가 되려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게다 가 한 여름철에 펄펄 끓는 용광로에서 쇳물을 퍼담아 운반하려면 몸에 붙어있는 것 일체가 성가시게 걸기적거리기 마련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팬티와 런닝구밖에 몸에 걸친 게 없었다고 했다. 사고라는 것이 어느 한 순간에 돌발적으로 발생하듯, "위, 위험해요, 강씨. 아아악……!" 하는 동료의 비명 소리를 끝 으로 아버지는 엎질러진 쇳물에 전신 화상을 입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발길에 무엇이 체였는지, 깜박 엉뚱한 상 념에 사로잡혀 발을 헛디뎠는지, 운반하던 쇳물을 창졸간에 엎지 른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쇳물은 옆에서 일하던 아버지 몸에 불 기름을 퍼부은 꼴이 되었다. 끔찍스런 사고였다. 아버지는 치명상 을 입고 곧장 인근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후 미라처럼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채 아버지는 반년 가까이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누워 지냈다. 겨우 모기 소리만한 숨을 할딱이다가, 이윽고 저승사자를 따라 훌쩍 한 세상을 하직 했다. 직원이 스무 명 남짓한 조그마한 주물공장이었으니, 그 시절만 해도 작업 환경이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승으로 떠나기 이 전에도 아버지는 여러 차례 쇳물똥이 튕겨 화상을 입곤 했었다. 몸 군데군데 담배불로 생살을 짖은 듯 까맣게 살가죽이 타죽은 상처가 있었다. "아버지 살이 왜 그래? 벌레가 파먹었나, 징그러!" 어린 순만이 아버지의 살가죽 상처를 보며 눈살을 찡그리면, "떽이 놈! 느희 삼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하늘이 내려준 훈장이여, 이것이!" 하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껄껄거리며 웃었었 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 해인가, 어머니는 바람처럼 흔적 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여벌로 따라붙은 산 업재해보상금을 노리고 웬 놈팽이가 시적시적 접근해온 모양이었 고, 그 놈팽이와 배를 맞추었는지 끝내는 속살에 바람이 들어 종 적을 감춰버린 것이었다. 여자가 다른 남정네의 주장군 맛을 알 게 되면 새끼들도 눈에 뵈지 않는다는 항간의 속설이 맞는지, 어 머니는 그 후 소식이 일체 돈절했다. 집에는 냉랭하니 찬 바람만 불었다. 그때 강덕만은 일곱 살이 었고, 동생 순만은 겨우 네 살이었다. 강덕만 위로는 아홉 살된 누이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그들 삼남매는 뿔뿔이 흩 어져 아버지의 일가붙이에 얹혀 살게 되었었다. 그 후 누이는 국 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식모살이로 공장의 여공으로 팔려 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간신히 중학교 졸업장 하나 건진 이후 강덕만 은 예정된 수순을 밟기라도 하듯 양아치 세계에 발을 들려놓게 되었었다. 동생 순만은 특이한 기질을 타고났던지 일류 대학은 아니지만 주경야독으로 밤을 패더니 기어코 대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데, 대학에 다니던 때 민주(民主)라는 약밥이 제법 달짝지근하게 가 슴에 와닿았던 모양이었다. 순만은 데모꾼 대열에 자진하여 앞장 섰고, 그 귀한 졸업장도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 도발이 생활로 전전긍긍하더니만, 급기야는 고향 철산리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니까 동생 순만은 이름하여 민주 투사였다. 강덕만은 동생 순만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눈시울이 젖어왔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들여다볼 때처럼 자신이 밟고 지나온 과거 지사가 간동간동 되살아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동생 순만은 너 무도 어린 나이에 부모의 슬하에서 뚝 떨어져나왔기 때문에 아픔 또한 훨씬 심했을 터였다. 돌이켜보건대 서러움과 눈치밥으로 남몰래 흘려버린 눈물의 시 간은 무릇 기하였던가. 한번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어머 니에 대한 얄궂은 그리움과, 각기 떨어져 자라지 않을 수 없었던 피붙이에 대한 애상은 또 얼마나 많은 한숨과 회한으로 가슴에 생채기를 그었던가. 동생 순만은 형이 건달 생활로 한 세상 탕진하는 것을 노상 못 마땅해 했다. 강덕만이 철거반대 투쟁의 패배를 끝으로 백팔십도 방향을 선회했을 때에도 가장 실망한 사람은 역시 동생 순만이었 다. 허나 제아무리 형제지간이라 하더라도 가야할 길이 서로 다 른 것만은 억지로 꿰어 맞출 수가 없는 것이 인생살인가. 두 형 제는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처럼 또다시 흩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강덕만에겐 동생 순만의 삶의 방식이 실속없이 세상을 부유(浮 游)하는 것처럼 보였고, 순만의 눈엔 겨자씨만한 의식도 없이 건 들건들 한 세상 배회하는 듯한 형의 건달 생활이 도무지 납득되 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쪽박을 차지! 분수없이 철장 신세를 지던 가?" 동생 순만에 대한 강덕만의 불만이 그러했고, "쪽박을 차든 철장 안에 갇히든, 사람이라면 한 세상 바르게 살 요량이 있어야지!" 하고 지지않고 되받아치는 것은 동생 순만 이었다. 두 형제는 물과 기름처럼 끝끝내 한데 섞이지를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강덕만은 배창자에 비계덩어리가 낀 족속들에 대 해 이유 없는 반감을 키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화목한 가 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선량한 서민들을 볼 때도 짓밟아 버리고 싶은 욕망에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그래서였을까. 강덕만의 가슴 속에는 눈앞에 비친 세상을 닥치 는 대로 파괴하고픈 충동적이고 사디즘적인 독소가 남모르게 자 라나고 있었다. 자신의 울분을 발산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사악한 감정도 그의 몸에는 향수처럼 진하게 배어 있었다. 철거 용역업 체는 그의 성품과 음양으로 궁합이 맞는 사업이었다. 무성기업의 대표 강덕만이 시장과의 면담을 끝낸 직후 철거작 업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산본 지역에 피바 람이 불어닥칠 조짐은 그리하여 움트기 시작했다. 시청 철거반에선 장반장을 제치고 박문호가 총대를 메게 되었 다. 강덕만을 천거한 장본인인 까닭이었다. 강덕만은 산본 지역의 철거대책위원회 일꾼들이 대부분 건달들이며 지역의 일부 청년회 원들이 합세하고 있다는 정보를, 박문호로부터 사전에 전해들었 다. "대책위원회 사무실만 쓸어 버리면 그 다음은 추풍낙엽입니다. 그러니 1차 철거 목표물인 그곳을 강사장이 책임지고 맡아주십시 요. 시청의 철거반원들은 그때를 기하여 다른 불법 건축물을 치 겠습니다." 박문호가 제시한 철거 전술이었다. 강덕만은 박문호의 전술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철산리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 한 사실이기도 했다. 모름지기 전장에서는 적장의 목만 베면 나머지 군사들은 순식 간에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철거 작업이라고 해 서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목표물을 무지막지 하게 공격하여 굴복을 받게 되면 나머지는 제풀에 항복을 선언하 게 되어 있었다. 이윽고 강덕만과 박문호가 선두에 서서 철거반 출동 명령을 내 렸다. 세 대의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무성기업의 철거 전문가 30 명과 시청의 철거반원 30여명이 쇠파이프, 해머, 곡괭이 따위를 어깨에 둘러메고 산본과 금정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기 위해 출정했다. 자존심 때문인지 강덕만은 1 차 출정 때 전투경찰을 대동하지는 않았다. 채 30분이 경과하지 않아 철거반원들이 우르르 목표 지점에 도 착했다. 무자비하고도 잔인하게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쳐부술 수 도 있었을 터인데 웬일인지 강덕만은 공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산본을 장악하고 있는 대책위원회 건달들이 어디서 굴러먹던 떨 거지인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었다. 한편, 대책위원회 측에서도 시청의 철거반에서 전문 용역업체 를 끌어들여 조만간에 침공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다. 하여 조직원을 대폭 강화하여 결전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해두 고 있었다. 중간 보스급으로 두 명이 새로 영입되었고 조직원만 해도 오륙 십을 헤아릴 정도였다. 새로 영입한 중간 보스는 번개와 넙치였 다. 만두와 꾀보가 각자 한 사람씩 천거하여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다. 번개와 넙치는 각각 십수 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와 서 산본파에 합류했다. 불과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어느 한 놈이라도 먼저 사무실 처마끝에 붙어있는 거미줄 하나 건드리기 만 해도 칼부림이 벌어져 피를 튀길 판이었다. 사장은 만두와 꾀보와 망치로 하여금 산본 지역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언제라도 출동 가능한 지역에 거점을 확보해주 고, 번개와 넙치를 24시간 대기토록 특별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 다. "어떤 놈들인지 쌍판데기부터 구경을 해야겠어!" 혼잣소리를 씹어뱉은 후 강덕만이 날랜 수하 네댓 명을 거느리 고 대책위원회 사무실 문짝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뚜벅뚜 벅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신호로 밖에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철거반원들이 연장을 꼰아든 채 대책위원회 사무실 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 대책위원회 사무실 안에서 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열 댓 명의 사내들은 그러나 묵묵히 자기 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 었다. 거칠게 사무실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강덕만이 오히려 머 쓱할 지경이었다. 만두가 앞으로 나서며 강덕만을 정중하게 맞아 들였다. 귀한 손님을 대하듯 그렇게 깍듯한 태도일 수가 없었다. 순간 강덕만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직감했다. '놈들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군.' 속으로 뇌까리며 강덕만은 만두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 궁둥이 를 앉혔다. 졸개들이 우르르 강덕만의 후미에서 방호벽을 둘러쳤 다. "대체, 무슨 용무로 우리 사무실을 찾아오셨습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만두가 새삼스레 물었다. 어디까지나 정 중하게 예를 갖춘 언행이었다. 물론 사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대로 행동할 뿐이었지만. "대책위원회 회장이 누구야?" 강덕만이 가로 길게 찢어진 눈꼬리를 관자놀이께로 밀어올리며 낮게 소리쳤다. 우선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회장님은 저쪽 방에 계십니다. 누구 찾아오셨다고 말씀드릴까 요?" 만두가 침착하게 사장이 있는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강덕만이 눈길을 돌려 '회장실'이라고 한글로 새겨진 아크릴 판을 노려보았 다. "불법 건축물을 전문적으로 철거하는 무성기업의 대표 강덕만 이다. 회장의 쌍판데기를 보러왔으니 이리 좀 나오라고 그래!" 강덕만은 건달 출신답게 입성이 사뭇 거칠었다. 낯바닥도 꽹과 리처럼 투박해 보였다. 강덕만이 지갑 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더니 만두 쪽으로 휙 내던졌다. 무슨 말귀인지 접수했으면 알아 서 기라는 수작이었다. 만두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명함 을 집어들고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습니다, 나를 따라 오시지요. 그렇잖아도 저희 형님이 안에 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덕만이 말없이 만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책위원회 사무실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살벌한 정적에 휩싸였다. 강덕만이 걸음을 떼어놓자 졸개들이 바싹 그 뒤에 따라붙었다. 만두가 똑 똑 손기척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사장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신문 쪼가리를 뒤적이고 있다가 강덕만이 들 어서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만두가 강덕만을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강덕만이 자리에 앉고 그의 졸개들이 기립자세로 후미에 둘러섰다. 사장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강덕만의 맞은편 자리로 다가가 착석했다. 마지막으로 만두가 사장의 옆자리에 마악 궁둥일 붙이려 했을 때였다. "아니, 독사 형……?" 강덕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동시에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이런, 난 또 누구라고?" 사장도 어이가 없는지 시죽시죽 웃었다. "앉아라! 족제비……, 네가 여긴 웬일이냐?" 강덕만이 엉거주춤 자리에 다시 주질러앉으며, "세상 참 넓고도 좁네. 형이 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줄은 꿈에 도 몰랐소. 클럽은 어떻게 하고 여기 내려와 있수?"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반갑다, 악수나 하자." 사장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족제비, 너야 말로 여긴 어쩐 일이니?" "시청 철거반에 박문호라고 아는 녀석이 있는데……, 얼마 전 에 연락을 했습디다. 산본에 골치 아픈 놈들이 들어앉아 철거반 이 쪽을 못쓰고 있다면서, 나보고 와서 도와달라고 그러데. 나는 요즘 무성기업이라고 철거 전문 용역업체를 차렸거든……, 나 원 모처럼만에 몸 좀 풀려고 나왔는데 독사 형이 여기 떡 버티고 있 는 줄 누가 알았겠수? 아무튼 이제 우리는 굶어죽게 생겼수다." 강덕만이 진담반 농담반으로 궁시렁댔다. "건달이, 할 일이 없어 철거 용역업체를 하니? 왕년의 족제비 가 사람 실망시키는 방법도 희안쿠나, 츠츳!" 사장이 마뜩찮다는 듯 혀를 찼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렇게 됐수다. 조만간에 청산하고 다시 지역으로 복귀할 생각도 없지 않지만, 이 짓도 그럭저럭 손맛이 있어 할 만해. 한데, 족제비는 이런 지경이 되었다지만 독사 형은 정말 여기 웬일이우?" "조직을 좀 키워볼까 하고 고심하던 중이었는데, 자네도 알아 시피 클럽 하나 운영해 가지고 어디 애들 여럿 데리고 있겠니? 마침 물 좋은 지역이 나왔다기에 움직여봤다. 여기에 있는 만두 가 비밀리에 사업을 벌이고, 나는 그저 논다니에 먹구 대학생으 로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안면을 텄으 니 서로 인사나 나누지 그래?" 사장이 강덕만과 만두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 나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강덕만이 뒤쪽에 둘러서 있 는 졸개들을 사장과 만두에게 인사시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졸개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 "그래, 한 몫 크게 챙겼수?" 강덕만이 화제를 돌렸다. "한 몫 챙겼더라도 족제비 나눠 줄 몫은 없다." "앗다, 독사 형이 사람 괄시하네." "괄시하는 게 아니라, 여기 정착한지 이제 겨우 두어 달 남짓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사업을 슬슬 벌이고 있는 중이야." "그나저나, 대책위원회 건물을 쑥대밭으로 만들 작정을 하고 벼르고 왔는데, 독사 형이 떡 버티고 앉았으니 이거 참 야단났네. 이 일을 어쩌면 좋수?" 강덕만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이 강덕만을 알게 된 것은 5년쯤 전의 일이었다. 건달 생 활이란 게 뻔해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우두머리끼리는 더러 내 왕을 하며 안면을 터놓고 지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세상에 알 려진 것처럼 조직폭력배 간의 세력다툼 어쩌구 하며 걸핏하면 전 쟁이나 치르는 건 아니었다. 과부 속사정 과부가 알아주고, 문둥 이 속사정 문둥이가 알아주고, 도적놈 속사정 도적놈이 알아주고, 정치꾼 속사정 정치꾼이 알아준다고, 건달의 속사정 건달이 알아 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러나 정치꾼처럼 더러운 위선의 냄새를 풍기지도 않거니와, 도적놈처럼 좁상스레 굴지도 않으며, 문둥이처럼 숨어 지내는 인 간세 기피증 환자도 아니고, 과부처럼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는 성미도 못되는 게 또한 건달이었다. 그들 세계 특유의 의리와 배 짱으로 한 세상 밀고 나가는 건달들. 족제비 강덕만은 독사인 사장보다 훨씬 먼저 건달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지역이 다를 뿐아니라, 사장 쪽이 나이가 두 세 살 위고, 조직도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형 대접을 받게 되 었었다. 직계 조직이 아니므로 '형님'이란 극존칭을 사용하지 않 을 뿐이었다. "그건, 족제비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처신해라. 사무실을 박살 을 내던 우리 애들 골통에 구멍을 내던……." "앗다, 시방 그런 농담할 상황이 아니우. 난 이미 선불까지 받 아 챙겼으니 어쩌겠수? 차마 독사 형이 있는 곳을 건드릴 순 없 고, 그럴 경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독사 형도 아니겠고……. 그러니 눈치 봐가면서 불법 건축물이나 몇 채 박살내고 떠나겠수 다." "좋도록 해.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따가 시내에서 만 나자구. 술 한잔 해야지. 그 동안 살아온 얘기도 좀 나누고." "그건 나중에 합시다. 내가 애들 보내서 연락을 취하지. 오늘은 중요한 선약이 있어 그러우." "이 짓거린 언제까지 할 작정이니?" "아까 독사 형을 보는 순간, 불쑥 이 짓거리도 그만 때려쳐야 겠단 생각이 듭디다. 탁탁 털어버리고 지역구로 돌아갈까 봐." 그 말을 남기고 족제비는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나갔고 곧바로 졸개들을 철수시켰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강사장님? 여기가 녀석들의 본거진데 그냥 철수하시면 곤란합니다, 이거." 시청 철거반의 박문호가 강덕만의 뒤를 졸졸 따라붙으며 징징 거렸다. "일 없어, 정 답답하면 당신이 직접 지휘하여 철거를 하던지!" 강덕만이 신경질을 부리며 박문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 고 졸개들을 멀찍이 철수시키면서 비닐하우스 가건물 두 동을 박 살내고는 온다간다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강덕만은 다시 산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시청 철거반 측에선 착수금만 떼어먹힌 꼴이었다. 족제비의 출몰 이후 대책위원회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무성기업마저 손을 털고 물러서자 시청 철거반 측은 좌불안석 이었다. 대책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는 건달 두목이 예사로운 인물 이 아니라는 추측을 해볼 뿐 이렇다할 묘책은 떠오르지 않고 있 었다. 진퇴유곡이 따로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하는 수 없습니다. 대책위원회 측 과 신사협정이라도 맺는 수밖에요." 장반장의 주장이 공연한 투덜거림으로 들리지 않았다. 장반장 의 주장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장도 결국엔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그리하여 시청 측과의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대책위원회 에선 사장과 청년회장 김성만이 대표로 참석했고, 시청 측에선 시장과 철거반의 장반장이 대표로 나왔다. 그밖에도 그 지역을 관할하는 경찰서장과 주택공사 측의 사업장이 한 자리씩 차지하 고 앉았다. 수 차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합의한 사항은 이랬다. 첫째, 함께 팀을 구성하여 자체 호구조사를 실시한다. 현재까지 불법 건축물에 입주하여 살고 있는 가구는 산본 주민으로 인정하 되, 추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불법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을 적극 막는다. 또한, 새로운 입주자가 산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공동 대처한다. 둘째, 불법 건축물 축조를 막고 외지인 입주자의 접근을 엄단 하기 위해 대책위원회 측과 시청의 철거반 측이 합동으로 야경을 돈다. 셋째,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대책위원회 를 임의 단체로 인정한다. 대책위원회 측은 그에 따른 책임을 지 고 더 이상 불법행위가 자행되지 않도록 그 근절에 적극 앞장선 다. 지역 치안에도 만전을 기한다. 넷째, 대책위원회의 불법 행위 근절 및 치안 활동에 따른 지원 금은 시청과 주택공사 측에서 합의하여 부담토록 한다. 다섯째, 만약 대책위원회 측이 앞장서 불법행위를 자행할 시엔 즉각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고소 고발 조치한다. 이상. 합의 사항을 정서한 문서 밑에 시장, 경찰서장, 주택공사 사업 장, 그리고 사장이 각각 서명 날인하고 한 부씩 나누어 보관키로 했다. 그로 인해 대책위원회가 산본에 뿌리내릴 수 있는 확고한 지반이 마련되었다. 그렇게 되자 조직의 확대 정비가 불가피했다. 사장은 긴급 수혈을 위해 분주히 서울을 들락거렸다. 그 결과 보스인 사장 밑에 다섯 명의 중간 보스가 포진하고, 그 밑에 백 여 명에 이르는 졸개들이 배치되었다. 중간 보스 한 명당 20여 명의 졸개들이 배속된 셈이었다. 한때 사장의 보디가드였던 망치 도 중간 보스급의 막내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건달 세계의 졸개들이란 자금줄이 확실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 정해주는 곳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속성이 있었다. 한번 해병 은 영원한 해병이다, 와 같은 구호는 건달 세계에선 저 60년대의 신상사파 이후로 그 빛깔이 바래어진지 오래였다. 필요에 따라 해병이 되었다가 공수부대원이 되었다가 심지어는 공병대원이 되 기도 하는 것이 건달 세계의 작금의 추세였다. 하여 긴급 수혈을 하는데 별반 어려움은 없었다. 졸개들의 이합집산을 굳이 빗대어 말하자면 정치판의 헤쳐모여 식 조직개편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서처럼 따블백 하나 싸 짊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전출을 가는 것처럼 그 절차는 간단명료했다. 하지만 정치판의 이합집산이 공천을 위시하여 눈앞의 자기 이 익 또는 개인적 전망 따위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건 달 세계에선 오로지 조직의 필요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 고 일단 자리를 옮기면 의리와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면에서 건달은 개인주의에 바탕한 개별적 이익보다는 조직의 운 명에 기꺼이 한 몸 내던지는 조직주의를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 법이었다. 이해타산에 따라 하루아침에 조직을 배반하는 행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망치가 중간 보스로 격상되면서 사장은 졸개 중에서 눈 치빠른 녀석 하나를 전속 보좌관으로 앉혔다. 군대식으로 치자면 일종의 따가리인 셈이었다. 그 무렵엔 거의 산본에 정착해 있었 으므로 망치와 같은 건달 보디가드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이 픽업된 사장의 보좌관은 클럽의 연예부에서 똘마니로 커온 허담이란 녀석이었다. '게슴츠레'를 '게츰스레'로 '레파토리' 를 '레토파리'로 멋대로 말을 바꿔치기하던 바로 그 종작없는 녀 석이었다. 게다가 이빨을 까대는 실력이 녹녹찮아서 허담이란 이 름보다는 '이빨'로 명성이 더 자자한 녀석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여간 싹싹하고 똘똘하지 않아서 입 속의 혀처럼 사장의 일거수일 투족을 잘 보좌했다. 조직의 재정비가 이루어지자 대책위원회는 평온한 일상을 맞이 하는 듯싶었다. 왁자한 사건이나 불상사 없이 반 년 가까운 세월 이 흘러갔다. 이른 봄에 산본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어느새 늦은 가을로 성큼 계절이 바뀌어져 있었다. 7. 모반 그 즈음 사장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조직이 비대해지자 직접 관리하고 통솔하는데 부담감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조직의 2인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다다 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중간 보스 중에서 2인자로 발탁하자니 도토리 키재기 처럼 고만고만해서 적격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그럴 경 우 2인자로 올라선 녀석과 거기에서 탈락한 녀석들 사이에 보이 지 않는 이상기류가 형성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사장이 불쑥 클럽을 찾아가 총지배인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클럽은 총지배인 쌍칼의 지휘 아래 나날이 번창 하고 있었다. 조직도 새롭게 정비되어 클럽을 운영하는데 있어 문제거리는 별로 없는 듯했다. 그런 면에서 클럽 역시 내실을 다 져간다고 볼 수 있었다. 상무인 남욱과 맴버인 감초 그리고 연예부장 단검이 차례로 찾 아와 인사하고 나간 후 사장은 총지배인과 조용히 머리를 맞대었 다.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형님?" 쌍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불나비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가끔 연락하고 그러니?" 사장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로 안부 전화야 가끔 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불나비는 무슨 일로요……?" 쌍칼이 넌지시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최근에 직접 만난 적은 없니?" 사장은 오로지 불나비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투였다. "한 달쯤 전이던가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왔다면서 클럽 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그 다음 날 곧장 목 포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불나비가 서울로 진 출할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습디다." "서울로 진출한다고? 어디 마땅한 지역이라도 물색해 둔 모양 이지?" 사장의 표정이 다소 경직되는 듯했다. "아직, 확실하게 터를 다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좁은 바닥에 오래 머물다보니 답답증을 느끼게 된 모양입디다. 하긴 촌구석에만 머물러 있기엔 아까운 인물이지요. 모르긴 해도 조만간 서울에 피바람이 한 차례 불어닥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불나비가 마음을 굳혔다면 말입니다." "불나비를, 내가 데려다 쓰고 싶은데……?" 사장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쌍칼이 신속히 불을 대령하며, "형님이 불나비를요?" 하고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에서 선뜻 응해줄지 모르겠어. 자네 생각은 어때?" 사장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형님이 부른다면 마다하진 않을 걸요. 제가 연락을 취해 볼까 요?" "사실은, 그래주었으면 해서 자네를 찾았어. 클럽에서 일하는 애들 얼굴 본지도 오래 됐고, 겸사겸사……." "얼마 전 만두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들도 백여 명으로 불 어나고 조직이 새롭게 틀을 갖추었다고 그러데요. 한데, 형님 생 각에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지요?" "쌍칼 자네 생각이 자꾸 간절해." "그건 왜요?" "조직은 키워놓긴 했는데 직접 모든 걸 관리하고 통제하자니 번거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중간 보스만도 다섯인데 일일 이 잔신경을 쓰자니 시간도 빡빡하고. 자네같은 조직의 2인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그 말야." "그러니까, 불나비를 불러 올려 2인자로 심을 작정이군요?" "내 마음이 그래." "형님 결정이니 드러내 놓고 불만을 토로하진 않겠지만, 중간 보스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은 걱정이 되는데요, 형님?" "무슨 걱정?" 사장이 싸늘한 눈빛으로 쌍칼을 응시했다. "다른 게 아니고, 불나비가 애들을 아주 거칠게 다루거든요." "그렇담 오히려 잘 됐군. 바로 그런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시 점이야. 조직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을! 내가 좀 보잔다고 불나 비에게 연락을 취해 봐." 이미 결심한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굳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제가 곧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한데, 불나비 가 현재 거느리고 있는 조직도 만만찮을 텐데, 거기 졸개들은 어 떻게 처리하고 올라오라 이를까요?" 쌍칼은 역시 생각이 치밀한 데가 있었다. "조직을 와해하면서까지 올라오진 않을 테지. 그건 불나비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다만, 내 생각엔 그곳은 후계자에게 물려 주고 쓸 만한 녀석으로 몇 명만 데리고 올라와도 충분하리라고 봐." "불나비의 수하에 있는 조직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산본의 중 간 보스들을 통솔할 2인자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얘기로군요?" "그런 셈이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수일 내로 불나비를 데리고 산본으로 직 접 내려가 뵙겠습니다. 한번 내려간다 내려간다 하면서도 클럽 일에 얽매어 찾아 뵙지를 못했잖습니까? 이참에 소원도 풀겸 ……" 하는데 사장이 말허리를 잘랐다. "어떤 조건을 내세우더라도 다 받아 들이겠다고 전해." "시시콜콜 조건을 내세울 친구는 아닙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아예 거절을 하겠지요. 암튼 제가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좋아, 자네만 믿고 난 산본으로 그만 내려가야겠어." "네, 형님 뜻대로 잘 풀릴 겁니다. 그럼 며칠 후 산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사장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곧 산본으로 내려갔다. 남욱, 감초, 단도 등이 길을 막아서며 하루쯤 쉬어가라며 만류 했으나, 클럽에 남아 굳이 시간을 죽일 필요가 없다며 그대로 내 려갔다. 그로부터 사흘 후 총지배인이 불나비를 데리고 산본으로 내려 왔다. 불나비는 관할하던 지역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심복 세 명만을 데리고 상경했다. 쌍칼과 이미 충분한 사전 조율이 이루어진 모 양이었다. 불나비는 산본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조직의 2인자 자리에 앉았다. 중간 보스들과 사장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이 그에게 주어 진 임무였다. 누구 한 사람 불나비의 영입 건에 대해 반대 의견 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조직에서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면 오직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산본 조직은 이제 나무랄 데가 없었 다. 불나비는 2인자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순식간에 조직 을 장악해 나갔다. 사장은 매우 흡족했다. 쌍칼의 지적대로 한 가 지 단점이 있다면 성깔이 불같고 매우 까탈스럽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불나비의 언행은 탱자나무 울타리처럼 빈틈이 없었다. 중 간 보스고 졸개고 간에 불나비의 눈 밖에 비쳤다간 그 즉시에서 인정사정없는 질책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나비의 조직 운영 방식은 철저한 스파르타식이었다. 그러나 비가 온 뒤에라야 더 굳어질 땅인지, 아니면 진흙탕이 되어버릴 땅인지 분별할 수 있는 법이었다. 불나비가 산본으로 들어오고 달포쯤 지났을 때였다. 처음으로 산본파 조직 내에 불 상사가 발생했다. 일의 사단은 이랬다. "형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만두와 꾀보가 사장의 집무실로 들어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느희들, 뭔 일이 있니?" 처음에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웬만하면 밖으로 나갔으면 합니다. 저희가 긴히 상의드릴 말 씀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형님과 술도 한잔 나누고 싶구요." "싱거운 녀석들, 술이 마시고픈 모양이구나?" 사장은 만두와 꾀보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가 싶었다. 만두와 꾀보는 언제 생각하더라도 마음 든든한 조직의 일꾼이었다. 그러니 그 만한 제안을 받고 다른 느 낌을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만두와 꾀보 의 표정이 전에 없이 다소 상기되어 있기는 했다. "꼭 술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다, 형님. 답답하실 텐데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저희가 조용한 자리를 이미 잡아놨습니다." "그래, 할 이야기가 있다니 우선 밖으로 나가자." 사장은 만두와 꾀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문득 중간 보스들 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치, 번개, 넙치가 사무실 밖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 다가 사장이 나오자 허리를 꺾으며 인사했다. 자리에 동석하기로 즈이들끼리 이미 약조가 된 모양이었다. 허담에게 차를 몰게 하고 사장은 중간 보스들을 따라 시내로 나갔다. 네 대의 승용차가 멈춘 곳은 시 외곽지역에 자리잡은 조 용한 장급 여관이었다. 이미 방을 예약해 놓았는지 사장이 차에 서 내리자, "형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하고는 만두와 꾀보가 앞장섰다. "꼭 이런 한적한 곳까지 와서 마셔야 술맛이 나니?" 사장이 농담조로 내뱉고는 곧 두 사람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 다. 나머지 중간 보스들과 허담이 그 뒤를 따랐다. 사장은 곧 구 석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깨끗하고 조용했으나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술상을 미리 보아놓은 것 같은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장이 자리에 앉자, 다섯 명의 중간 보스들이 좌우로 열을 지어 앉았다. 허담은 방문께에 쭈그리고 앉았다. "참, 불나비도 함께 올 걸 그랬지?" 사장이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했다. 그리고 왠지 분위기가 무 겁게 가라앉아 있다고 불현듯이 생각했다. "불나비 형은 일부러 제외시켰습니다." 꾀보의 대답이었는데 좀 의외였다. "그건, 왜?" 하고 사장이 물었다. "형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선 저희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십시요." 만두가 중간 보스들을 대표해서 묵직하니 입을 열었다. 사장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간파하고 일순 긴장했다. "형님이 목포에서 불나비 형을 불러 올린 의도를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당한 처사라고 판단되어 아 무런 이의도 달지 않았습니다. 한데, 형님도 대충은 분위기를 살 펴 아시겠지만, 저희들은 불나비 형의 처신에 몇 가지 불만을 갖 고 있습니다." "뭐라구, 불만을 갖고 있어?" 사장의 낯색이 흑빛으로 돌변했다. 기분도 휴지조각처럼 구겨 졌다. "저희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신 연후에 나무라주십시요, 형 님." 만두가 한 차례 심호흡으로 긴장을 푼 뒤 또박또박 말했다. '저 희'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중간 보스들끼리는 이미 의견 통일 이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사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만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첫째, 불나비 형의 조직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 다. 형님은 물론 클럽 시절의 쌍칼 형도 그렇진 않았습니다. 불나 비 형은 저희들의 의견을 일체 무시할 뿐아니라 지나치게 독선적 입니다. 둘째, 저희들은 스무 명 남짓한 졸개들을 거느리고 있는 명색 이 조직의 중간 보스들입니다. 한데도, 불나비 형은 조금만 수틀 려도 졸개들이 보는 앞에서 예사로 쪼인타를 까고 뺨따귀를 때립 니다. 정말이지 망신스러워서 졸개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저희들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조용히 불러 타이른다 거나, 설령 매질을 가하더라도, 졸개들이 보는 앞에서는 자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셋째, 이건 뭐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만, 개인의 프라이 버시를 인정해 주려하지 않습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오로지 조직을 위해 살고 조직을 위해 죽기로 각오가 된 놈들입 니다. 하지만 하루 24시간 조직을 위해서만 살 수는 없잖겠습니 까. 개인의 사생활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나비 형은 불시에 집합 명령을 내릴 뿐아니라 그 횟수 가 사뭇 빈번합니다. 물론 조직에 사활이 걸린 긴급 사안이라면 마누라와 맷돌을 갈 다가도 중간에서 멈추고 달려와야 옳다고 믿습니다. 또 긴급 사 안이라면 저희 중간 보스들도 사전에 어느 정도는 감지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불나비 형은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일인 데도 불구 하고 조금만 집합 시간에 늦으면 불호령을 내립니다. 꾀보는 지 난 번의 그 과부와 놀다가 30분쯤 늦게 도착했다고 졸개들이 보 는 앞에서 사정없이 얻어맞아 코피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비참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상, 저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점을 형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게야?" 사장이 벌컥 언성을 높이며 목자를 부라렸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 주십시요, 형님. 불나비 형입니까? 아니 면 저희들입니까? 저희들은 불나비 형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꾀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뭐야?" 사장이 더이상 참지를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중간 보스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 다. 사장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중간 보스들의 뺨 따귀를 철썩철썩 후려쳤다. 그 정도로는 그러나 직성이 풀리지 않는지 이번에는 발길을 날렸다. 사장의 번개같이 빠른 발길질에 다섯 명의 중간 보스들이 가슴팍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전쟁에 임할 때 못지 않은 신출귀몰하는 발놀림이었다. 하기는 요즘도 거의 매일같이 몸을 단련하고 있으니, 사장의 솜씨가 녹 슬었을 리 만무했다. 중간 보스급 서넛이 한꺼번에 덤벼들더라도 감당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장의 실력은 출중했다. "느희 놈들이 감히 조직에 반기를 들어? 조직에 반기를 든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알만한 놈들이……!" 사장이 온몸을 파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다섯 명의 중간 보스 들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머리를 조아렸다. 보스를 설득하는데 실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 대가를 치르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날 린치하려고 이리로 데려왔니? 느희 놈들이 잘 알듯이 내가 비록 마누라는 버렸어도 단 한 순간 조직을 내 마음 속에서 지워버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데리고 있는 동 생들을 한 놈도 소홀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이다. 그런데 느희 놈들이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어……? 세상 살고 싶지 도 않다. 꼴도 보기 싫으니 모두들 꺼져!" "죄송합니다, 형님!" 만두가 대표로 말하고 고개를 다시 꺾었다. "형님이 그토록 화를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들은 다만 그 동안의 불편부당했던 상황을 말씀드리고 선처를 바랐을 뿐입니 다. 용서해 주십시요, 저희들이 형님을 버리고 어찌 감히 조직을 떠나겠습니까?" 보디가드였던 망치가 굵은 눈물 방울을 방바닥에 뚝뚝 떨구었 다. "모름지기 건달이란 완력만을 내세워 조직을 이끌어가선 안된 다고 생각합니다, 형님. 그렇다고 꼭 권모술수에 능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때로는 외유내강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 안에 따라선 중간 보스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줄도 알아 야 하구요. 불나비 형은 그런 면에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형님." 새로 영입해온 번개의 주장이었다. 제법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건달 세계에서 논리를 앞세우는 걸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성미였다. 그렇다고 사장 자신이 비논리를 신봉하는 것도 아니었 다. 사장이 말했다. "아니다. 건달에겐 의리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들 은 부수적인 부스러기일 뿐이야. 의리와 복종이 흔들리는 조직이 란 모래탑과도 같다. 언제 와해될지 모른다는 말이다. 왜냐, 의리 와 복종이야말로 조직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기 때문이다. 의리와 복종이 제 기능을 상실한 조직에는 배신, 질투, 시기 따위가 창궐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양아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너희 놈들은 지금 개인적인 감정과 사사로운 울분을 앞세워 의리와 복 종이란 조직의 근본을 모두 어겼다! 더이상 지껄이지 말아라. 결 자해지라 했으니, 조직의 기강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너희 놈들 이 떠나라. 이제 다 소용없다." 사장은 처음의 흥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형님, 한번만 더 생각해주십시요. 저희들이 여북했으면 형님을 이런 곳으로 모셔와 하소연을 하겠습니까?" 만두가 선처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만, 듣기 싫다는 데두!" 사장이 만두의 입을 봉쇄한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불나비를 끌어올린 것은 조직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지,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 결단한 조치가 아니었다. 불나비가 다소 거칠게 너희들을 다루었음은 나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 그 정도를 못참아내고 또 그 정도의 문제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감히 날 불러다 앉혀놓고 이 따위 짓거리나 벌이자고 공론했단 말이냐? 어느 조직에서 배 워먹은 수작이니? 이게 대체 씨알머리나 먹힐 법한 소리냐? 두번 생각할 것도 없다. 너희들의 행동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 물론 사전에 불나비를 불러다가 행동을 자제하라고 당부하지 못한 내게도 전혀 불찰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 허나 불나비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설마하니 조직의 2인자로서 사감이 있어 너희들을 거칠게 몰아붙였겠니? 더이상 긴 말한다는 게 내게는 치욕이다. 불만이 있으면 조직을 떠나라!" "형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언감생심 저희들이 형 님을 린치하려 했다든가, 배반을 모의했다든가 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저희 마음을 형님이 더 잘 알고 있잖습니까? 그만 노여움을 거두십시요." 만두가 다시 한번 호소했다. "사내 녀석이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사장이 소리쳤다. 그러고는 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허담을 향해, "담이는 나가서 차 대기시켜!" 하고 차갑게 명령했다. "네, 형님!" 허담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그만 간다. 느희 놈들을 작신작신 밟아 버리고 싶은 심 정이다만 참고 그냥 간다. 다시는,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 말아 라!" 그 말을 남기고 사장은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산본파의 앞날을 위해 계획한 청사진이 엉뚱한 장벽에 부딪쳐 와르르 무너 져내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사장은 그러나 그같은 마음을 밖 으로 내비칠 수가 없었다. 다섯 명이 중간 보스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더는 보태지 못했다.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돌아오니 불나비가 좌불안석으로 대기하 고 있다가, "형님, 어디 다녀오는 길입니까? 종적을 몰라 한참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며 사장의 안색을 살폈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 잠시 나 좀 보자." 사장이 말하고 먼저 집무실로 들어갔다. 불나비가 사장의 뒤를 따라 들어가 직립한 자세로 대기했다. 사장은 소파에 온몸을 파 묻듯이 하고는 한동안 침묵했다. 불나비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맞은켠에 잠자코 서서 바위처럼 무겁게 내리누르는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불나비!" 사장이 고개를 쳐들고 가만히 불나비를 응시했다. "네, 형님. 말씀하십시요." "애들을……, 좀 유두리있게 다루어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불나비가 우락부락한 두 눈을 꿈적거렸다. "창피스럽고 낯뜨거워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가 그렇다만……" 사장이 말끝을 흐리며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뭐든지 말씀해주십시요, 형님." 불나비가 라이터불을 대령했다. 사장이 휴우 하고 담배 연기에 한숨이 실어 내뱉으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차분차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사장은 그러나 중간중간에 입놀림을 멈추곤 했는데, 그것은 심 사가 그만큼 편치 않음을 대변해 주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불나 비는 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시각각으로 주위 상황에 따라 몸의 색깔이 변화는 파충류처럼 불그락 푸르락 표정이 바뀌었다. "제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로 심려를 끼쳐드 리지 않겠습니다. 모든 게 제 실수입니다. 용서해주십시요, 형님." 불나비는 어디까지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 면 중간 보스들을 다 때려죽인다고 펄쩍펄쩍 뛰었겠으나, 그런 경거망동을 사전에 봉쇄할 정도로 사장의 침통한 표정은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 사장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내뱉은 말만으로도 충분 히 고통스러웠고 또 아득했다. 사장은 진심으로 마음이 괴로웠다. "애들이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전혀 상상을 못했습니다. 조직 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고 거칠게 닦달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으니……, 책임을 통감하고 제가 물러나는 게 도리하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불나비 역시 벌레 먹은 밤을 씹은 기분이었다. "그런 나약한 소리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니?" 사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오늘의 얽힌 실타래는 앞으로 시간 을 갖고 차근차근 풀어 나가도록 하고……." 족제비 강덕만이 다녀간 직후 상황이 호전되자 사장은 거처를 서울에서 산본으로 완전히 옮겼다. 그러니까 사장이 집에 가서 좀 쉰다는 것은 서울집으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대책위 원회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터에 스무 평 남짓한 가건물 을 들였던 것이다. 매일같이 서울을 들락거린다는 것도 번거로웠 고, 집무실에서 불편한 잠을 잔다는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형님께는, 정말이지 일이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속으로 울분을 삭히는지 불나비의 목청이 조금 떨렸다. 사장은 불나비를 등지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허담이 줄레줄레 사장 의 뒤를 쫓았다. 집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사장은 불현듯 걸음 을 멈추었다. 그때 돼지막의 모주영감이 떠오른 것은 무슨 까닭 일까. 돼지막이 있는 언덕배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파에 지 친 사람처럼 사장은 느적느적 걷기 시작했다. "형님, 갑자기 어딜 가시려구요?" 허담이 쫄쫄거리며 다가와 물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라." 그러고는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가는 길에 사장은 허담에게 술 과 안주를 사가지고 돼지막으로 오라 이르고 먼저 언덕배기로 올 라갔다. 모주영감은 반갑지도 그렇다고 귀찮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장을 맞아들였다. 사장은 아무 말없이 모주영감과 마주앉아 권커니 잣 거니 술잔을 뒤집었다. 모주영감 역시 도통 말이 없었다. 사장의 안색에서 이미 마음 속 상처까지 간파하고, 무언으로 응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휘저어 놓은 흙탕물이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앙금이 가라 앉아 말끔한 모습을 되찾듯이 사장은 점차로 마음이 안정을 되찾 았다. 모주영감은 평소 꼬장꼬장한 성품이었다. 그러면서도 상대 의 마음을 그윽하게 감싸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 날 사장은 밤이 이슥토록 모주영감과 더불어 술을 벗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다. 사장은 낮에 있었 던 일을 잊고 모처럼만에 숙면을 취했다. 건달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얼마만에 맞는 숙면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편 불나비는 그 날 밤 전전반측하며 잠을 못이뤘다. 자신의 지나친 처사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을 제쳐놓고 납치하듯 보스를 데려간 중간 보스들의 행태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여럿이 공모하여 보스를 조용한 곳으로 유인했다는 것은 조직 내에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것은 배반을 의미하는 동시에 조직에 반기를 치켜 든 쿠데타에 다름아니었다. 불나비는 격분을 삼키느라 파들파들 몸을 떨면서 그 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불나비는 졸개들을 풀어 다섯 명의 중간 보스를 불러오라 명령했다. 장소는 시 외곽 지역에 자리잡은 조용한 숲 지대였다. 사장에게는 아무런 사전 통보도 하지 않았다. 불나비는 어떤 형태로든 어제의 일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성 질의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누가 뭐라든 어제의 불미한 사태가 가능하게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분명 불나비 자신이었다. 따라 서 자신이 사태를 수습함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윽고 불나비 앞에 다섯 명의 중간 보스가 일렬횡대로 집결했 다. "너희들이, 어제 형님에게 보인 행동은 조직적 반발이다. 너희 들의 행동을 지금의 나로선 도대체 납득할 수가 없다. 물론 나의 처사가 지나쳤다는 점 십분 인정한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 하지 만……" 불나비가 말을 끊고 중간 보스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훑었다. "사내 대장부로서 피차 구질구질한 변명은 생략하자. 모두들 푸샵 자세로 엎드려 뻗쳐라! 조직에 반기를 든 대가가 어떤 것인 지 뼛속 깊이 심어주겠다." 불나비의 명령에 다섯 명의 중간 보스들은 군소리없이 땅바닥 에 엎드려 뻗쳤다. 원인은 불나비가 제공했다지만 보스를 설득하 지 못하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치닫게 한 것은 중간 보스들의 책 임이었다. 그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불나비가 중간 보스들의 허벅지에 매타작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간 보스들은 이를 악물고 불나비의 몽둥이 세례를 몸으로 받아 냈다.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다시 본래의 위상을 되찾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태가 수습되어 조직도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리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불나비의 매타작은 군대에서 단체기합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했 다. "퍽! 퍽! 퍽!" 몽둥이가 허벅지의 살점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윽! 윽! 윽!" 그때마다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졸개들은 진저리를 쳤다. 언제 불똥이 자 신들에게로 옮겨 붙을지 모를 일이었다. 만두로부터 시작되어 망 치까지 이미 한 순배를 돌았건만 불나비의 매타작은 좀체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중간 보스들의 허벅지는 차례차례 벌창이 나 버렸다. 궁둥이 살점이 터져 벌겋게 핏물이 배이기 시작했다. 불 나비는 그쯤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어야 옳았다. 미친 개야 몽둥이로 다스리면 약발이 듣는다지만 중간 보스들이 처한 입장은 분명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에잇, 씨파!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보자보자하니까 너무 하 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씩씩거린 것은 꾀보였다. 꾀보가 한판 붙어볼테냐, 하는 듯이 불나비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쏘았다. 그것을 신호로 나머지 네 명의 중간 보스들도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불나비를 경멸하는 듯한 태 도를 취했다. 이번에는 번개가 땅바닥에 침을 찍 갈기며, "제기랄, 이거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니요!" 하고 따졌다. "뭐야, 이 새끼들이……!" 순간 불나비는 깜박 본정신을 상실했다. "이판사판으로 가보자 그거야? 후딱 제 자리에 엎드려 뻗치지 못하겠어!" 그러나 불나비의 명령이 먹혀들 정도로 나긋나긋한 분위기가 이미 아니었다. 불나비는 기가 막혔다. 그런 분위기를 초래한 것 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러나 어제 보스에게 반기를 들고, 이제는 자신에게까지 항명하며 덤벼든다고 생각하니 콩팥이 뒤집힐 지경 이었다. 불나비는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올랐다. "이 새끼들, 기어코 내 손에 죽어볼텨!" "네에미 붙을! 저 씨펄 놈의 새끼 꼴보기 아니꼬와 더는 못참 겠네. 그래, 이판사판이다. 한판 붙고 이쯤에서 관계 끊자, 이 씨 펄 새끼야!" 이번에는 넙치가 팔뚝을 걷어붙이며 맞장 뜰 자세를 취했다. 막다른 담벼락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향해 덤벼드는 법이었다. 불나비가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통을 맞고 먼저 나가 떨어진 것 은 꾀보였다. 꾀보의 머리통이 깨져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그것 이 나머지 중간 보스들의 심사를 아주 비틀어 놓는 계기가 되었 다. 졸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 리게 된 것이었다. 하여 불나비와 다섯 명의 중간 보스 사이에 집단적인 난투극이 벌어졌다. 제아무리 실전으로 단련이 된 불나비라 하더라도 혼자 서 다섯 명의 중간 보스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간 보스들도 결코 핫바지들이 아니었다. 숱한 전쟁을 치른 깡다구들 이었고, 그런 점을 인정받아 오늘의 위치에 오른 그들이었다. 다섯 명의 중간 보스 중에서 가장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사 람은 만두였다. 불나비에 대한 불만보다 만두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보스에 대한 신뢰였고, 산본에서 벌여놓은 사업이었다. 불나비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긴장된 눈초리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졸개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 양측을 뜯어 말린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불나비는 온몸 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꾀보는 머리가 깨져 큰 상처를 입었다. 번 개와 넙치도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그 와 중에서 망치는 이빨 두 개가 날아갔고 얼굴에도 제법 큰 상처를 입었다. 만두만이 겉모양이 말짱했다. 만두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탈진하여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졸개들이 봉고차에 부 상자들을 싣고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다.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사장은 낙담했다. 이제 조직을 원 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사장은 일단 병 원으로 갔다. 별다른 외상이 없는 만두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병 원의 응급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불나비가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면목이 없습니다, 형님." 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결리는 모양이었다. "형님께 두 차례나 심려를 끼쳐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중간 보스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합창하듯 말하고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다 소용없다. 내가 부덕한 탓이다."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사장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비 를 뿌릴 기세인지 하늘도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장은 답답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둔 덕에 나뭇잎들이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불나비를 불러 올린 게 잘못이었던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불나비에게 조직 운영을 전적으로 위임한 데에서 잘못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 까. 그렇다면 화살 끝은 사장 자신에게로 돌려져야 옳았다. '이럴 때 마음을 맞대고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주영감이라면 이런 난제를 가볍게 해결하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어제 모주영감 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도무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말이 었다. "비가 이미 왔고 이미 비가 그쳤구나." 사장이 말을 잊은 채 연거푸 술잔만 뒤집자 모주영감이 불쑥 내뱉었다.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영감님?" 해서 사장이 그 뜻을 캐물었었다. 그랬더니만 모주영감의 킬킬 킬 웃으며 답변을 놓았는데 그 말뜻 역시 아리송하긴 마찬가지였 다. "비가 이미 왔고 이미 비가 그쳐 버린 것을 이제 와서 어쩌겠 는가! 땅에 붙어 살아가는 미련한 인간인지라 하늘의 조화를 따 름은 정한 이치. 어느 날 다섯 신하가 임금의 곁을 떠나되 하나 는 후한을 남기겠고 둘은 미구에 돌아오리라. 나머지 둘은 애당 초에 오랜 인연이 아니었구나……." 도대체 그 말뜻을 헤아릴 수 없어 그냥 흘려듣고 말았었다. 꼬 치꼬치 캐묻고도 싶었으나 어쩐지 선뜻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 다. 모주영감 같은 젊은 모사가 있다면 영입하여 곁에 앉힐 수도 있으련만, 하는 생각을 먹게 된 것도 어제의 일이었다. 저 삼국지 의 유현덕이 어찌하여 삼고초려를 감내하면서까지 제갈공명의 초 막을 찾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도원에서 결의 형제를 맺은 관우나 장비보다 그를 윗자리에 앉힌 까닭도 어렴풋 이 짐작이 되었다. 사장은 우중충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런 저런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간단히 응급조치만 받고 속히 사무실로 돌아와!" 그 말을 남기고 사장은 응급실을 나섰다. 사장이 먼저 대책위 원회 사무실로 돌아왔고, 그로부터 1시간쯤이 경과한 후 불나비 와 다섯 명의 중간 보스들이 줄레줄레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만약 모주영감을 지금보다 훨씬 전에 만났더라면 도움을 요청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윽고 사장이 입을 열었다. "너희 다섯 놈들은 지금 당장 짐을 싸가지고 이곳을 떠나라!" 사장이 다섯 명의 중간 보스들을 향해 최후 통첩을 하달했다. 아무도 사장의 명령에 토를 달지 못했다. 사실이지 그럴 만한 상 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는 나를 찾을 생각 말아라. 나는 더이상 너희 놈들의 형 이 아니다. 내가 내일 아침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깨끗 이 정리하도록 해. 그리고 너희 놈들이 끌고 온 애들은 모두 데 리고 떠나라." 그런 다음 불나비를 향해 화살을 당기듯 말했다. "불나비는, 이곳에 남아 조직을 재정비하도록 해라." 그리고 휙 등을 돌린 사장은 곧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찔끔찔 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뿌리고 있었다. 허담이 우산을 펴 들고 뒤쫓아 나왔다. "따라 오지 마라. 나 혼자 있고 싶다." 사장은 우산도 받지 않고, 힘겹게 따라붙는 기인 그림자를 이 끌고 가듯 느럭느럭 언덕배기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찾아갈 곳 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사장이 언덕배기에 있는 돼지막을 향해 떠난 후 다섯 명의 중 간 보스들은 말없이 짐을 꾸렸다. 뒤늦게 산본 조직에 합세한 번 개와 넙치는 자신이 거느리고 왔던 졸개들을 데리고 떠나왔던 곳 으로 먼저 떠났다. 그 뒤를 꾀보가 십여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뒤쫓았다. 그리하여 백여 명에 이르던 산본의 조직은 다시 육십 여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조직의 축소보다는 다섯 명의 중간 보스를 한꺼번에 잃게 된 것이 더 큰 타격이었다. 만두와 망치는 졸개들 없이 단신으로 산본을 떠났는데, 약속이 나 한듯 서울의 세븐 클럽으로 돌아갔다. 회오리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썰렁해진 조직을 새로 정 비하기 위해 불나비가 남은 졸개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켰다. 그 러나 어떻게 조직을 재정비해야 할지 암담했다. 만두와 망치는 클럽에 처박혀 보름 가까이 근신의 나날을 보냈 다. 그들이 떠날 곳이 없어 클럽에 처박혀 있었던 것은 물론 아 니었다. 사장의 말마따나 그들은 의리와 복종을 신념으로 삼고 조직 생활을 해왔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장과 함께였다. 만두와 망치 역시 불나비의 처사에 전혀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불나비에게 가장 불만이 컸던 사람은 꾀보였다. 클럽 시절부터 행동대장으로 커온 꾀보는 조직이 분리 확장되자 은근히 산본파의 2인자 자리를 기대했었다. 다른 중간 보스들보다 나이도 한두 살이 위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불나비가 영입되어 2인자의 자리를 꿰차게 되자, 이른바 낙하산식 인사행 정에 조금은 배알이 뒤틀렸던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불나비의 조직 운영방침이 오해를 사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불만이 산호초처 럼 자라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 꾀보의 불만스런 심정에 부채질을 한 것은 번개와 넙치였 다. 번개는 꾀보의 추천으로 산보파에 영입되었고, 넙치는 만두의 추천으로 들어왔다. 그들 두 영입파는 과부 심사 과부가 알아준 다고 급격히 단짝을 이루었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불나비에 대한 반감을 함께 키우게 된 것이었다. 만두가 총대를 멘 것은 산본 사업 추진 세력의 주축이었을 뿐아니라, 중간 보스들의 단 합된 의견을 가지고 보스를 설득해보자는 데에 일단은 의견이 맞 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산본에서 쫓겨온 만두와 망치는 뿌리뽑힌 부평초처럼 클럽 생 활에 정착을 못하고 계속 겉돌았다. 쌍칼을 비롯하여 누구 한 사 람 그러나 눈치를 주지는 않았다. 옛 전우에 대한 따뜻한 배려였 으리라. "만두 형, 그만 돌아갑시다." 어느 날 망치가 조용히 제안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망치의 마음을 못읽을 리 없건만 만두가 물었다. "산본으로 돌아갑시다, 만두 형. 형님을 찾아가 석고대죄하면 설마하니 우리를 내치기야 하겠소. 우리가 없어 형님도 내심으론 무척이나 낙심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도통 잠을 못이루겠어. 서로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건달을 자처하는 놈으로서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우? 사람 사는 것이 뭐 이 따위로 흘러가선 안되는 거 아니우? 번개와 넙치는 그만 두더 라도, 꾀보 형을 만나 함께 돌아갔으면 싶지만, 내 생각엔 번개랑 넙치와 손을 잡고 독립할 모양입디다." 그렇게 말하는 망치의 눈가에 그렁그렁 이슬이 맺혔다. "나 역시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함께 산본 으로 돌아가자. 망치 너도 그렇지만 내가 없으면 산본 사업을 누 가 꾸려 나가겠니?" 만두와 망치는 와락 서로를 끌어안았다. "쌍칼 형에게, 중간에서 잘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면, 일이 잘 풀릴 거야." 만두가 말하고 망치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다섯 명의 중간 보스가 산본을 떠난 후 보름 동안 사장은 거의 술독에 빠져 지내다시피 했다. 저녁마다 돼지막의 모주영감을 찾 아가 술을 마셨고, 밤이 깊으면 이지러진 달빛을 밟으며 탈레탈 레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산본의 조직은 불나비가 알아서 챙기 고 있었다. 불나비는 그러나 거친 습성을 아주 털어버리진 못하 고 있었다. 개꼬리 땅 속에 삼년을 묵혀도 변함이 없다는 옛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모주영감은 저녁마다 찾아오는 사장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랜 벗이나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을 말없이 술잔을 뒤집곤 했다. 한때 관상과 사주 따위를 보아주며 명성을 떨친 경력이 있는 모주영감 이고 보면, 사장을 위해 한두 마디쯤 위로의 언사를 건넸을 법도 하건만 웬일인지 그런 심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따금 술잔을 기울이다가 말고, "때를 모르니 마음이 괴로울 밖에. 천지만물의 변화고 세상사 의 이치고 간에 곰곰 들여다보면 복잡한 것만도 아니건만, 마음 이 괴로우니 시야가 절로 어둡고, 그러니 자연 때가 보일 리 없 지.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 아닐까 몰라. 나아 갈 때와 물러날 때를 살펴 능히 알 수 있다면 세상사 정도야 부 처님 손바닥 안이건마는……." 하고 알듯 모를 듯한 소리만 중얼 거릴 뿐이었다. 사장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술에 절어 지냈 다. 그러니 지금이 나아갈 때인지 물러날 때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세월이 약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도 모를 일이었다. 쌍칼이 만두와 망치를 데리고 산본으로 내려왔을 때도 사장은 돼지막의 모주영감과 술을 벗삼고 있었다. 쌍칼이 허담을 시켜 돼지막의 동정을 살피고 오라 일렀다. 만두와 망치를 따라 함께 내려온 남욱은 여러 졸개들과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있었 다. 클럽에 손을 떼고 이참에 산본에 눌러앉을 작정을 하고 내려 온 길이었다. 쌍칼도 보스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좋을 대로 하라 고 이미 허락을 해놓은 상태였다. 클럽에는 이미 남욱의 빈 자리 를 메꾸어줄 마땅한 인물이 새로 배치되었다. "형님은 지금 돼지막의 모주영감님과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하긴 요즘 허구한 날 두 노인네가 신선타령으로 소일합니다. 모 주영감님과 어울려서 그런지 형님도 부쩍 늙을 것 같아요. 제가 만두 형과 망치 형이 내려온 사정을 소상히 일렀건만, 쓰다 달다 일체 말을 하지 않더구만요." 허담이 돌아와 돼지막의 분위기를 전했다. "역정을 내는 것 같진 않디?" 망치가 눈알을 뙤록거리며 묻자 허담이 즉각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요. 별로 놀라는 눈치도 아니었구요." "일차 연락을 취했으니 됐다. 함께 돼지막으로 올라가 보자." 쌍칼이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만두와 망치를 데리고 돼지막으 로 올라갔다. 사안이 달랐으므로 남욱은 그 자리에 함께 동행하 지 않았다. 사장은 모주영감과 마당가 평상 위에 앉아 조용조용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쌍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찾아오게 된 용건을 간략히 말하 고, "형님 마음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처음에 사정 이야기를 듣 고 저 역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화가 치밀어 때려도 보고 야단도 처보고 했습니다만, 그럴수록 왠지 마음은 편치가 않습디 다. 사람의 정이란 게 그렇듯 가슴을 훑는 요물인 모양이에요. 그 러고 말입니다, 형님. 만두와 망치가 형님 곁을 떠날 수 없다며 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진심으로 사정사정 하더군요. 형님께 말 씀 좀 잘 해달라구요. 쌍칼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그만 눈 물이 핑그르 돕디다. 이번 한번만 특별히 용서하시고 다시 애들 을 거두어 주시지요." 하고 간곡한 어조를 간청했다. 만두와 망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가 흙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이었다. 사장은 그 러나 빈 술잔을 만지작만지작할 뿐 바늘로 꿰맨 것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지난 번엔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형님." 망치가 말했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형님이 용서치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여기 이렇게 앉아 있겠 습니다." 만두 역시 새삼스레 옛정이 솟구치는지 목소리가 감겼다. 사장 과 마주앉아 있는 모주영감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멀뚱멀 뚱 하늘을 쳐다보면서 조는 듯이 눈을 꿈적거릴 뿐이었다. 세상 일이란 뿌린 자가 거두는 법이지, 하고 사장을 마치 타이르는 것 만 같았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평상 위에서 흙바닥 아래로 강물을 이루 며 칠넘칠넘 흘러 넘치고 있었다. 만두와 망치가 땅바닥에 무릎 을 꿇고 앉은지 1시간쯤 지났을까. "만두야!" 사장이 허공으로 눈길을 던지며 꿈결처럼 만두의 이름을 불렀 다. "네, 형님!" "망치야!" 이번에는 보디가드였던 망치의 이름을 불렀다. "네, 형님! 저 망칩니다……." 망치가 그만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도 했거니와, 건달 세계에 일찌감치 발을 들여놓은 후, 사람의 정을 사무치도록 받아보지 못하고 커온 자신의 과거가, 울컥 가슴을 치받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돌아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 앉아 계신 영감님이 가르쳐 주시더라. 그랬는데도, 지난 보름 동안이 내게는 몇 년이 흘러간 것처럼 길고도 지루했었다." "저희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형님." 만두가 말하고 끄억 하고 울음을 삼켰다. 그 바람에 옆에 서 있던 쌍칼도 덩달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희들이 돌아와서 기쁘다." 그리고 모주영감에게로 히뜩 눈길을 가져가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 하고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이 평상에서 내려서며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어차피 건달이 되어 만나지 않았느냐. 기왕지사 큰 건달이 되어 보자꾸나!" 그리고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저만큼 앞장서 시적시적 언 덕배기를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 온, 사람허구는……, 쯧!" 모주영감이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 마디 보탰다. 두 사람은 늦은 밤에 여행 목적지인 황지에 도착했다. 사위는 온통 짙은 어둠에 뭍혀 태고의 적막감에 사로잡혀 있었 다. 그들은 폐광촌이 되어 버린 태백산 기슭의 어느 아담한 모텔 에 여장을 풀었다. 창문을 통해 한쪽으로 이즈러진 달이 태백산 산마루 위로 벙싯 솟아오른 게 보였다. 모텔은 태백산 계곡의 도 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따금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스 산한 밤의 정적을 휙휙 찢고 달아났다. 차거운 달빛이 창가로 다 가와 은빛 고운 혓바닥을 남실대고 있었다. 승혜의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여행의 목적지를 정선이 아닌 황지로 택한 것은 그곳이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 라고 울먹울먹 승혜는 말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언제고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서. 두 사람이 산본을 떠나 황지에 도착한 것은 그러나 사랑의 탑 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동안 쌓아올린 사랑의 탑을 허물 고 각자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 승혜의 입장에 서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여행을 고 집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혜 쪽이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정선의 아우라지강이 자기네 마을을 유자 형으로 유유히 휘돌아 내려간다고, 아스라히 멀어저간 기억을 더 듬듯 승혜는 말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러다가 고향 마을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것은 나이 열일곱 살 되던 여고 1학년 때 가을이라고 했다. 화사한 목 단풍이 아지랑이처럼 시야에 어른거리던 그런 깊은 가을이라고 했다. 승혜가 고향 마을을 등질 때, 그녀를 낳아 키워준 부모는 물론 가깝게 알고 지내던 마을의 그 누구도 서울로 떠나는 그녀의 뒷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여명도 눈뜨지 않은 이른 새벽녘. 승혜는 혼 자 아우라지 강을 건넜다고 했다. 강심은 그때 연기를 내뿜 듯 희뿌연 이내를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가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정 드리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그때 승혜는 홑몸이 아니었다. 뱃속에 잉태된 씨의 임자가 그 러나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세 놈 중의 한 놈의 씨가 분명할 터인데, 그것은 하느님도 정확히 분간하기 힘들는지 몰랐다. 승혜 는 울면서 아우라지강을 건넜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 도록 듣고 또 불렀던 정선아리랑이 그때처럼 가슴을 적신 적은 맹세코 없었다. 듣는 이나 부르는 이의 폐부를 전기로 찜질하는 듯한 정선아리 랑의 애절한 가락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아우라지강 물줄기를 닮 아 있었다. 또한 고향을 등지던 그때의 승혜의 심사를 닮아 있었 다. 승혜는 그림자를 지우며 조용히 고향을 등졌다. 승혜는 노래를 곧잘 불렀었다. "저 애가 커서 가수가 될라 하나?" 부모는 물론 고향 마을의 지기들은 승혜가 커서 가수가 될는지 모른다고 수근거렸다. 승혜는 가수가 되는 게 꼭 싫지만은 않았 다. 그렇다고 가수가 되겠다고 스스로 별러본 적은 없었다. 치한의 습격을 받고 승혜가 열일곱 해 동안 곱게 가꾸어 온 몸 을 망친 것은 그 해 여름의 끝물이었다. 그건 다시 생각해도 혐 오스럽고 치떨리는 일이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하지만 자신 이 그토록 허무하게 낙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여름방학 을 마치고 가을 학기에 들어간지 며칠 안돼서였다.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하다가 밤이 늦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 날따라 유난히 보름달이 밝았었다. 승혜네 집은 정선 읍내에 서 몰운대 쪽으로 십여 리쯤 치우쳐 있는 아늑한 산자락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20분쯤 부지런히 걸어야 집에 당도할 수 있었 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였었다. 길 양편은 야트막한 산이었다. 밤이 늦어서인지 인적이 끊겨 있었다. 인적이 끊긴 행길을 솨아 하고 바람이 비질하며 지나갔다. 그녀는 달빛 쏟아져내리는 행길 을 자박자박 혼자서 걸었다. 노상 걷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한 순간 왈칵 무서 움증이 엄습해온 것이었다. 승혜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머추었 던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까지 곧잘 마중나오던 어머니는 그 날따라 결석이 었다. 하루종일 농사일에 시달리느라 심신이 지쳐버린 것인지 몰 랐다. 어둠 속에서 승혜는 수상스런 인기척을 느꼈다. 그와 동시 에 숨이 턱 막혀왔다. 등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 어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승혜는 하복부에 예리한 통증을 느끼고 비틀 거렸다. 급소를 맞았는지 하체의 힘이 맥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졸음을 못이긴 눈꺼풀이 제풀에 스르르 감기듯이. 치한은 세 놈이었다. 그들은 합세하여 승혜를 산밑에 외따로 떨어져 있 는 빈 집으로 끌고갔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무 도 살지 않는 텅 빈 집으로 돌변했는데, 밤사이 도회지로 야반도 주한 것 같다며 쑥덕거리던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승혜도 들었었 다. 좀체 희망이 보이지 않자 터전을 바꾸어 보기로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세 명의 치한이 어떤 놈들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승 혜가 알 만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읍내에서부터 그녀의 뒤를 밟아온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혹 읍내를 배회하는 불량배들이 아 닐까. 그것도 단박에는 알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분명 히 승혜 혼자였었다. 그들은 승혜를 빈 집의 안방으로 끌고 들어 갔다. 발버둥을 쳐보려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리 라도 질러야 할텐데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놈들이 수건으로 입 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숨쉬기조차 용이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 다. 방 안에는 거적데기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놈들 중의 하나가 가방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더니 거적데기 위에 깔았다. 계획적 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놈들인 것 같았다. 놈들이 두런거리며 그녀를 수건 위에 반듯하게 눕혔다. 방문에 바른 창호지가 군데 군데 뜯겨져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문풍지 우는 소리가 마치 귀 곡성처럼 들렸다. 밤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한 놈이 다시 한번 수건으로 승혜의 입을 바싹 틀어막고 억센 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짓눌렀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승혜 의 양팔이 벌려진 채 고정되었다. 다른 한 놈이 승혜의 두 다리 를 적당한 너비로 벌리고 역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으로 짓눌렀 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한 놈이 승혜의 허벅지 위에 가볍게 올라타더니 치마를 위로 휙 걷어올렸다. 그러고는 스타킹 을 내리고 신경질적으로 팬티를 찢어발겼다. 승혜는 부끄러웠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겁을 먹어서인지 하 체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가 이불이라도 덮어주었으 면……. 어둠 속이라 놈들의 표정이 감지되지 않았다. 이럴 때 여자가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 것인지. 그녀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 었고, 또 한번도 그 대처 방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승혜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힘껏 온몸을 비 틀었다. 그때였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그 무엇이 승혜의 목덜미에 와 닿았다. 칼날 같았다. "얌전히 있어. 반항하면 널 죽일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승혜는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랬음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승혜를 올라탄 놈이 칼끝을 그녀의 허연 허벅지에 쓰윽 문대었다. 허벅지 살점이 찢기는 통증에 승혜는 꿀꺽 비명 소리를 삼켰다. "꼭, 피를 뵈줘야 고분고분 해진다니까! 클클클……"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승혜의 귓속에서 부시럭거렸다. 어쩌면 나를 죽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문득 그녀의 뇌리를 차갑게 조 였다. 사람이 그때처럼 무섭게 느껴진 적은 결단코 없었다. 무서 움증이 서늘한 추위를 잊게 했다. 투박한 손길이 이번에는 승혜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칼끝으로 브레지어의 끈을 끊어버리자 탱탱하니 부풀어오른 젖가슴이 봉긋 솟아올랐다. 찢겨진 문틈으로 달빛이 먼저 기어들어와 승혜의 순 결한 젖가슴을 핥았다. 승혜는 속절없이 부끄러웠다. 그때 "허 억!" 바튼 숨소리를 엎지르며 한 놈이 승혜의 몸을 덮쳤다. 그러 고는 덥썩 그녀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순간 맨살에 송충이가 달 라붙은 듯하여 승혜는 으스스 진저리를 쳤다. 혀라도 깨물고 죽 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번득 모골을 스쳤으나 그것뿐이었다. 놈의 손길이 배꼽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숲을 지나 계곡에 가 멈추었다. 승혜는 두 다리를 바싹 오므렸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승혜의 양쪽 발 목을 짓누르고 있던 녀석이 불끈 손아귀에 힘을 넣은 것이었다. "이 년, 싫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꼼지락거려!" 승혜의 계곡에서 미끌미끌한 이끼를 감지하고 놈이 씨부린 소 리였다. 승혜는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음과는 달리 몸 의 중심에서 놈의 수작에 반응을 나타냈다고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놈의 혓바닥이 젖가슴에서 아랫배를 지나 그곳에 가 멈추었다. 놈이 킁킁거리며 그곳에 자신의 침을 묻혔다. 승혜 는 이를 악물었다. 더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승혜는 꼬챙이같은 것이 자신의 몸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음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놈이 헐떡거리며 풀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승혜의 팔과 다리를 압박하고 있는 나머지 두 녀석들이 키득키득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승혜는 찢어진 문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보기가 부끄러워 눈을 감았다. 승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귀밑머리 를 적셨다. 그 이전에는 한번도 그같은 절망의 눈물을 흘려본 적 이 없었다. "여기, 희미하게 보이는 이 상처가 바로 그때 칼에 그어진 거 예요." 승혜가 자기 허벅지 안쪽에 한 일자로 그어진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승혜의 모습은 달빛을 받고 있 는 한밤중의 달맞이꽃 같았다. 어쩐지 처연하다는 느낌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사장은 승혜가 가리키는 곳의 상처를 망연히 들여다보았다. 박꽃같이 하얀한 살결 위에 칼침을 맞은 상처 자 국이 피를 머금은 듯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처음 승혜와 정사를 치르던 그때 이미 사장은 그 상처를 보았었다. 승혜에게 그러나 그 상처의 과거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사장이 머리를 숙여 그녀 의 상처를 입술로 덮었다. 사장은 약속했던 대로 승혜를 버리지 않았다. 클럽이 강민파의 습격을 받던 그 날. 대책회의를 마친 사장은 곧바로 승혜가 누워 있는 호텔로 갔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서 잠 이 들었었다. 두 사람이 호텔을 나선 것은 다음 날 정오가 임박 한 시간이었다. 사장은 승혜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날 승혜는 강민파와 손잡고 있는 상암 유통의 전무로부터 비밀리에 사주를 받았다. 그리고 클럽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었다. 세븐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민양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었다. 물론 민양은 연예부장 단검으로부 터도 쇼걸을 하나 스카웃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아놓고 있었 다. 승혜의 마음이 돌변한 것은 사장을 만난 직후였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장과 함께 클럽을 빠져나오던 바로 그 시점이 었다. 강민파는 클럽을 습격하기 위해 만반을 준비를 이미 갖추 어 놓고 있었다. 안전한 시점을 노리고 있는 그들에게 비상연락 을 취한 것은 승혜가 아니라 민양이었다. 승혜는 사장과 함께 호 텔의 룸에 들어서는 그 순간에 상암유통의 사주를 묵살하기로 작 정했었다. 민양은 클럽이 습격을 받은 직후 자진하여 종적을 감 추어 버렸다. 그렇지만 승혜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사장에게 사실 대로 고백하지는 않았다. 사장 역시 내심 짐작을 했으면서도 승 혜에게 강민파의 습격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사 람은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통한 것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고백이나 질문이 불필요한 절차라는 것도 알았다. 사장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면서 승혜의 삶은 조금씩 바뀌었다. 하루 아침에 클럽 생활을 청산하고 오로지 한 남자를 위해 밥 을 짓고 빨래하고 집안을 가꾼다는 것이 그녀에겐 너무도 큰 변 화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잘 해냈다. 사장은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정오를 전후해서 집을 나서면 새벽녘에야 돌아오곤 했다. 이따금 외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클럽의 생리 를 잘 아는 그녀로서는 불만을 드러낼 일이 그러나 아니었다. 승혜가 민양과 함께 자취하던 방에서 자기 짐을 옮겨온 것은 동거를 시작한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그와 때를 맞추어 사장은 누이 집에 위탁했던 아들 준호를 데려와 승혜에게 떠맡겼다. 승 혜는 준호의 엄마 역할을 하면서 사장의 아내 역할도 해야 했다. 그렇듯 그녀의 삶은 갑작스런 변화에 직면했다. 준호가 그나마 승혜를 잘 따라주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하지만 밤 무대를 터전으로 삼고 건듯건듯 불규칙한 리듬을 타 고 살아오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 틀어박혀 살림을 산 다는 것은 결코 녹녹한 일만은 아니었다. 승혜는 아침이면 준호 를 유아원에 데려다 주었고, 사장의 출근 시간에 맞춰 정성껏 식 탁을 마련했으며, 준호가 돌아올 시간이면 간식을 장만해놓고 대 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네살박이 준호와 놀아주느라 팔자 에 없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난데없는 엄마 노릇, 아내 노릇에 심신이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해가 저물면 몸 구석구석이 근질근질하여 처음 얼마 동안은 참 아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밤무대 위에 올라 휘황찬란한 불 빛을 받으며 노래 부르고 춤 추던 생활의 때를 완전히 벗어던지 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승혜는 나름대로 행복을 꿈꾸며 새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대책위원회 사무실 옆에 사장이 거처할 집이 새로 마련된 후 준호와 함께 그녀 역시 산본으로 터전을 옮겼다. 산본의 생활은 그러나 서울 집에서보다 더 따분했다. 준호는 서울에서처럼 가까 운 시내에 있는 유아원에 다녔다. 산본의 집에는 그들 세 식구뿐 아니라 서너 명의 졸개들이 함께 기숙했다. 서울에 있을 때도 클 럽의 상무로 있는 남욱과 졸개 하나가 방을 하나 따로 사용했었 다. 산본에 머물기 시작한지 한 달만에 승혜는 서울의 클럽으로 출 퇴근을 시작했다. 좀이 쑤셔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갑갑했던 것이다. 준호의 뒤치닥거리는 한 졸개에게 떠넘겨졌다. 승혜는 클 럽에서 얼굴 마담으로 일했다. 룸에 들어간다거나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장의 명령이기도 했거니와, 총지배인 쌍칼이 그걸 허락할 리 만무했다. 클럽에 나가면서 승혜는 조금씩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송충 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클럽의 분위기는 승혜의 답답한 가슴 을 탁 트이게 해주었다. 오후 3시쯤 떠났다가 자정 무렵에 산본 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되자 준호와 조금씩 틈이 벌어졌다. 그것은 어쩌면 승 혜 스스로 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자 기 핏줄처럼 생각하고 키운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다 고 승혜 쪽에서 준호를 미워해본 적은 결코 없었다. 엄마 노릇 하기가 벅찼다는 것뿐이었다. 무뚝뚝하고 군말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사장은 진심으로 승혜를 사랑하고 위해주었다. 승혜가 한 남자에게서 마음 속 깊은 사랑을 느낀 것은 맹세코 사장이 처음 이었다. 준호의 실종 사건이 터진 것은 승혜가 산본에 정착한지 석달쯤 이 지났을 때였다. 준호는 분명 아침에 유아원에 갔다. 그리고 유 아원에서는 산본의 버스 정류장 앞에까지 준호를 데려다 주었다 고 했다. 그러니까 준호는 버스 정류장과 대책위원회 사무실 사 이의 불과 오백 미터밖에 안되는 공간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었다. 사장이 준호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 날 저녁 때 가 다 되어서였다. 준호를 담당하는 졸개는 아이가 돌아올 시간 쯤에 갑자기 다른 볼 일이 생겨 버스 정류장 앞에까지 마중을 나 가지 못했다고 했다. 빤한 길이니 준호가 알아서 집으로 돌아와 있겠거니 했고, 자기 방에서 혼자 잘 놀고 있으려니 했다고, 뒤늦 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쥐구멍을 찾았다. 클럽에 출근했다가 전화를 받은 승혜는 허겁지겁 산본으로 내 려왔다. 졸개들을 산본 일대에 좌악 풀었으나 준호의 행방은 묘 연했다. 그 때문에 가장 노심초사한 사람은 물론 승혜였다. 그녀 가 집에서 살림만 할 때는 어쨌거나 그런 일이 한 차례도 없었던 것이다. 준호가 있는 곳을 알게 된 것은 밤 10가 넘어서였다. 산본의 버스 정류장 앞에서 놀던 준호는 뉘엿뉘엿 해가 저물 무렵 버스 한 대가 마악 출발하려고 하자 무작정 올라탔다고 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반대편 버스 종점까지 실려갔다. 웬 꼬마가 버스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버스 기사 는 가까운 파출소에 신고한 후 손을 털었다. 파출소에서는 준호 의 유아원 가방에 박혀 있는 전화번호를 보고 연락을 취했다. 때 마침 유아원의 원장이 외출 중이어서 통화가 되지 않았다. 유아 원 교사들도 이미 퇴근을 한 후였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파출소와 유아원 사이에 전화가 연결되었 다. 유아원 원장의 연락을 받고 반대편 버스 종점 부근에 있는 파출소로 차를 몰고 간 것은 사장과 승혜였다. 준호는 울지도 않 고 파출소 순경이 사다준 과자를 먹으며 천연덕스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준호야, 왜 버스를 탔어? 어디를 가려구?" 산본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승혜가 물었다. 그러자 준호 가 꾸물꾸물 대답을 아끼는 듯하더니만, 불쑥, "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순간 승혜는 가슴이 콱 막혀오는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준호가 보고 싶다고 말한 엄마 가 승혜 자신을 가리킨 것인지, 아니면 준호를 낳아준 엄마를 지 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호의 실종 사건이 있은 후 며칠 동안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 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밤 늦게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사장이 일부러 승혜를 가까이 불러앉혀 놓고 말했 다. "준호에 대해 며칠째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야." 승혜는 대꾸없이 이어지는 사장의 다음 말을 들었다. "아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제 엄마가 있어야 할 것 같더군. 다행히 준호 엄마가 재혼을 않고 처가에 머물고 있다니……, 조 만간 가서 데려와야 할까 봐. 그냥 저대로 내버려두면 준호가 커 서 건달뿐이 더 되겠는가 싶어지더군. 아비로서 차마 못할 짓이 지. 건달은 나 하나로 충분히 족해." 승혜로선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괜스레 눈물이 솟구쳤다. 아이를 위해 헤어진 아내를 데려오겠다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 가. 그렇긴 하지만 준호가 그 날 보고 싶다고 말한 엄마가 헤어 진 아내라고 단정짓고 있는 사장의 마음 때문에 조금은 서글펐 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 집안에 두 여자가 함께 기거할 수도 없고……, 그러니 어쩌겠어? 승혜 문제로 나 혼자 곰곰 생각해봤 는데 말이지……, 얼마 전에 잘 아는 후배가 시내에 스텐드바를 새로 차렸더군. 한두 번 가봤는데 장사가 제법 되더구만. 승혜에 게 코너 두 개 정도 떼어줄 테니까, 이참에 독립해 보는 게 어떨 까 싶어. 언제까지 클럽을 전전하며 생활할 수는 없잖겠어? 내가 두 달 정도는 손님들을 모아주고 또 조그만 아파트 하나 얻어 줄 테니까……" "……!" "승혜를 처음 만났을 때 정말이지 오래오래 내 곁에 두고 싶었 는데……. 안믿어도 어쩔 수 없으나 그건 내 진심이었어. 건달이 사랑에 빠지다니 참 우스운 노릇이군, 흐흐흐." 사장은 한참을 흐흐거리며 혼자 웃었다. "아예 준호가 없었다면 모를까? 아비로서 자식 대할 면목이 없 어서야……." 그때 승혜는 사장에게서 까닭을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하 지만 단박에 표를 낼 수가 없어 지긋이 자신의 감정을 눌렀다. "사장님 마음 알아요. 저도 준호에게 최선을 못한 게 사실이구 요." 승혜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 승혜에게 책임을 묻는 건 아니야." "헤어지기 전에……, 함께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요. 갑작스 러운 건 아니고, 늘 혼자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동안 사장님 이 워낙 바빠놔서……. 이젠 더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된 셈이네 요." "어디를? 꼭 나와 함께 가봐야 할 곳인가?" "사나흘 정도만 시간을 내주세요. 그럼, 아뭇소리 않고 사장님 이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스텐드바로 가라면 가고, 클럽으로 가 라면 그리로 가고……." 승혜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어. 조만간에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그렇게 해서 떠나온 여행이었다. 태백산 기슭의 밤은 점점 깊 어가고 있었다. 승혜가 사장의 팔을 베고 누워 또 다시 자신이 밟고 지나온 나날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새벽에 아우라지강을 건넌 승혜는 곧 서울로 올라갔다. 추석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명희 언니에게 승혜는 서울에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어린 시절 이웃에 살았던 명희 언니는 스물 한 살이었다. 정선에서 여상을 졸업하고 그 이듬 해 봄 서울로 올라 간 명희 언니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하여 경리로 일한다고 했다. "이제 겨우 여고 1학년 짜리가 갑자기 서울은 왜?" 명희 언니가 물었었다. 승혜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낮 에는 일하고 밤에는 노래 배우는 학원에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 고. "어머머, 얘 좀 봐?" 명희 언니는 처음에 펄쩍 뛰었으나 승혜의 얼굴에 드리워진 수 심을 읽었는지 자기 자취방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었다. 승 혜는 그때 이미 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고 있었다. 두달째 달거리를 하지 않고 있었고 이따금 헛구역질이 올라와 누가 볼세 라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뱃속에 또아리를 튼 씨를 속히 지워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처음엔 그 일을 엄마와 상의해서 조용히 처리하는 게 어떨까 생 각했었다. 그러나 승혜는 곧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엄마가 알게 되면 자연히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동생들도 알게 될 것이고, 결국엔 온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었 다. 마치 바람 부는 날 들불 번지듯.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차라리 혼자 몰래 죽어버린다면 모를까 부모에게 고통을 분담하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고통 분담의 차원을 넘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일 수도 있었다. 부모는 승혜 자신보다도 더한 고통과 절망에 허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혜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소리 소문없이 그 일을 처 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때 구원처럼 나 타난 사람이 바로 추석이라고 고향에 내려온 명희 언니였다. 미아리에 있는 명희 언니의 자취방에서 사흘째 머물던 밤에 승 혜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고백했다. 구조를 요청한 것 이었다. 명희 언니는 느즈막히 일어나 출근했고 매일 밤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입에서는 들척지근한 술냄새가 풍겨나왔다. 회사에서 회식이 있어 그런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경리 아가씨로 취직한 사람 같지 않았다. 승혜의 이야기를 들은 명희 언니는 짧게 한숨을 토해내긴 했으 나 크게 놀라워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고향에서 가수 어쩌구 하 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절반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투였 다. 명희 언니와 함께 산부인과에 간 것은 그 다음 날 오전이었다. 산부인과의 의사가 남자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것을 탓할 만큼 한가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까. 의사는 명희 언니와 함께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고, 군소리없이 승혜를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남 자 앞에서 두 번째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 승혜는 수술을 받았다. 자궁 속에 있는 더러운 씨를 긁어낸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예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이렇듯 부끄 러움을 경험하는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승 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이는 이 제 어디로 가서 닻을 내리는 걸까. 내가 생명을 잉태했던 엄마라 는 걸 알기나 하는 걸까. 아아, 사랑으로 꽃피어난 생명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사랑하지 않았는 데도 생명이 씨앗을 맺는다는 건 또 얼마나 큰 모순 덩어리인가. 가물가물한 의식 속으로 자신을 이 세상으로 밀어낸 엄마의 얼 굴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번갈아가며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씨근씨근 풀무질을 해대던 세 놈의 치안은 어렴풋한 모습조차 형 상되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도 가물가물 기억에서 되살나지 않고 있었다. 명희 언니는 그녀가 퇴원할 때까지 병원 입원실을 지켜주었다. 땅거미가 내려오고도 한 시간쯤이 더 흘러간 뒤에야 승혜는 명희 언니를 따라 병원문을 나섰다. 밝은 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싫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도 세상의 환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 았다. 명희 언니는 그녀를 자취방에 눕히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 다음 날 새벽에야 돌아왔다. 명희 언니가 경리 아가씨로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니라 미아리 텍사스촌의 한 술집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수술을 받 고 난 그 다음 날이었다. 그 말을 자기 입으로 뱉으면서 명희 언 니는 쑥처럼 파랗게 웃었었다. 승혜는 명희 언니의 고백을 듣고 그러나 몹시 놀라지는 않았다. 그 후 서울에서의 2년 세월 동안 승혜는 이 세상 절반의 비밀 을 요량할 정도로 실로 다양한 체험을 쌓았다. 가수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에 이름없는 어느 대머리 작곡가 사 무실에도 두어 달 다녀보았다. 몸만 망치고 별로 배운 것이 없었 다. 아니 몸을 망친 꼭 그만큼 배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 르겠다. 아무튼 승혜는 대머리 작곡가의 사무실을 스스로 때려치 웠다. 어느 건설회사 사무실의 사환으로 두어 달, 미장원의 보조 자로 몇 달, 다방의 아가씨로 또 몇 달, 옷가게 점원으로도 몇 달, 그밖의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승혜는 수없이 서 울을 전전했다. 그러는 와중에서 승혜는 실로 많은 남자를 상대했다. 한번 망 가진 몸이라는 서글픈 인식이 그녀를 헤픈 여자로 전락시켰던 것 인지 몰랐다. 남자를 통해 세상을 배운 세월인지도 몰랐다. 명희 언니와 헤어져 미아리를 떠난 것은 승혜가 서울에 올라온 지 만 2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였다. 승혜가 새로이 터전을 잡고 정착한 곳은 서울의 동쪽이었다. 미장원의 보조자로 일했을 때 알게 된 주인 언니가 주선해 주어 레스토랑에 취직한 것이었다. 레스토랑은 천호동 텍사스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 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곳에서 승혜는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잊을 수 없는 한 사내를 만났다. 그 남자는 승혜가 다니는 레스토랑의 주인이자 동시에 텍사스촌에서 거문도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사 장이었다. 천호동 텍사스촌 주변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거사장이라 불렀다. 거문 도를 운영하는 사장이란 의미일 것이었다. 또한 아주 가까운 사 람들은 텍사스 상호를 따서 그냥 거문도라고도 불렀다. 거문도 사장은 통이 크면서도 섬세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체질의 사내였다. 생김새는 의외로 얇삽했고 눈빛은 어둡고 깊었 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미스 정, 나 좀 잠깐 보지." 어느 날 거문도 사장이 레스토랑에 붙어 있는 조용한 밀실로 승혜를 불렀다. 그 날 거문도 사장은 승혜에게 거문도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뜻밖에도 매우 단도직입적인 사내였 다. 레스토랑에서 백 날 일해봐야 사는 꼬라지가 늘 거기서 거기 라는 게 그 이유였다. "내가 대한민국 제일의 명기(名器)로 만들어주지!" 거문도는 초장부터 그렇듯 호언장담하고 나왔다. 매사에 거침 이 없었고 말을 가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말을 가려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았다. "싫어요, 미안하지만 난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 왜 미아리 텍사스에서 몸을 팔던 명희 언니의 얼굴이 떠 올랐을까. 명희 언니도 누차에 걸쳐 텍사스에서 한번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해왔었다. 그때마다 승혜는 명희 언니의 권유를 묵살했다. 서울에 올라온 후 많은 남자를 상대해본 건 사 실이지만, 그렇다고 까닭도 없이 다수의 남성을 상대로 몸을 판 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자기 아랫도리를 밑천으로 삼 아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를 그녀는 증오했다. "결혼한 여자는 뭐 별 다른 줄 아니? 한 남자에게 고정적으로 몸을 팔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것뿐이라구. 합법이 란 울타리로 보호막을 치고 말이지.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결국 몸과 몸의 거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야. 사랑 어쩌구 해쌓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게 다 개좆이라구!" 심통이라도 났던지 명희 언니가 쏘아붙였다. 하지만 승혜는 명 희 언니의 표현이 꼭 진심에서 우러난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 었다. "그냥 한번, 거문도 여자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해 보고 싶긴 해요." 거문도 사장의 제안에 대한 승혜의 답변이었다. "그거야, 뭐 어려울 것도 없지. 실컷 구경한 다음에 결정해도 늦진 않으니까. 아니, 그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군." 거문도 사장은 조금도 조급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면서도 탐미적인 눈빛으로 오래오래 승혜의 얼굴을 쳐다보 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승혜는 거문도 사장을 따라 텍사스촌 거 문도로 갔다. 거문도는 통상 두당 2만원에서 3만을 선불로 받고 손님들과 거래를 시작한다고 했다. 가격에 차이가 나는 것은 성 수기와 비성수기 그리고 단골 고객과 뜨내기 손님의 차이에서 비 롯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다섯 명의 손님이 거문도에 들면 다섯 명의 아가씨가 대기하고 있다가 즉각 손님들 방으로 들어가 각지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앉는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고 자연스런 동작 으로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가운을 벗어버 리면 더 볼 것도 없이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었고. 즉각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가 대여섯 병쯤 배달된다고 했 다. 손님들과는 반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아 가씨들이 술 시중은 드는데, 그때 손님들은 인절미를 주무르듯 제각기 자기 옆자리에 배당된 아가씨의 몸을 주물럭 주물럭 하면 서 브라자 니나노 킬킬킬 하면서 맥주를 들이킨다는 것이었다. 좀 짓궂은 사내들은 아가씨의 유방을 맥주잔에 살짝 담갔다가 그 놈을 쪽쪽 소리내어 빨기도 하고, 더러는 홍합의 생김새를 감상 한다면서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저런 수작을 하면서 키득키득 놀아나다 보면 통상 30분 정도면 맥주는 바닥나 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한 커플씩 자리에서 일어나 시적시적 이층에 있는 방으 로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그곳에서 시답잖은 절차 일절 생략하 고 곧바로 정사에 들어가는데, 대개는 아가씨 쪽에서 남자의 옷 을 벗겨주는 친절을 배풀어 준다고 했다. 장화를 신고 안신고는 손님의 재량이었다. 대개는 20분 안쪽에서 정사 거래는 종료된다 고 했다. 정사 거래가 종료되면 한 커풀씩 먼저 술을 마시던 곳 으로 끼득끼득 모여드는 것이었고. "이과장은 아직껏 싸질 않았나, 왜 이렇게 오래 끌어?"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게 아닐까, 년놈들이?" "내비둬라, 모처럼 서로 임자를 만난 모양이니." 그 따위 농짓거리를 해대며 먼저 도착한 패거리들이 투덜거리 다가, 이윽고 한 자리에 일행이 다 모이면 미련없이 손을 탁탁 털고 거문도를 떠난다고 했다. 그것으로 모든 거래는 끝이었다. 손님들이 떠나기 무섭게 아가씨들은 벗어 놓았던 가운을 다시 걸 치고 다음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었으니, 간략하게 요약하면 한잔 마시면서 킬킬거리다가 한방 싸고 돌아가는 곳이 바로 거문도였 다. 거문도 뿐만이 아니라 그곳 텍사스촌 풍경이 대동소이하다고 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웃기는 소리다. 나이가 몇이냐고 묻 는다? 그것도 웃기는 소리다. 왜 이런 곳에 와서 일하느냐고 묻 는다? 그건 정말로 미친 놈의 짓거리다! 거문도에서는 마음을 주 고받아서도 안되거니와, 사연 따위는 늘어놓아서도 안된다. 피차 간에 인생을 운운하며 주접을 떨어서는 안되는 곳이 바로 거문도 였다. 거문도 사장이 승혜를 데려간 곳은 남녀의 정사 장면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비좁은 다락방이었다. 때가 한 여름이라서 선 풍기 틀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창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정사에 임하기 마련인데, 미닫이 창문이 아니라 여닫이 창문이라, 바깥 쪽에서는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고, 반대로 안쪽에서는 밖이 내다보이지 않게끔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남녀의 정사 장 면이며 정사를 나눌 때의 음향을 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다. 적나라한 정사 장면을 코앞에서 들여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었다.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고 더 선정적이었 다. 정사를 하고 있는 당사자는 어떨는지 몰라도 구경하는 쪽이 오히려 몸이 달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승혜는 포르노 비디오를 딱 한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미장원에서 보조로 일할 때였다. 미장원의 주인 언니는 밤에 이따금 그런 비디오를 즐겨 보았는데 승혜가 함께 본 것은 정말이지 딱 한번 뿐이었다. 징그 럽고 끔찍스러워 두번 다시 보고 싶지가 않았다. 승혜는 그 날 거문도 사장과 같이 다섯 쌍의 정사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성행위시의 체위가 희안하게도 모두 다르 다는 점이었다. 세상이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그 한 가지 의문점 때문에 그 다음 날 밤에도 승혜는 거문도 사장을 따라 다시 다락방을 구경갔다. 다시 다섯 쌍의 정사 장면 을 차례차례 육안으로 확인했다. 어제 본 것과 또 다른 체위였다. 세상에, 성행위를 위한 체위가 저토록 다양할 수 있는 것인지. 납 득이 되지 않아 승혜는 어리둥절했다. 그때 거문도 사장이 승혜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승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항할 필요를 못느끼지도 했거니와, 거문도 사장이 그때 그녀의 뜨거운 몸뚱이를 식혀주지 않았더라 면 되려 원망을 할 뻔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의 성적 욕망인 것 같았다. 그 날 승혜는 거문도 사장으로부터 여러가지 체위를 직접 배웠 다. 거문도 사장은 외모와는 달리 대단한 정력가여서 승혜에게 한 자리에서 일곱 가지의 체위를 지도해 주고도 끄떡이 없었다. 나중에야 승혜는 거문도 사장이 정력가여서가 아니라, 성적 기교 가 탁월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 후 승혜는 거문도 사장으로부터 본격적인 섹스 실습을 받기 시작했다. 거문도 사장은 온갖 체위를 일일이 실험하면서 그때 그때의 느낌, 감정의 변화, 기분의 쾌 불쾌 따위를 승혜에게 물어 체크했다. 단순히 승혜의 몸을 탐하는 행위는 아닌 것 같았다. 거 문도 사장은 섹스의 상대이자 동시에 실습을 받고 있는 제자의 반응을 정확하게 체크하는, 특이한 습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철저한지 어떤 때는 실습이 끝난 다음까지 이어졌 다. 거문도 사장은 체위별로 승혜가 받은 심리적 육체적 느낌을 캐 물었고 그 결과를 하나하나 자신의 섹스 수첩에 기록했다. 대한 민국 제일의 명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것 같았 다. --성관계를 맺을 때의 심리가 여자 쪽은 복잡한 것 같아도 실 상은 단순하고, 남자 쪽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복잡하 느니라. 섹스에 대한 상상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실전에 들어 갔을 때의 심리는 분명 그러하다. 다시 말해 여자는 어떤 체위로 성적 접촉을 시도할 것이냐, 하는 것보다는 섹스 파트너인 남성 을 통해 어떤 성적 감흥에 도달할 것이냐 또는 얼마만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쪽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느니라. 반대 로 남자는 섹스를 통해 어떤 쾌감을 얻느냐, 하는 쪽에는 관심이 적은 반면, 끊임없이 다양한 체위를 요구하면서, 자신의 남성다움 을 한껏 과시하고 발산하고 싶어하는 특징이 있느니라. 또한 남자가 성적 쾌감을 느끼는 데에는 시각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여자가 궁극에 도달할 때는 심리적인 요인이 더 크 게 작용하느니라. 따라서, 애정을 담은 끈질기고도 집요한 남자 측의 선무공작이야말로 여자를 궁극으로 치닫게 하는 핵심적 요 소이니라. 섹스에 임할 때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여자는 한 순간에 곧바로 저 도화진경의 세계로 빠져들 수도 있 고, 남성 쪽에서 몇 시간을 사정없이 풀무질을 해대도 고통스럽 기만 할 뿐 도화진경의 문턱 구경도 못하는 경우도 있느니라. 모름지기 섹스에 임할 때는 오감각을 총동원해야 하느니, 죽으 면 썩어질 몸뚱아리 너무 아껴도 못쓰는 법이니라. 아낄 것을 아 끼고 아껴야 할 때 아끼라는 뜻이니라. 좋은 음식을 아껴 먹으려 고 찬장 깊숙이 짱박아 두었다가 나중에 먹어보지도 못하고 버리 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옛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느냐. 이를테면 아끼다 똥이 되었다는 것인바 섹스도 그와 마찬가지이니라. 표정, 눈빛, 목소리, 촉감, 과감한 연기(演技) 따위를 총동원해야 하느 니, 섹스는 결코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이 아니니라. 섹스에 임할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은 이 세상을 활기차게 살 자격도 없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하니라. 언뜻 들으면 악담같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잉태된 씨앗은 팔불출을 탄생시키는 원인 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명심해야 될 줄로 아느니라. 남자는 꼭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보았을 때라야 성적 충동 을 느끼는 것은 아니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의 보일 듯 말듯한 엉덩이 곡선을 보고 더 큰 충동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니 라. 그럴 때 남성은 사정없이 자신의 남성을 그곳에 쑤셔박고 싶 은 욕망에 몸살을 앓느니라. 노출의 정도와 성적 충동 사이엔 아 무런 함수관계도 없다는 뜻이다. 즉 여자에 비해 덜 심리적이긴 하지만 남성 또한 시각적 요인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에 더 강한 자극을 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그리고 마음이 움직 일 때 비로소 서로의 기(氣)도 전달되는 법이니라. 여자는 대체로 곱상하니 귀공자처럼 생긴 남성을 동경하고 사 모하느니, 직선보다는 곡선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본 성 때문이로다. 하여 백마를 타고 나타난 왕자가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때 여자들은 대번에 실망부터 하질 않더냐. 하지만 그런 남성은 잠시 연애를 하는 상대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성적으로는 완벽한 대상이라고는 볼 수 없느니라. 오랜 세월 연애를 하다가 고 결혼을 앞두고 주저하는 경우는 있는데, 대개 성적인 장애 요 인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니라. 결혼을 앞둔 여자가 강한 남성 쪽으로 한 순간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 겠느냐. 그렇다고 강함이 전부는 아니고 부드러움 또한 전부가 아니로다. 강함과 유함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라야 가장 이상적인 남성이 되느니라. 단순한 섹스 거래는 오히려 몸을 망치는 법. 환희와 열락이 없 는 섹스는 주검의 냄새를 풍길 뿐이로다. 거문도에 몸담고 있는 아가씨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으니,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어젖히고 섹스에 임하라는 것이니라. 비록 몸은 주지만 마음만큼 은 절대로 팔지 않는다는 심리 상태는 오히려 마음을 병들게 하 고 몸을 늙게 하느니, 마음을 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라도 거문도를 떠나도 좋다는 것이니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기 텍사 스촌에서 단골 고객이 가장 많기로는 단연 거문도가 으뜸이니라. 나는 그같은 결과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느니라……. 거문도 사장의 섹스 강론의 요지였다. 이어 얇삽한 눈꼬리를 치켜 뜨면서 불문곡직 승혜에게 물었다. "네 발 가진 짐승처럼 여성은 엎드린 자세로 있고, 남성이 뒤 에서 공격을 시도할 때, 그때의 솔직한 기분이 어땠느냐?" 구법(九法) 중 걸어가는 호랑이와 같은 자세의 체위 때 반응을 묻는 것이었다. 승혜는 거문도 사장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회피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여자라는 느낌이 들던 걸요." 하여 승혜는 그 체위에서 섹스에 임할 때의 솔직한 심정을 그 대로 토로했다. 거문도 사장은 그 체위로 한참 섹스를 나눌 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이를테면 확인사살을 위한 질문이었다. "한 마리 짐승으로 변해 있는 듯한 착각은 들지 않던가?" 거문도 사장의 질문은 집요한 데가 있었다. "그래요, 암컷이 된 것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어요." "반응이 솔직해서 좋아. 혹 통증을 느끼진 않았느냐?" 섹스 강론 및 문답 때의 거문도 사장의 어투는 평소와 달랐다. "통증을 느끼진 않았어요. 오히려 삽입이 깊지않아 왠지 허전 하다는 느낌이 들던 걸요. 그리고 그 체위에서는 섹스 상대가 강 한 남성일수록 좋겠다는 그런 욕심도 생기더군요." "그 또한 매우 솔직한 반응이로군. 하지만 거대한 양물의 남성 을 만났을 때는 고통을 호소하는 여자도 없지 않지. 물론 그럴 때의 고통이 곧잘 쾌감으로 치환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 다음 체위로 넘어가기로 하지. 남성 쪽에서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고, 여성이 뒤로 돌아 그 위에 걸터앉은 자세로 공격을 받을 때의 느 낌은 어땠느냐?" 이는 토끼가 가느다란 터럭을 빨고 있는 모양새의 체위였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을 때하고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제대로 호흡만 맞추며 서로 한 차례씩 공격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 나쁘지 않았어요. 단, 자세가 다소 불편하여 여자 쪽에서 오래 버 티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더군요." "삽입의 강도는 어땠느냐?" "여자 쪽에서 혹은 남자 쪽에서 원하는 만큼 전진할 수도 후퇴 할 수도 있는 자세니까 삽입의 정도는 조절하기 나름이겠지요. 즐거운 섹스란 역시 각기 자기 중심을 한 차례씩 주고받는 데 있 고, 그때에 비로소 기쁨이 가중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혹 나만의 느낌은 아닐까요?" 승혜가 대답하고 연해 되물었을 때. "바로 그거야! 이를테면 여하남상(女下男上)의 정상 체위에서 남성이 일방적으로 한 곳만을 지루하고도 반복적으로 공격할 때, 여자 쪽에서는 기쁨보다는 되려 실증을 느끼게 되는 법이야. 섹 스가 역겨워지는 것이지. 단 한 차례의 섹스에서도 그러할진대 정상 체위로 번번히 일관한다면 그건 곧 지옥에 다름아니니라. 게다가 그 자세로 깔짝대다가 사정까지 해버린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지.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남성 위주의 섹스인데, 그런 남 자를 남편으로 만나 평생을 사는 여자는 결코 오르가즘을 경험하 지 못해. 사랑의 기쁨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채 한 세상 마감하 게 되는 셈이지. 그렇기 때문에 정상 체위를 시도할 때에도 남성 은 삽입을 강약을 조절함은 물론 상하좌우 공격 목표 지점을 수 시로 변동시켜야 해. 한편, 여자 쪽에서는 그 변동의 시점을 표정 으로, 눈짓으로, 신음 소리로 신호를 보내 알려줘야 하고. 구천일 심(九淺一深)이니 팔천이심(八淺二深)이니 하는 공략법이 그냥 생 겨난 말이 아니란 말이지. 이건 잠시 지나가는 여담이지만 그런 남편을 둔 여자가 다른 남성을 만나 절정을 경험하게 되면 천만 금을 가지고도 가정 파탄을 막아낼 수가 없어. 부처님 아니라 하 느님 할애비가 나서서 막아도 막무가내지." 승혜의 질문에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인 거문도 사장은 이번엔 남성 쪽에서 받는 느낌을 일러주었다. "한편, 남자 쪽에선 여자의 둔부를 눈으로 음미할 수 있고, 손 을 뻗어 쓰다듬을 수 있고, 또 여자 쪽의 적나라한 율동을 자기 혼자 뒤에서 감상할 수도 있으니, 행위와 관음(觀陰) 양편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 선호하는 체위지. 양물에 가해지는 자극의 정 도도 불만이 없고." "남자 쪽에서 가장 원하는 체위는 어떤 건가요?" 이번에는 승혜 쪽에서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런 게 바로 어리석은 질문의 전형이야. 단언하건대 누구에 게나 항상 최선의 체위란 없는 법. 사람마다 다를 뿐더러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서도 원하는 체위가 바뀌게 마련이지. 남자 쪽도 그렇고 여자 쪽도 그것은 마찬가지야. 그럼 또 다음 체위로 넘어가도록 하지. 남하여상(男下女上)의 자세에서 정상 체위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여성 쪽에서 상체를 남자의 몸에 바싹 밀 착시키고 행위에 임할 때와, 상체를 세우고 앉은 자세에서 행위 에 임할 때의 느낌이 차이가 있는바, 그것을 네가 알고 있느냐?" 전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비늘을 비벼대는 모양의 체위였 다. 후자는 앞의 체위에서 다소 변형을 시도한 자세. "우선 상체를 남자의 몸에 바싹 밀착시키고 할 때는 이렇던 걸 요. 서로 신체의 접촉 부위가 넓어 둘이 하나로 합일된 것은 같 은 기분이 들어 좋았어요. 허나 삽입이 깊지 않아 불만이고 또한 서로의 성기를 움직이는 데 부자연스러워 그 자세로 절정에 도달 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되더군요." 거문도 사장이 승혜의 말을 막고 보충 설명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거센 접촉으로 서로가 지쳤을 때 잠시 휴 식을 취하기 위해 활용하는 체위로 제격이지. 남성 쪽에서도 그 체위를 별로 선호하지는 않아. 다만 여자 쪽이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 그 자세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다거나, 등이나 둔 부를 애무할 때 유용하게 활용되지. 그럼, 다음 체위는?" "여자 쪽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요? 갑자기 자신이 남성으로 변신한 듯한 착각에 빠져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 이고픈 욕구가 솟구치더군요. 그 욕구가 정말이지 무척이나 강렬 했어요. 그리고 그때 아래에 누워 있는 상대의 표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여자 쪽의 공격을 받으며 즐거워 하는 남자의 표정을 감상할 때의 느낌이 뭐랄까, 여자를 야릇한 전률에 휩싸이게 만 들거든요. 그럴 때 쾌감이 큰 폭으로 상승하는 효과도 동반되는 것 같더군요. 또한 여자 쪽의 주도로 삽입의 강도 및 성기의 접 촉 부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니 불만이 있을 턱이 없 죠." "그때에 남성 쪽에선……" 하고 거문도 사장이 바통을 이어받 았다. "희비가 교차되기 마련이지. 여자 쪽에서 섹스에 적극성을 띠 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짓는 걸 바라본다는 건 분명 기쁨이겠고, 자신의 남성을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모 르는 사이에 남자로서의 본성이 위축되는 현상을 감득한다는 건 비애겠지. 거세(去勢)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또는 공포증의 발현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서로의 심리적 흐름을 잘 조절한다면 남 성 쪽에서도 여성 쪽에서도 별반 불만을 느끼지 않는 체위임에 틀림없어. 양의 최대 팽창과 음의 최대 수축, 그와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절정의 언덕으로 치닫는 저 충일한 합일에의 도 달!" 섹스 실습 후 그 결과에 대한 검토는 지속적을 반복되었다. 그와같은 치밀하고도 독특한 커리큘럼을 통해 승혜는 차츰차츰 체위별 미세한 특성까지도 하나하나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비밀스런 성의 세계에 환하게 눈뜨게 되었고, 어느덧 그 속으로 깊이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박깜박 놀 라기도 했다. 하지만 성의 세계란 바닥 모를 수렁과도 같아서 몸 을 비비적거리며 빠져 나오려고 할수록 더욱 깊이 흡입될 뿐 좀 처럼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거문도 사장은 명기 수련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도 했었다. 그럴 때의 거문도 사장은 도를 설파하는 선사처럼 우러 러 보이었다. --무릇 섹스는 대체로 삼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느니라. 전희와 삽입 및 진퇴 그리고 절정이 곧 그것이니라. 어느 한 단 계도 소홀히 다룰 수 없으나 역시 그 핵심은 삽입 및 진퇴시의 기교에 있느니라. 전희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그것은 삽입으로 가기 위한 길닦음에 지나지 않느니라. 자칫 잘못하면 길만 닦다 가 한 세월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느니라. 평생 목탁 만 두드리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늙으막에 목탁을 팽개치며 후회하는 땡초와 무엇이 다르랴. 절정을 위해서도 너무 혈안이 되어서는 안되느니라. 기어이 천 국에 들어가겠다며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반드시 천국의 열쇠를 손아귀에 쥔다는 보장이 없듯이, 절정이란 삽입 및 진퇴시의 기 교와 심리적 합일에 의해 저절로 따라붙는 선물과 같은 것이니 라. 천국에 미쳐버리면 결국 천국에 눈에 멀어 나중엔 천국을 보 여줘도 보지를 못하게 되는 이치와도 같도다. 단박에 득도(得道) 하겠다고 지나치게 얽매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의 노예가 될 뿐아니라, 중도에서 사도(邪道)의 길로 빠져버리는 수가 있듯 이. 섹스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파렴치한 또는 변태성욕자라 흔히 일컫느니라. 변태성욕자는 섹스 자체를 즐기고 감상하는 것 이 아니라, 섹스를 통해 상대방을 학대하고 고문하면서, 최종에는 자신을 병들게 하여 남에게는 주검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법이니 라. 일종의 정신병적 증후군이다. 그 동안 다양한 체위에 관해서 수련했다. 돌이켜보건대 그 많 은 체위가 결국은 삽입 및 진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기의 삽입 및 진퇴야말로 음양(陰陽)의 묘합구조이며, 하나이면 서 둘(一而二)이고, 둘이면서 하나(二而一)라는 저 신비의 세계를 체득할 수 있도록 협력하느니라. 다시 말해 삽입을 이룬 상태의 남과 여는 이물(二物)도 아니고 또한 일물(一物)도 아니라는 뜻이니라. 즉 둘인 듯하지만 실상은 하나이고, 하나인 듯하지만 실상은 둘이라는 뜻이니라. 다시 쉽게 말을 바꾸면 이러하다. 삽입과 동시에 음과 양으로 대별되는 두 개의 성기는 진퇴를 거듭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에 둘이면서 하 나를 이루고, 하나이면서 둘로 나뉘는 작용을 반복하게 된다는 뜻이니라. 음양이 함께 나아갈(進) 때는 하나를 이루고, 함께 물 러날(退) 때는 둘로 나뉜다는 말이니라. 함으로 함께 나아갈(進) 때는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합일(合一)의 충일감을 만끽하게 되 고, 함께 물러날(退) 때는 하나이면서 둘로 나뉘어져, 다음 합일 로 치닫고자 하는 저 야릇한 쾌감을 부여잡게 되는 것이니라. 그럴 때 음과 양 양측의 쾌감을 극대화시키고 다종다양화시키 기 위해 고안된 것이 즉 체위이니라. 그리고 그것은 저 원시의 혈거시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내려와 오늘에 전달되었느니라. 또 한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많은 섹스연구가들의 관심도 체위에 관 한 것이었으니, 체위별 삽입에 따른 기교야 말로 섹스의 핵심이 라는 뜻이니라. 이야기가 다소 장황하고 엉뚱하게 길어졌구 나……. 거문도 사장은 거기서 일단 말을 끊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다 음 강론을 위해 머릿속을 정돈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거문도 사 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둘이면서 하나를 이루는, 저 합일의 극대화를 모색하기 위해 때로는 여자의 성기를 단련하기도 하였느니라. 여자의 성기를 단 련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이 검토되었는데,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본의 어느 섹스연구가의 보고서에서 읽은 내용 의 일부이다. 나체의 여자를 반듯하게 눕히고 사지를 결박한 다음 천장에 얼 음덩어리를 매다느니라. 얼음덩어리가 녹아 차거운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할 때, 그 물방울의 낙하 지점을 벌 거벗은 여자의 음부에 정확히 고정시키느니라. 그러면 차가운 물 방울이 주기적인 간격으로 떨어지면서 여자의 음부를 자극하게 되느니다. 한편 여자 쪽에선 떨어지는 물방울이 차갑다는 감촉 때문에 처음에는 진저리를 치는 단순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차츰 시간이 경과하면서 물방울의 무게 때문에 엄청난 자극과 충 격을 받고 서서히 새로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느니라.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 했거니와, 바위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낙수에 대 응하는 이치와 다르지 않도다. 그와같은 수련을 주기적으로 반복 하게 되면 여자의 성기는 서서히 자극과 충격에 대처하기 위해 놀라운 반응을 보이며 단련되는데, 그 수련의 과정을 무사히 통 과했을 때 마침내 훌륭한 명기가 탄생하느니라. 수축의 강도와 이완의 진폭이 평소보다 수 배 이상으로 강화되고 확장되는 명 기……! 다시 말해 수축의 강도가 높은 성기일수록 둘이면서 하나를 이 룰 때 합일의 충일감이 극대화되며, 이완의 진폭이 큰 성기일수 록 하나이면서 둘로 나뉠 때 다음의 합일을 부여잡고자 하는 야 릇한 쾌감으로 인해 분리에 따른 아쉬움이 극소화되는 것이로다. 그렇듯 삽입과 진퇴의 과정에서 극대와 극소를 오갈 때 비로소 섹스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도용도용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니라. 이제, 체위별 실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다음 단계인 성기 단련 코스로 넘어가도 될 듯구나……. 거문도 사장의 섹스 강론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그 후, 거문도 사장으로부터 성기 단련 수련까지 어느 정도 마 스터하게 되었을 때, 승혜는 텍사스촌 거문도에 전격 투입되었다. 그곳에서 하루에도 대엿 명 이상의 남자를 상대하게 되었다. 거 문도에서 그녀를 만난 남자들은 한결같이 섹스가 끝난 후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서 승혜는 각기 다른 체위에 따른 감흥을 스스로 체크하는 열성을 보였고, 그 결과를 갖고 거 문도 사장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거문도 사장은 그때마다 새롭거나 중요한 사실이라고 판단되는 사항들을 자신의 섹스 수첩에 꼼꼼이 기록하곤 했다. 섹스에 관 한 한 거문도 사장은 선병질적으로 집착을 보이는 매우 특이한 사내였다. 승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어떤 여자에게서도 인간적 인 애착을 느낀다거나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로지 섹스 그 자체가 그의 주된 관심사인 듯했다. 거문 도 사장은 이를테면 전문적인 섹스연구가였다. 성기가 큰 남자와 작은 남자의 차이. 무드파와 완력파의 차이. 손장난파와 구강기파의 차이. 어떤 지독한 구강기파의 사내는 무 려 세 시간 동안이나 혓바닥을 놀려 여자의 몸 구석구석에 자신 의 타액을 뭍히고도 허전함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사디즘파와 매저키즘파, 일남이여파와 이녀일남파, 조루파와 지루파, 온건파 와 변태파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부류의 남성들을 상 대하며 승혜는 성장했다. "지금……, 사장님의 기분이 어떠 하리라는 걸 모르지 않건만, 글쎄요 무슨 까닭으로 지난 이야기를 지금 털어놓고 있는 것인 지, 그걸 콕 꼬집어서, 이렇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는 없지 만……" 그렇게 운을 떼다가 별안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승혜는 사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흐느끼듯 한참을 울었다. 사장은 승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말도 그러나 그 순간에는 건넬 수가 없었다. 흐느낌을 멈춘 승혜 가 다시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회상에 젖어 자기 자신에게 고백 하듯. "어쩌면……, 사장님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유일하게 사랑 을 느낀 남자이고,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로서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슬픈 깨달음.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러나 행복에 겨운 나날이었지. 행복의 실체를 조금씩 알게 되 었던 거야. 그런데 세상에는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더군. 내가 사 랑한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줄수록 나는 자꾸만 왜소해지고, 또 내 가 미워지기 시작하는 거. 그래서 나는 괴로웠던 걸까. 내가 사랑 한 사람이 속속들이 나를 알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나 하는 두 려움. 이상한 일이었어, 사랑이 기쁨만을 가져다주진 않다는다는 사실. 사랑을 느끼면 느낄수록 안으로 안으로 커져가는 저 큰 외 로움과 슬픔을……. 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던 거야. 내가 먼저 나의 모든 과거를 털어버리기로. 그런 다음 사랑하는 사람 의 곁을 말없이 떠나 버리기로. 그리고, 다시는 사랑으로 마음에 상처를 덧입히지 않기로.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도달한 결론 이 그랬어. 아아, 어디로 가서 어떻게 나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승혜는 한참을 또 흐느껴 울었다.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나는 괜찮아……." 승혜는 꿈결에서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장의 목소리를 들었 다. "우리 엄마는……, 내가 이런 여자가 되어 있을 거라고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테지.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하며 몸부림치고 싶진 않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닿겠어. 웃기는 거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산다는 거. 모르겠어, 인생이란 끝나고 나면 그저 일 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 엄마의 몸 속에 흐르던 피가 내게로 전달된 것인지도 모른다 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망상이 떠오른 건 내가 거문도를 떠나 클 럽 생활에 발을 들여놓던 바로 그 무렵이었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의 끈. 나는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엄마가 태어난 여기 태백산 기슭에 한번은 와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서. 남 모르게 나 혼자 작정을 했었지. 엄마의 고향으로 가자. 거기 서 담담하게 내 지난 삶을 털어버리자. 그런 다음, 스치는 바람인 듯 그렇게 속절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자. 그리고 나는 또 생각했었지. 내 몸뚱이로 익힌 그 숱한 섹스의 비법들. 그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리라고. 그것밖에는 아무것 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털이니까.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키우 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실현에 옮기기도 전에,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걸까? 느닷없이 내가 사랑한 그 사 람이 어느 날 내게 말해 주더군.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그 때 나는 마음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했지.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떠나야 할 시점이 왔다는 걸 그 사람은 어떻 게 알았을까?" 승혜는 거기서 말을 뚝 그쳤다. 그녀는 이제 울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 난 건달이니까." 사장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승혜의 벗은 몸을 한 손으 로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승혜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젖은 눈길로 사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 빛나며 부딪쳤 다. 승혜가 고개를 숙이더니 가볍게 사장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승혜는 자신의 입술로 사장의 코와 눈과 귀를 핥더니 미 끄러지듯 목을 더듬어 내려가 가슴에서 멈추었다. 승혜의 입술이 팥알 만한 사장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사장이 신음 소리를 내뱉 었다. 승혜의 입술이 가슴에서 이번에는 하복부와 옆구리를 지나 불끈 솟구친 사장의 성기에 이르렀다. 승혜는 오래도록 그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정성스럽게. 그것밖에는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이제 눈을 뜨고 나를 쳐다 봐." 승혜가 속삭이듯 말했다. 승혜는 어느새 사장의 몸 위에 앉아 있었다. 두 개의 성기는 삽입된 채 이미 하나로 합일되어 있었다. 승혜가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얕게 남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하고 승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조는 듯 꿈꾸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지으 며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릴 때, 그때는 여자 쪽에서 지극히 만족 스러워 한다는 증거야. 반면, 코를 찡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면 불만족스럽다거나 무언가 섹스가 여의치 않다는 뜻이고……. 모 름지기 남자는 섹스에 임하면서 끊임없이 여자의 변화하는 심리 를 읽어야 해. 그리고 거기에 적절히 대처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야. 지금의 내 표정이 어떤 것 같아?" "승혜의 몸은 나무랄 데가 없어. 정말 아름다워!" "표정을 보고 여자의 심리를 읽으라니까." 승혜가 명령을 하듯 말한 다음 계속해서 남성을 공략했다. "마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것 같군." "아니,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 보이도록 애쓰 고 있는 것뿐이야. 여자의 마음은 그렇듯 간사스러운 거야. 싫으 면서도 좋은 체 좋으면서도 싫은 체. 그러니까, 한 순간에 핵심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야."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군." "섹스할 때의 대화치고는 너무 딱딱해. 그건 여자에 대한 따뜻 한 배려가 아니야. 그럼, 다른 체위로 바꾸어서……" 사장은 승혜가 지시하는 대로 상체를 세우고 반듯하게 앉았다. 승혜가 삽입한 자세에서 양 손으로 사장의 목을 끌어안았다. 승 혜의 젖가슴이 사장의 입술에 와 닿았다. 사장은 두 손으로 승혜 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러자 승혜가 격렬하게 진퇴를 시작했다. 승혜의 등줄기에 땀 방울이 돋기 시작했다. 그래도 승혜는 율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참을 수 있어?" 하고 승혜가 물었다. "음, 조금은 더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장이 승혜의 둔부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공략하면 터질 것 같은데……, 맞아?"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조금은 더 참을 수 있어." "마음으로, 지금의 내 심리 상태를 느낄 수 있겠어?" "아직은 모르겠어." 승혜가 차츰차츰 운동 속도를 줄이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그리 고 사장의 머리를 꼭 끌어안더니 한동안 숨을 할딱거렸다. 잠시 후 승혜의 명령에 따라 사장은 또 다음 동작을 취했다. 그렇게 시작된 섹스 실습은 이박삼일 동안 계속되었다. 사장은 승혜로부터 수없이 많은 체위별 섹스 방법을 전수받았 다. 사장으로선 승혜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승혜는 혼신의 정성을 다 쏟았다. 학생보다 교사 쪽에서 더 적극성을 띤 학습이 었다. 사장은 그런 승혜의 마음을 몸으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 다. 사장 역시 수없이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건만 승혜에 게 견줄 만한 여자는 맹세코 없었다. 두 사람은 태백산 기슭의 모텔을 떠나 다시 산본으로 돌아왔 다. 그 직후 승혜는 스스로 집을 떠나 스텐드바 천궁(天宮)으로 갔 다. 사장은 약속한 대로 승혜에게 시내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얻어주었다. 승혜가 천궁으로 떠나고 열흘쯤 자났을 때 사장은 처가를 찾아 가 지선을 데려왔다. 엄마가 돌아왔다며 누구보다도 준호가 좋아 했다. 준호를 위해 백번 잘 결정한 일이라고 사장은 생각했다. 그 러나 지선 자신은 산본 생활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지 매사에 안 정감이 없어 보였다. 얼굴 한쪽에 언제나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 다. 지난 날의 남편을 위해서라기 보다 준호를 염려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사장의 제안을 수락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장은 밤마다 천궁으로 갔다. 승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의 도움 없이 천궁에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승혜에게 손님을 끌어주기로 한 약속. 사 장은 산본 사업과 관련한 일체의 외부 약속을 천궁에서 가졌다. 졸개들도 조를 편성하여 이따금 천궁으로 몰려가 매상을 올려주 곤 했다. 천궁 스텐드바 안에서 승혜의 코너는 언제나 많은 손님 들로 붐볐다. 승혜는 태백산 기슭의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까마 득히 잊은 듯 오로지 천궁의 자기 코너를 운영하는데 노력을 경 주하는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장이 밤마다 천궁으로 출근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만나 고자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천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천궁 은 사장이 업무를 보는 제2의 장소가 된 셈이었다. 족제비 강덕 만이 헛물을 켜고 물러간 후여서, 산본의 주도권이 사장에게로 완전히 넘어와 있던 때였다. 부동산업자, 복부인, 거간꾼 할 것 없이 사장을 만나지 못해 안달을 하던 시절이었다. 천궁에서 밤 늦게 술이 취해 돌아와도 지선은 쓰다 달다 일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어라 하든 사 장의 생활방식에 변화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장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지선도 아들 준호만큼은 건달 세계로부터 멀찍히 떨 어진 삶을 장차 경영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준호가 성장할 때가지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는 모성이 발동한 것뿐이었다. 자 식을 낳고 살던 옛 남편에 대한 정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장이 한 달쯤 천궁에 출근했을 때 승혜의 코너는 거의 안정 적인 기반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이제 굳이 손님들을 몰고가지 않아도 승혜가 경영하는 두 개의 코너는 언제나 손님들로 왁자하 니 들끓었다. 하기는 승혜의 외모와 센스만 가지고도 단골 고객 을 확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사장은 점차로 천궁에 발길을 줄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들 준호를 위해 데려왔다고는 하지만 지선에게 지나치게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슬며서 고개를 들던 그 즈음이었다. 지선은 그러나 사장의 생활방식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사장이 집에 일찍 들어온다고 해서 기쁨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술이 취해 새벽에 귀가한다고 해서 짜증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지선은 조각해 놓은 석고상인 양 표정이 고정되어 있었다. 지선 이 처음부터 그토록 냉정한 여자는 물론 아니었었다. 그 즈음엔 오히려 덜 한 편이지만, 지선이 준호를 임신했을 무 렵만 해도 사장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한 달에 사나흘 정도 집에 들르면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건달 생 활이란 게 그랬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느 때 불 의의 기습을 받을지 몰라 구두를 벗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것 은 고사하고, 두 발을 뻗고 숙면을 취한다는 건 더욱이나 쉽지가 않았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사장은 요즘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옆 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건달 세계 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부터 생긴 일종의 정신질환이었다. 지선은 남편의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아마도 준호를 임신한 후부터 그 정도가 더 심해졌던 것 같다. 어느 날 새벽이 었다. 모처럼 사장이 집이라고 찾아 들었을 때였다. 지선이 발작작으로 신경질을 부리며, "어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하숙치는 여자예요? 자 기는 하숙생이구요? 설령 막 되어먹은 하숙생이라 하더라도, 자 기처럼 하숙집 여자에게 소홀하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내 뱃속 에 들어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맞다면 어디 속시원히 대답 좀 해 보라구요!" 하고 사장을 질타했었다. 사장에 대한 투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세한탄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사장은 그런 잔소리를 듣는 걸 딱 질색하는 성미라, "건달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타고나는 거라구. 마찬가지로 건달의 아내도 타고나는 것이다, 알겠니? 여자가 그만한 일로 집 에서 쫑알대면 사내가 밖에 나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어? 두 번 다시 이 따위 태도를 보일 때는 그나마 집구석에 발길을 끊어 버릴 줄 알어!" "나도 이젠 지쳤어요! 아이만 낳으면 떠날 테니 그렇게 알아 요." 그때 사장은 허허 웃고 말았었다. 지선은 그러나 굳은 맹세를 실현하기라도 하듯 준호가 백일이 지났을 무렵 홀연히 집을 나갔 다.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살던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이혼이 니 뭐니 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사장은 지선을 찾지 않았다. 떠난 여자에게 미련을 갖는다는 건 적어도 건달에 겐 어울리지 않았다. 준호는 누이에게 강제로 떠넘겼다. 사장의 성미를 모르지 않는 터라 누이는 군소리 없이 준호를 맡아 키웠 다. 천궁에 사장의 발길이 뜸해지자 승혜에게서 이따금 전화가 걸 려오곤 했다. "요즘은 왜 안들르세요, 바쁜 일이라도 있었요?" 승혜는 그렇게 아주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묻곤 했다. "왜 그래? 내가 가지 않더라도 이제 장사하는데 별 지장이 없 잖아?" 사장이 퉁명스레 대꾸하면, "언니, 아니 준호 엄마하곤 잘 지내지요?" 하고 슬쩍 말을 비틀 기도 했다. "그건 승혜가 신경 안써줘도 되는 일이야." "알아요.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얼굴이라도 보게 한번 들르세요, 네? 다른 생각은 없어요, 그저 얼굴이나 한번 보게 ……" 그렇게 말할 때의 승혜의 목소리는 축축한 습기에 젖어 있기 마련이었다. "……?" 사장은 그만 대꾸를 하지 못했다. 가슴 한쪽이 싸하게 아려오 는 것이었다. 그 따위 치졸한 감정이 일어나는 건 무슨 까닭일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정이 발동한 걸까. 정이란 참으로 더럽고 끈 질겨서 누구도 못말리는 그런 감정일까. 지선이 떠났을 때는 전 혀 느껴보지 못했던 야릇한 감정이 속에서 꿈틀꿈틀 요동치는 것 이었다. 그런 상념에 붙잡혀 있다가 밤이 이슥해지자 사장은 시적시적 천궁으로 갔다. "그저 얼굴만 쳐다봐도 살 것 같건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따 금.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콩당콩당 뛰는 건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고. 내 마음조차 온전히 내 것이 아니란 뜻일까요? 사장님은 이런 느낌……, 아마도 이런 느낌을 모를 거예요. 그저 나 혼자……" 승혜가 비 맞은 중처럼 혼자 중얼중얼 말했다. 그러고는 사장 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멀뚱멀뚱 천장의 조명등을 쳐다보는 것이 었다. 무엇이 승혜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일까, 하고 사장은 속 으로 생각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여자 의 심리를 사장은 잘 몰랐다. 건달이 전공할 과목이 아니라고 일 찌감치 제쳐 놓았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시집(詩集)을 한 권 읽었거든……. 사춘기 소녀 시절에는 시도 많이 읽고 했었지……. 한번 들어볼 테에요? 내 고향 정선, 그래 거기 아우라지강을 쳐다보고 있으면 뿌우연 물안개 속으로 더러더러 시가 떠오르기도 했었지……. 후훗, 그것 이 과연 시였을까? 정말, 한번 들어볼 테에요? 내 마음 나에게 없어 너에게 갔나? 바람이 진눈깨비 사이로 불어오던 밤 너를 따라 가버린 텅 빈 내 마음 찾아서 아, 등잔불 심지를 낮추고 외출을 한다…… 참 시인들이란!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콕 찝어내서는, 자 봐라, 네 마음이 지금 이런 상태야, 맞지? 이렇듯이 속삭이는 거 같단 말이야. 시의 제목이 뭐였는 줄 알어? 사랑이야, 사랑. 세상 에……!" 승혜의 눈가에 설핏 이슬이 맺히는 것을 사장은 보았다. "내 마음 나에게 없어 너에게 갔나?" 승혜가 읊은 시를 되뇌이며 사장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오늘은, 왠지 나도 술 한잔 마시고 싶어요." 승혜가 사장 앞으로 얼음이 담긴 그라스를 내밀었다. 사장이 승혜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국산 위스키였다. 승혜는 독한 위 스키를 코를 찡그리며 쨀끔쨀끔 마셔댔다. 술잔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승혜가 씨부렸다. "크아, 술맛 한번 쭈우타!" "술장사 하더니만 술꾼 다 되어가는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이 자기 술잔을 단숨에 뒤집었다. 사장이 술을 마시는 동안 승혜의 눈망울은 물 먹은 솜처럼 젖 어 있었다. 그 날 천궁의 승혜 코너에는 사장 말고도 술꾼이 많 이 와 있었다. 그러나 승혜는 오로지 사장만을 상대로 대작했다. 승혜가 데리고 있는 미스 한이 나머지 술꾼들의 시중을 드느라 몹시 분주했다. 천궁에 드나드는 술꾼들은 대개 사장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 고, 승혜와도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누구 한 사람이 승혜에게 찝쩍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랬다간 스 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는 꼴이 될 것이었다. 그 날 사장은 거나 하도록 술이 취했다. 승혜도 제법 술을 많이 마셨다. 자정이 임박 해진 무렵에 사장은 천궁을 떠나왔다. 집에는 지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호와 허담이 함께 자는 방 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지선은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셨느 냐고 묻지 않았다. 묻는다 해서 꼬박꼬박 대꾸할 사람이 아니었 다. 사장은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지선이 말없이 사장의 옆자 리로 다가와 누웠다. 지선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장은 그러 나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고는 하지만 새벽 3시 이전엔 좀체 잠들지 못하는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궁에서 보인 승 혜의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사장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와서 지선을 다시 돌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선은 엄연히 준호를 낳은 엄마이 자 그의 아내였다. 그렇다고 승혜에게 돌아가겠다고 작정한 적도 없었다. 승혜를 위해서도 그건 바람직한 결정이 아니었다. 사장은 두 여자 사이에서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직을 생각했다. 조 직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위안이었다. 요즈음 조직은 별 마 찰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왜요? 잠이 오지 않으세요?" 지선도 아직은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선의 목소리가 문득 어제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몸을 한 차례 뒤체이더 니 지선이 사장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도 여자인지라 남성에 대한 그리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리라. 지선이 꼼지락거리며 사 장의 몸을 더듬었다. 웬일인지 지선의 몸은 꽤나 뜨겁게 달구어 져 있었다. 사장은 지선의 몸을 식혀주어야 하나 어쩌나 잠시 망설였다. 지선을 데려온지 한 달이 지났건만 부부로서의 관계를 가진 적은 딱 한번 있었을 뿐이었다. 어쩐지 지선이 낯설었던 것이다. 승혜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건 물론 아니었다. 사장이 지선의 달구어진 몸을 끌어안기 위해 마악 팔을 뻗었을 때였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가 임박해져 있었다. 야광 손목 시계가 시간이 늦었음을 확인 시켜 주고 있었다. 다시 한번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찾아온 거 아니에요?" 지선이 의아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 어난 사장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리고 거실의 스위치를 올 리고 문을 열기 위해 현관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사장이 마악 도어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아아함, 누, 누구 찾아왔습니까, 형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허담이 와와와 하품이 끝난 입아귀를 손바닥으로 두 들기고 있었다. 딴에도 건달 짠밥을 먹는답시고 잠귀는 밝은 모 양이었다. 사장이 별 일 아닌 것 같으니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허담에게 일렀다. "혹시, 웬 놈들이 습격을 온 건 아닐까요, 형님?" 허담이 허리를 굽신하며 낮게 속삭였다. "쓸데없는 소리. 주둥이 닥치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사장이 나무라 듯 소리치자, "그,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제가 밖의 동정을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하고는 허담이 창쪽으로 다가가 깔짝깔짝 밖 을 기웃거렸다. 캄캄한 어둠이라 밖이 제대로 내다보일 리 만무했다. 겁이 많 은 허담이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그저 그래보는 수작이었다. 사 장이 현관문을 열려다 말고, "누구야?" 하고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아무런 반응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별안간 기분이 이상해졌 다. 허담의 말마따나, 하다가 사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이상 한 기류가 감지되었다면 조직에서 이미 전화로 무슨 연락을 취했 어야 옳았다. "누구냐니까!" 목소리의 톤을 높여 사장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 밖에서는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혹시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도어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현관 앞 화단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시커먼 물체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 누구야?" 하고 사장이 화단 쪽으로 다가갔다. 승혜였다. 순간 사장이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사장은 밖 에서 현관문을 닫고 다시 승혜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웬일이야? 천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물었다. 승혜가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 바 람에 승혜의 기인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잔물결을 이루었다. "그럼, 이 밤 중에 여긴 왜 왔니?" 승혜의 어깨가 조금씩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여긴, 왜 왔느냐고 묻고 있잖아!" 사장이 목소리에서 문적문적 역정이 배어났다. "그냥요…….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이쪽으로 왔어요. 처음엔 나 도 잘 몰랐는데……, 다 와서 보니까 여기잖아요. 그런 걸 나보고 어쩌란……" 하다가 승혜가 아아앙 하고 어린애처럼 울음을 토해 냈다. "승혜가 올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조용히 되돌아가면 될 일인데, 어쩌자고 문을 두드려? 정말 이래도 되는 거니?" "나,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아파트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별안간에, 정말이에요, 다른 생각 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걸음이니까, 그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사장은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탈했다. 이래서 건달은 여자에게 깊은 정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했던 것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직을 키우는데 방해가 되기 십상이므로. "그럼, 이제 얼굴을 봤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사장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미친 여자가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온 듯 승혜가 부시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늘에 는 둘로 쪼갠 반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달빛을 받은 승혜의 눈 에서 눈물이 반짝 빛났다. "싫어, 돌아가지 않을 테야! 아무도 없는 썰렁한 아파트로 돌아 가고 싶지 않아! 나도 여기서……, 같이 살고 싶단 말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죽은 듯이……" 승혜는 다시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 지금 술주정하는 거니?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사장은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사장이 덥썩 승혜의 팔목을 잡 아챘다. 그러고는 어둠 속으로,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 로 끌고가려 했을 때였다. "싫어, 난 가기 싫단 말이야!" 승혜가 울부짖었다. 사장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철썩, 하고 승혜의 뺨을 후려갈겼다. 승혜가 맥없이 그 자리에서 옆으로 픽 쓰러졌다. "싫어, 난 가기 싫단 말이야!" 같은 문장을 수없이 반복하도록 입력되어 있는 자동인형처럼 똑같은 말을 거듭거듭 뇌까리며 승혜는 엉금엉금 땅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어 발짝 떨여져 있는 감나무 앞에 이르러 그 것을 부둥켜 안더니만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장 은 무류하니 어두운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지선이 소리없이 다가왔다. 지선은 사장 이 서 있는 곳을 지나 승혜가 부둥키고 있는 감나무 아래에서 멈 추어 섰다. 어깨를 축 내려드리며 지선이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 다. 사장이 두 여인을 시선 밖으로 밀어내려는 듯 등을 돌렸다. 지선이 울고 있는 승혜 곁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아 무런 말없이 한동안 승혜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승혜는 울음을 그쳤다. "미, 미안해요." 승혜가 꺽꺽거리며 겨우 말했다. "아니,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서 자고 가요. 밤이 너무 깊었어요." 지선이 승혜를 일으켜 세웠다. 승혜가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지선이 승혜의 한 쪽 팔을 잡고 침착한 걸음으로 현관 쪽 으로 걸어갔다. 승혜가 비척비척 지선의 뒤를 따랐다. 두 여인은 곧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현관 댓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 배를 피워 물었다. 안에서 두 여인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준호 엄마인 건 분명하지만, 준호 아빠와 나는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지선의 목소리였다. 계속해서 지선이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나도 여잔데 그걸 왜 모르겠어요. 그 쪽에서 간절히 원한 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물러설 수 있어요. 아가씨의 마음이 진정 으로 저 사람을 원한다면 언제든지요. 솔직히 나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남자니까요. 하지만, 아가씨는 아가씨의 앞날이 있을 테고, 얼굴을 보니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긴 것 같은데, 글쎄 나는 잘 모 르겠어요, 이럴 때 내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 건지……. 그래 요, 정 보고 싶으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으면, 두 사람이 밖에서 만날 수도 있잖아요? 나는 그런 거 상관 안해요. 마음이 야 편치 않겠지만 나는 상관 안해요.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여기 는 준호가 있고, 또 나도 있고……" "죄, 죄송해요, 언니……." 승혜는 그 말 밖에는 참으로 대꾸할 말이 궁색했다.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내가 언니뻘이 되긴 하겠네요. 언니라 는 말이 거북하게 들리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아가씨를 위 해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어요. 정 잊을 수가 없으면 최선을 다 하세요. 준호 아빠가 꼭 내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언제부터인 가 그런 체념이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 게 되었어요. 농담이 아니에요, 나로서는 지금 아가씨에게 내 진 심을 얘기해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두 사람 이 서로를 간절히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는 물러설 수 있어요." "아니에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이곳에 나타 나지 않을 거예요. 아주 먼 곳으로 제가 떠나겠어요. 그만, 가겠 어요. 언니에게는 정말 죄송해요. 이제야 나를 제대로 알 것 같아 요." 그 말을 남기고 승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닥닥 술기운이 달아나기라도 했는지 곧은 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지선은 현관 밖에까지 배웅을 나오지는 않았다. 사장이 말없이 승혜를 산본 버스 종점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갔다. 때마침 빈 택시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다. "저어……" 하고 승혜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참 좋은 사람이네요. 그럼, 저 갈게요." 그리고 승혜는 택시에 올라탔다. 승혜를 태운 택시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사장은 우두망찰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 후 승혜에게선 전화 연락조차 없었다. 궁금하여 사장이 천 궁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아주 다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사장 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술잔만 뒤집다가 자정이 임박하여 집으 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열흘쯤 뒤 천궁을 찾아갔을 때였다. 승 혜는 자기 코너에 없었다. 승혜 대신 코너를 지키고 있는 미스 한에게 승혜가 부재하는 까닭을 물었을 때, "승혜 언니는 이제 여기 안나와요."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곳을 아주 떠난 건가?" 바보같이도 사장은 겨우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런 모양이에요." "어디로 떠났는지 물론 그것도 모르겠지?" "승혜 언니의 고향이 강원도 정선이라면서요? 떠나기 전에 자 꾸 고향 얘기를 하던데, 갔다면 혹 그리고 갔을 지 모르지요. 아 우라지강을 쳐다보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거던요. 그리고 참, 사 장님이 오시면 전해주라며 승혜 언니가 쪽지를 남기고 갔는 데……" 미스 한이 핸드백 속에서 승혜가 남기고 간 쪽지를 꺼내주었 다. 사장은 등을 돌린 채 승혜가 남기고 간 쪽지를 펼쳤다. 그리 고 뚜벅뚜벅 천궁 스텐드바를 걸어나왔다. 쪽지에는 사연이 아니 라 한 줄의 시가 적혀 있었다. --내 마음 나에게 없어 너에게 갔나? 그 후 사장은 가슴 깊은 골짜기에 승혜를 묻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지선이 집을 나갔 다. 역시 쪽지 하나 남기고. 지선이 남긴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건달은 타고나는 거라면서요? 마찬가지로 건달의 아내도 타 고나는 거라면서요?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건 달의 아내로선 함량 미달인 것 같군요.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옳았어요. 그걸 뼈저리게 느꼈으니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감이 순서겠지요. 하지만 이 세상 누구도 원망하지는 않아요. 물론 당신과 나 자신조차도. 준호가 잘 커준다면 한 때나마 우리 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오랜 추억으로 마음의 갈피에 간직 해 두겠어요.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 찾아오게 되더라도 당신이나 준호 곁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요. 이만 총총……. 며칠 후 사장은 준호를 다시 누이에게 떠넘겼다. 돌아오면서 사장은 다시는 세속의 사랑에 얽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모처럼 하늘도 맑게 개였다. 이 세상 연연한 사연을 훌훌 털어 버리고, 힘차게 창공을 날으는 독수리처럼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 서 좋았다. 8. 함정 가을이 을씨년스런 꼬리를 사리자, 기다렸다는 듯 스산한 겨울 이 성큼 진군해왔다. 차디찬 겨울 바람은 산본의 허허로운 벌판 을 연일 휩쓸고 지나갔다. 아직은 택지 조성이 시작되지 않은 상 태였다. 산본은 장악하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썰렁한 바람뿐이었 다. 그 바람의 틈서리를 비집고 불법 거래가 횡행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마치 조심스러운 고양이의 걸음 같았다. 한 겨울이 물러가고 새봄이 도래하면 주택공사 측에서 신도시 건설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할 것이란 정보가 떠돌았다. 투기꾼 거간꾼들의 움직임도 날로 민첩해지고 있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어떡하든 한 몫 챙겨야 한다는 조바심이 이놈 저놈의 궁둥 이를 달싹이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산본에 더 이상 불법 건축물이 들어서는 걸 막기 위해 공동 대 처한다고 사자회담에서 합의를 도출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약 속을 고지식하게 지키려면 백여 명에 달하는 졸개들을 거느리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법을 준수하기 위해 산 본 청년회를 장악하고 대책위원회란 간판을 내걸은 건 아니었다. 불법 행위를 막는 한편으로 스스로 불법을 자행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비밀스럽게 어둠을 이용한 불법 행위는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 었다. 때로는 시청의 책임자와 한통속이 되어 일을 치르기도 했 다. 산본으로 새로 이주해 오는 외지 사람들도 야밤을 이용하여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간 보스들의 집단적 반발이 있은 후 조직이 새로 정비되었 다. 불나비가 2인자로서 조직 전반을 관리하며 이끌었다. 그 밑에 중간 보스로 만두와 망치 그리고 뒤늦게 클럽에서 내려와 산본파 에 합류한 남욱이 포진했다. 외형적으로 조직이 다소 위축된 것 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조직이 얕잡아 볼 정도로 허약하진 않았다. 하지만 꾀보, 번개, 넙치가 빠져나간 공 백이 결코 작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 보스급으로 한둘을 새로 영 입하게 된다면 튼튼한 조직의 골격을 다시 갖추게 될 것이었다. "저어, 형님을 찾는 전화가 와 있는데 어떡할까요?" 대책위원회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는 장수원이 사장의 집무실로 들어와 아뢰었다. 장수원은 산본 지역의 청년회원이라기보다 이 제는 산본파의 충실한 일꾼이었다. 일처리가 빠릿바릿하고 또한 빈틈이 없었다. 만두와 몇 건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자기 몫을 솔 찮게 챙겼던 터라, 그렇지 않아도 해끔한 얼굴이 요즘은 더욱이 나 뺀질뺀질했다. "누구 전화데 그래?" 마침 소파에 앉아 사장과 밀담을 나누고 있던 불나비가 대신 물었다. 불나비는 거친 성품을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동장이 형님과 통화하고 싶다는데요." 장수원이 파리처럼 두 손바닥을 비비대며 허리를 굽신했다. "알았다, 내가 받아 볼테니 나가서 일 봐라." 사장이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에 네, 저는 그만 나가서 일 보겠습니다." 장수원이 아부끼 농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꾸물꾸물 뒷걸음 질쳐 집무실을 나갔다. "전화 바꿨습니다. 동장님이 어인 일입니까?" "오랜만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시장님께서 점심이나 함께 하자 시며 차회장을 찾으십니다. 이리로 오셔서 나랑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소? 차회장이야 승용차가 있지만 난 여지껏 십일호 자가용 뿐입니다. 공무원 생활 오래 해봐야 밤낮 요 모양 요 꼴입니다 그려. 허허허……" 동장이 수다스레 용건을 전하며 혼자 웃어젖혔다. 공무원 생활 로 닳고 닳아서인지 마음 속에 여우가 들어앉아 있는 표리가 매 우 부동한 사람이었다. "시장님이 웬 일로 점심을 다 내겠답니까?"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으나 까닭없이 거절할 수도 없어 그 렇게 물었다. "산본의 안녕을 위해 요즈음 차회장이 너무 고생을 하시니까 치사라도 하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닐까요? 자세한 내막이야 직접 만나뵈어야 알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간에 지금 곧 이리 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점심 시간도 다 되어가니." "그럼, 동사무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장님께는 내가 전 화를 넣어 차회장과 함께 곧 찾아뵙겠다고 연락을 취하겠소이 다." "아무려나, 잠시 후에 그리로 들르겠습니다." 사장이 먼저 전화기를 탁 내려놓았다. 맞은켠 소파에 앉아 전 화 내용에 귀를 열어놓고 있던 불나비가, "조심하십시요, 형님. 원체 교활한 녀석들이라 혹 함정을 파놓 고 기다리는지도 모르잖습니까. 만두가 며칠 전부터 벌이기 시작 한 돼지막 공사가 놈들의 귀에 들어갔을 지도 모르구요." 하고 걱정을 했다. "설마 함정이야 파놓았을라고. 후한을 두려워 하는 쫌팽이놈들 이라 간덩이가 붓지 않고서는 그럴 엄두를 못낼 걸." 사장이 여유를 부리며 대꾸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 펜대 굴리 는 놈치고 치사스럽지 않은 위인이 드무니까요." "설령, 함정을 파놓고 날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렇지. 건달이 함 정을 두려워 한다면 그 따위 쫌팽이들과 뭐가 다르겠니."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처신하겠습니까만, 왠지 마음이 찌뿌둥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 허담이 데리고 조용히 다녀올 테니 조직 이나 잘 건사해. 만두는 따로 불러 공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이르고." "그건 염려마십시요. 돼지막 공사야 만두가 귀신처럼 잘 해낼 겁니다." 사장은 허담에게 승용차를 몰게 하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불과 5분이 채 안되어 승용차는 동사무소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허담 에게 차 안에서 잠시 대기하라 이르고 사장 혼자 동장실로 들어 갔다. 동장 외에도 세 명의 낯선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는 체를 했다. 동장의 표정이 어쩐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사장은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꼬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사장의 표정이 무서운 탈처럼 일그러졌다. 동장의 안색이 납처럼 희끄무레하게 변하더니, "나는 다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하고 발뺌했다. 동장의 비굴해 하는 표정이 역겨워서 침이라도 칵 뱉어주고 싶 은 걸 간신히 참았다. 세 명의 사내가 날카로운 눈빛을 쏘며 사 장을 응시했다. 함정을 조심하라던 불나비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당신이, 산본 대책위원회 차회장이오?" 어깨가 딱 벌어진 땅딸막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그렇소. 당신네들은 누구요?" 사장이 되물었다. 땅딸막한 사내의 양옆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체격의 두 사내가 뚜벅뚜벅 사장에게로 다가서더니, 그 중의 하 나가, "우리는, 서에서 나온 곰이다." 하고 씨부렸다. 두 형사가 양쪽에서 점잖게 사장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 서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게 어때?" 사장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팔을 뿌리치고는, "경찰에서 내게 볼일이 없을 텐데?" 하고 목자를 부라렸다. "설마 볼 일이 없는데 여기까지 왔을라고. 잠시면 돼. 조사할 게 있으니 일단 서로 가자구. 우린 소란을 떨면서까지 당신을 연 행하고 싶지 않아." 땅딸막한 사내가 손에 든 수갑을 뱅글뱅글 돌리며 말했다. 언 제 도착했는지 전투경찰 십여 명이 동장실 안으로 들어서며 사장 을 에워쌌다. 순순히 오랏줄을 받으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고, 동장을 향해 화덕처럼 이글이글 타오르 는 눈빛을 쏘았다. 그랬더니만 동장이 허리를 굽신하며, "차회장께서 더 잘 아시다시피 공무원이 뭔 힘이 있습니까? 저 는 다만 이 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며 구차스레 변명을 늘어 놓았다. 사람을 속였다는 불쾌감보다 인생이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좋소, 무슨 일인지 일단 경찰서로 갑시다. 대신, 팔찌는 치우 시오." 그렇게 말하고 사장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형사와 전 투경찰들이 사장을 포위한 채 뒤따랐다. 동사무소 안마당에 엠뷸 런스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빠삐용 빠삐용 엠뷸런스가 약을 올리며 울고 있었다. 사장은 엠뷸런스에 실려 안양경찰서로 연행 되었다. 그들은 불문곡직 사장을 유치장에 처넣었다. 독방이었다. 사장이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고 1시간쯤이 지난 후 대책위원회 에서 상근하는 산본 청년회원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여 들어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산본 일대에 서식하는 투기꾼, 거간꾼, 복부 인들까지 세 대의 닭장차에 실려왔다. 불나비, 만두, 망치 등 중 간 보스들은 용케 자리를 피한 모양이었고, 행동이 굼뜬 남욱을 비롯하여 스무 명 남짓한 조직원도 연행되어 왔다. 경찰서 유치장은 난데없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장 통 안의 북쩍거림은 차라리 저리 가라였다. 수원지검에서 검사 4명이 전담반을 편성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유치장에 갇힌 예비 죄수들은 네 명씩 차례차례 검사 앞으로 불려나갔다. 초겨울이라 날씨가 여간 쌀쌀 하지 않았다. 독방에 혼자 분리된 사장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추위로 인해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함정에 빠져 결국 유치장 안 에 갇히게 되었다는 심리적 영향도 없잖았겠으나, 어쨌거나 세상 보다는 훨씬 추운 데가 바로 그곳었다. 새벽이 되면서 기온도 영 하를 뚝 떨어졌다. 차디찬 냉기가 뼛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젠장맞을, 대체 무엇이 어떻게 틀어진 게야!" 울분을 참느라 주먹으로 유치장 벽을 치면서 사장은 곰곰이 생 각을 굴려보았다. 대책위원회가 합법적 활동 공간을 확보한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연행이라니. 시청, 주택공사, 경찰서 측이 형식적으론 대책위원회를 인정하면서, 뒤로는 공모 하여 함정을 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뚜렷한 근거도 없이 일제 소탕령이 내려졌을 리 만무했다. 사장은 앞으로의 대책에 골몰했다. 청년회에 소속되어 있는 녀석들이나 졸개들이 엉뚱한 입놀림을 삼가해야 할 텐 데……. 언로가 차단되어 있는 현실이 무엇보다 염려되었다. 독방 에 갇혀 있으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사장이 검사실로 불려간 것은 새벽 4시쯤이었다. 다른 연행자 들의 조사는 대충 마무리가 된 상태인 것 같았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검사실로 들어가자 마자 사장이 냅다 소리쳤다. 억울함을 내세운 자위적 시위였고, 고분고분 취조에 임하지 않 겠다는 엄포였으며, 또한 심리적 우위를 선점하려는 주술적 자기 최면이기도 했다. 얌전하게 대꾸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사장은 경험으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담당 서기가 대번에 곱잖은 시선을 날려 사장의 위아래를 훑었 다. "씨벌 놈, 그렇게 쳐다봐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사장이 서기의 면상을 향해 상스럽게 말을 씹어뱉았다. 그때 사무실 안쪽 출입문이 열리고 담배를 입에 문 사내가 삐끔이 밖 을 내다보았다. 사장보다 서너 살쯤 더 들어보였는데 한 눈에 검 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사내는 검사실이란 간판이 붙 어 있는 그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사무실 안에 검사실의 집무실 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대책위원회 사무실 안에 사장의 집무실이 따로 자리잡고 있듯이. "임마, 조용히 자리에 앉지 못해!" 서기가 의자를 가리키며 사장에게 명령했다. "저 씨벌 놈이, 엇다 대고 반말 지껄이야. 검사 따까리라면 누 가 무서워서 발발 길줄 알고 헛좆을 세우고 짖어대니? 나를 비롯 해서, 산본 대책위원회 식구들을 몽땅 잡아들인 까닭이 뭔지. 그 걸 알아야 자리에 앉던지 유치장으로 다시 돌아가던지 할 것이 아니야, 짜슥아!" 사장이 눈에 핏발을 돋우며 서기를 노려보았다. "싸가지 없는 놈. 니는 애비 에미도 없냐? 제아무리 지랄을 떨 어봐야 여기선 안통해. 뛰어봤자 벼룩인 주제에 곧 죽어도 큰 소 리는……, 미친 놈!" "자넨 그만 입 닥쳐!" 검사가 서기를 향해 입막음을 한 뒤 사장에게로 눈길을 돌리 며, "당신이 산본 대책위원회의 차회장이오?" 하고 점잖게 물었다. "그렇소, 내가 차회장이오." "흥분하지 말고 자리에 앉으시오. 할 이야기가 있어요." 검사는 어디까지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대책위원회의 책임자 에 대한, 아니면 건달 보스에 대한 한시적 예우였을까. "할 이야기가 있던 조사할 게 있던 아무튼 좋소. 그 대신 한 가지 먼저 물어봅시다. 나 한 사람이면 충분히 족할 일을 가지고 왜 죄없는 대책위원회 식구들은 죄다 붙잡아왔소?" 사장이 검사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 서 부딪쳤다. "간단한 조사가 끝나는 대로 혐의점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훈 방조치할 작정이니, 그 점 차회장이 염려 안해도 될 거요." "좋소, 우선 커피 한 잔만 주쇼." 그리고 사장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검사가 대각선 방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방금 전까지 추운 유치장 독방에 머 물다 온 터라 아직도 몸이 으스스 떨렸다. 검사와 맞대결을 벌릴 때 벌릴더라도 따끈한 것으로 속을 좀 달래야 할 것 같았다. 검 사가 서기에게 눈짓을 보내자 서기가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서기가 자동판매기에서 뜨거운 커피를 뽑아 가지고 왔 다. 그러고는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듯 툭 건네며, "옛수, 나 원 참 드러서!" 하고는 투덜투덜 자기 자리로 돌아 갔다. 사장은 그러나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커피를 홀짝거렸 다. 그러면서 어떤 방법으로 검사의 벽을 뛰어 넘어야 하나 빠르 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커피를 다 마신 사장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꼰아물며, "검사 양반, 미안하지만 불 좀 빌립시다." 하고 잽 한방을 날렸 다. 검사가 빙긋 웃음을 띠더니 말없이 라이터를 켜 건넸다. 물론 졸개들처럼 지극히 공손한 태도는 아니었다. "날 연행해온 까닭이 뭔지 그것부터 좀 물어봅시다." 담배 연기를 검사의 면상 근처로 내뿜으며 사장이 잽 한방을 더 날렸다. "조사할 게 있어서." 검사의 대답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간단 명료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물어봅시다. 청와대 민원실은 물론 이곳 경찰서에도 네댓 차례나 내 발로 찾아갔던 사람이오. 산본 주민 들의 민원을 접수하기 위해서였소. 때문에 굳이 오늘처럼 위장 전술을 쓰지 않더라도, 신사적인 방법으로 나를 만나 필요한 사 항을 묻고 조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데, 사람을 유인하여 연행 해온 방법치고는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검사 양반, 당 신 눈엔 내가 내 땅 놔두고 도망칠 겁쟁이로 보였다, 그 말이 오?" 사장이 불미스런 방법을 동원하여 연행한 배경을 따졌다. "어떤 방법으로 연행했는지……, 검사가 거기까지 직접 관여하 진 않아요. 그거야 어찌 되었든 조용히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 소?" "조사할 게 있다며 강제 연행해 놓고 점잖은 체 말을 둘러치지 마시오." "좋아요, 내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 좀 나눕시다." 검사가 먼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사장은 검사를 따라 그 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검사의 제의를 거절한다고 해서 이제와서 그 어떤 명분도 이득도 없다는 걸 사장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은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서기가 앉아 있는 바깥 사무실보다 한결 정갈하고 훈훈했다. "차회장, 우리 사내답게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검사가 그렇게 운을 뗀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 사태는 검사의 단독 재량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란 점 을 우선 알아야 할 거요. 청와대로부터 직접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 말이에요. 차회장도 청와대 민원실을 찾아갔던 모양이나, 차회 장과 입장을 달리 하는 쪽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놓고 청와대 민 원실에 탄원을 낸 모양인데……. 그러니, 시에서도 강 건너 불구 경하듯 여유를 갖고 지켜볼 수 없는 사안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게다가 신도시 추진과 관련하여 산본 지역에서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로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소. 해서 하는 말 인데, 차회장이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차근차근 이야기해주기 바라오. 나는 그저 듣기만 하겠소." 검사의 태도는 매우 진솔해 보였다. 검사 자신이 신도시 개발 과 관련하여 아는 바 별로 없다는 고백도 사실 같았다. "좋습니다. 나 또한 검사님을 믿고 모든 걸 사실 그대로 말하 지요." 그렇게 말문을 연 사장이 신도시 개발과 관련하여 산본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열거하기 시작했다. "산본에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고, 자그마치 6만 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니, 시가 하나 새로 형성될 정도의 엄청난 공사가 아닙 니까. 그러니 이런 저런 잡음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일 겁 니다. 산본 지역의 원주민들은 소나 돼지를 키우면서 농토 및 비닐하 우스를 경작하며 살아가는 그야말로 번다한 세상 물정에는 좀 둔 감한 촌사람들입니다. 한데 그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곳에 새로 택지 조성을 한 다음 아파트 단지를 세우겠다는 게 신도시 개발 의 요체입니다. 그리고 집을 짓고 살던 사람에게는 아파트 한 채 를 분양해주고,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는 입주권 즉 딱지를 주어 보상하겠다는 게 시의 대책입니다. 문제는 보상이란 게 허울만 그럴싸하지 실상은 매우 비현실적 이란 데 있습니다. 평생 농사나 지어 먹고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 에 입주해서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아파트 주차장에 경운기 세워놓고 놀이터 옆에 소나 돼지를 키우면서 살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한 마디로 시의 보상책이 지극히 비상식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그 말입니다. 즉, 현실적인 이주 대책을 세워 다른 곳 으로 터전을 옮겨서 농사짓고 살 수 있도록 해준다거나, 그것이 정 어렵다면 허다못해 허름한 구멍가게라도 꾸릴 수 있도록 사후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한데, 그와는 반대로 관청에서는 산본 지역 일대를 무작정 개 발제한구역으로 묶어놓아 주민들의 사유재산권마저 침해하고 있 는 실정입니다. 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근 지역과 땅값이 적게 는 수십 배에서 많게는 백 배 이상 격차가 나는 게 오늘의 부동 산 시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같은 저렴한 시가로 땅값을 보상 해주겠다는 것인데, 어떤 시러배 자식이 있어 옳소 하고 관청의 정책에 박수를 보내겠습니까? 그런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개 발 정책 및 보상책을 성토하고, 순수한 생존권 보호의 차원에서 산본 지역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단체가 바로 철거대책위 원횝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니 만큼, 신도시 개발 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은 절대 아니고, 다만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는 수준에서 보상을 받아야겠는 자구책에서 결성된 단 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의 경우처럼 대책위원회 사람들을 현행범이나 사기 꾼 취급하듯 다루어서야 되겠습니까? 불을 끄려는 해결책이라기 보다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붓는 위험천만한 사태 수습 방안이라 고 심히 우려되는 바입니다."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아직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검사가 물었다. "투기꾼, 건달, 복부인 등이 상당히 들끓는다고 들었소만?" "그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산본의 엄연한 실상입니다. 이권이라 면 눈알이 벌게지는 투기꾼, 복부인들이 설쳐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일 겁니다. 대한민국의 사회구조가 그렇게 굴러가 도록 되어 먹었다 그런 말입니다. 한데,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 보 호 차원에서 결성된 대책위원회가 무슨 권한이 있어, 복부인은 산본에 들어오지 마시오, 투기꾼도 위험 인물이니 산본에서 떠나 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게중에는 주먹께나 쓴다는 건달들도 있 는 모양이던데, 우리 힘만으로 어떻게 내쫓습니까? 그건 대책위 원회의 노력만으론 불가능합니다." "대책위원회가 건달들과 한통속이란 정보가 있던데?" 검사가 눈을 치뜨며 정곡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질문 에 눈 하나 깜짝할 사장이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 모르겠으나, 산본 지역 주민 들을 죄다 불러놓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대책위원회가 줄곧 어떤 일에 앞장서 왔는지 소상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번거 롭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장과 결찰서장 그리고 주택공사의 사업장을 불러다가 물어봐도 단박에 알 수 있 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산본 지역의 안녕 및 질 서유지를 위해 자체 방범 활동까지 벌여왔습니다. 내 말이 믿기 지 않는다면 여기 그 증거 자료가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지요." 사장은 수첩에서 유인물 한 장을 꺼내 검사에게 내밀었다. 지난 번 시장, 경찰서장, 주택공사 사업장 등과 함께 작성한 합 의 문서였다. 그것이 결정적 효자 역할을 할줄 누가 알았겠으랴. 꼭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검사는 산본 문제를 '뜨거운 감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가능하다면 조용하게 산본 문 제를 처리하고 넘어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대책위원회가, 듣던 것과는 달리 그리 나쁜 단체는 아니구만." 검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했다. "커다란 잡음없이 산본 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오 히려 대책위원회와 같은 단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 다. 시청의 철거반이나 경찰측에서 한계를 느끼고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자체적으로 해내고 있으니까요." 사장이 마무리 펀치를 날렸다. "그렇담, 한 가지만 더 물어 봅시다. 대책위원회를 공식적인 단 체로 인정해 준다면 신도시 개발을 위해 적극 협조해줄 수 있겠 소? 더 이상 시끄러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오?" "물론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검사로서 충실할 따름이지 신도시 개발 과 관련해선 소상히 아는 바가 없소. 골치만 아프지 쥐뿔도 실속 이 없는 일이거든. 이봐요, 차회장. 앞으로 내게 긴밀히 협조해줄 수 있겠소? 중요한 사실은……, 산본 지역에 더 이상 잡음이 나 지않도록, 그리하여 청와대 민원실에 청원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 는 것이오, 아시겠소?" 검사가 타협점을 제시했다. "검사님의 지시라면 더욱이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장이 검사의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좋아요, 앞으로 피차간에 잘 해봅시다." 검사와 악수를 나누고 사장은 다시 유치장 독방으로 돌아갔다. 아침 8시가 임박해졌을 때 한 졸개로부터 파발이 왔다. 시청의 장반장이 진두지휘하여 새벽에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박살내 버렸 다는 비보였다. 순간 사장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아 치를 떨었다. 검사의 농간에 속없이 놀아났다는 자괴감에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혼자 독방에 갇혀 절치부심하고 있는데 검사실의 서기가 내려 왔다. "미안하지만, 나를 검사실로 안내해주시오. 따져볼 말이 있소." 지난 새벽에 거칠게 대한 전력이 있어 울화를 꾹 누른 채 부탁 했더니, "그렇잖아도, 검사님이 댁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신다며 불러 오라 합디다, 제에기!" 하고 검사실의 서기가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 그런 걸 따지거나 탓할 계제가 아니었으므로, 사장은 서기와 유치장 간수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검사실로 올라갔다. 검사의 집무실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설렁탕 두 그릇이 놓인 채 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시장할 텐데 식사나 합시다." 검사가 먼지 자리에 앉으며 사장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이보시오, 검사 양반! 가면을 쓰고 사람을 놀려대는 것도 유분 수지, 세상에 이러는 법도 있습니까?" 하고 뻣뻣하게 선 자세로 사장이 따졌다. 검사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갑자기 왜 그러시오?" 하고 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소식을 들었소. 시청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 대책 위원회 사무실을 박살내고 돌아갔다는 거요. 그러니 시청측과 짜 고 눈에 보이지 않는 쇼를 벌인 게 아니냐 그 말이오. 내 분명히 말해두지만 대책위원회는 불법 단체가 아니라 자치 단체요. 난 식사할 생각이 없으니 검사 양반이나 많이 드시오. 까맣게 속아 넘어간 내가 어리석은 놈이지. 흐흐흐……, 그만 유치장으로 내려 가겠소. 관청을 상대로 끝까지 투쟁할 테니 그리 아시오!" 불만을 토로한 사장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사를 드러냈다. "이봐, 서기관!" 검사가 들었던 숟가락을 내팽개치며 버럭 소리쳤다. "네, 부르셨습니까, 영감님?" 서기가 놀란 표정으로 검사와 사장을 번갈아 응시했다. "시장과 주택공사 사업장을 불러들여,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영감님!" 서기가 군소리없이 즉각 검사의 지시를 받들었다.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일에 착오가 생긴 모양이오." 검사의 언행으로 보건대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쓸어버린 건 시 청 철거반의 단독 소행인 게 틀림없었다. 사장은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던 게 아닌가 싶어 잠시 머쓱해졌다. 두 사람은 쑥스러운 기분으로 마주앉아 아침 식사로 배달된 설렁탕을 먹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나자 시장과 주택공사 사업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검 사실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마치 고양이 앞에 불려나온 쥐새끼 같았다. 아니, 유격훈련장의 조교 앞에 불려나온 어리삐리한 고문 관 같았다. "당신들, 대체 행정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검사가 두 사람을 향해 대뜸 언성부터 높였다. "대체, 무,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시장은 뭔 영문인지 알아야 핀잔을 듣더라도 억울하지 않겠다 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시장은 검사와 마주앉아 있는 사장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은연중에 애쓰고 있었다. 사장이 그곳 에 와 앉아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었다. 주택공사 사업 장은 더욱이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갸우뚱 머리를 까불 대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산본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철거한 사실이 있어, 없어?" 검사가 시장의 턱 밑에 칼끝을 들이대듯 다그쳤다. "사실은, 그, 그것이……" "그것이 대관절 어쨌다는 거야?" 검사는 자기보다 십여 년이나 연상으로 보이는 시장의 면전에 서 거칠게 반말을 내뱉고 있었다. 검사의 끝발이 저런 정도인가 싶어 사장은 새삼스레 놀랐다. "대책위원회 사람들을 일제히 소탕하시기에, 때는 바로 이때다 싶어, 기습적으로 철거를 강행하라고 지시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 것이 어째서 잘못 되었다는 건지, 저로서는 도무지……?" 시장이 새벽에 검사와 사장이 의기상투한 사실가지 알 리는 없었다. 시장의 이야기를 들은 사장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 었다. 칼침을 맞은 뒤로 한사코 뒷전으로 처지기를 주저하지 않 던, 시청 철거반의 장반장이 진두지휘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시장의 정세 판단과 뜻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중요한 사안을 사전에 언질 한 마디 없이, 시장 임의대 로 처리해도 되는 거요? 난 핫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 는 줄 알아요?" "……?" 어처구니가 없는지 시장은 대꾸를 못했다. "그리고, 이게 뭔 문서인지 시장이 설명을 좀 해봐요." 검사가 사장으로부터 건네받은 합의 문서를 시장에게 휙 내던 지며 소리쳤다. 합의 문서를 본 시장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했다. "이, 이것은…….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상황이 또 달 라졌다고 판단해서……" 시장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가따부따 말을 맺지 못했다. "이런 합의 문서를 작성한 건 사실이구만?" "네, 사실이긴 합니다만……" 검사가 이번에는 주택공사 사업장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고 사업장이 꾸벅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당신네들이 이래놓구선, 어째 뒷구멍으론 대책위원회 사람들 을 못잡아 먹어 안달방아를 찧었나 몰라. 사람들이 도대체 행정 을 어떻게 처리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가지가 여럿 달린 모양이 지, 스페아로?" "대책위원회란 데가 사실은……" 하다가 시장이 힐끔 사장을 곁눈질 하더니만 꼴깍 말을 삼켰다. "사실은, 뭐가 어쨌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어쩌면 시장은 곧은 행정 처리보다는 후한이 두려웠던 게 아니 었을까. "오늘 당장에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원상복구해주고, 앞으로는 서로의 실체를 인정, 상호 협조하에 다시는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시오." "네, 잘 알겠습니다. 대책위원회 사무실은 지시하신 대로 원상 복구해 놓겠습니다." "그럼, 나가봐요." 시장과 주택공사 사업장이 식음땀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잠깐, 제가 검사님 앞에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장이 두 사람의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 다음 연해 말했다. "지난 번 합의 사항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시청 측에서 또 다시 철거 용역업체를 불러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참에 철 거 용역업체를 산본에서 완전히 철수시켜 주십시요. 크고 작은 불상사만 발생했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 까. 물론 대책위원회에서 책임지고 합의된 사항대로 이행하겠다 는 전제 조건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사장은 검사를 등에 업고 완벽하게 산본을 장악할 속셈이었다. "차회장이, 책임지고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소?" 검사가 물었고 사장이 즉각 대답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할 시엔 어떤 불이익이나 법적 처벌도 감수 하겠습니다. 그 대신 지난 번 합의된 사항대로 철거 용역업체에 게 지불되던 월정액을 대책위원회의 차제 방범 활동에 지원해주 십시요." 사장에게는 철거 용역업체가 눈엣가시처럼 노상 껄끄러웠다. "좋아요, 시장의 생각은 어떻소?" 검사가 흔쾌히 사장의 제안을 수긍한 후 시장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아무래도 좀……" 하고 시장이 민적거리는 태도를 보 이자, "시장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요점만 말하세요." 검사가 어린 아이를 나무라듯 다그쳤다. "네, 알겠습니다. 지난 번 합의 사항대로 하겠습니다." "됐어요, 두 분은 그만 나가보세요." 시장과 주택공사 사업장이 먼저 검사의 집무실을 나갔다. "이제 오해가 다 풀렸을테니 앞으로 잘 해봅시다. 산본이 또다 시 시끄러워질 때엔 나로서도 오늘의 약속을 지킨다고 장담 못해 요. 신도시가 들어설 때까지 산본이 쥐죽은 듯 고요해지도록 최 선을 다하라 그 말이오, 아시겠소?" 검사가 이번에는 사장을 향해 못을 박았다. "좋습니다. 약속을 꼭 지키지요." 사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검사실을 등졌다. 불법을 저지른 혐의가 밝혀진 일부 투기꾼, 복부인들을 제외하 고 나머지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풀려나왔다. 일주일 정도 공사를 벌인 끝에 대책위원회 사무실은 더 크고 반듯하게 복구되었다. 시청 측에서 일방적으로 끌어들인 철거 용 역업체도 산본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대책위원회를 가장한 산본 파의 주도하에 철저한 자치 활동을 이루어졌다. 용역 업체에 지 불되던 금액이 고스란히 산본파의 활동비로 떨어졌다. 그 무렵을 전후하여 또 이런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었다. 허종묵이란 건달이 예닐곱 명의 똘마니를 거느리고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한갓 동장이 던진 투망질에 걸려 사장이 안양경찰서로 연행되기 사나흘 전쯤의 일이었다. 어디에서 누구 에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허종묵은 대책위원회의 내막을 매우 소 상히 알고 있었다. 허종묵은 하안동 철산리가 철거될 때 한 몫 잡았다는 이야기를 묻지도 않았건만 혼자 떠벌였고, 신도시 공사가 착수되면 자동적 으로 상가가 들어앉을 텐데, 일찌감치 상인동우회를 결성하여 그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 보는 것이 어떡겠느냐는 제안을 내놓았 다. 요컨대, 신도시 상인동우회 결성은 자신이 나서 주도할 작정 인데, 그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기엔 자기 조직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니, 대책위원회 측과 동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난 동업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야." 사장은 허종묵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허종묵 이, "덮어놓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 잘 계산해 본 다 음에 차차 결정하도록 합시다. 내 조만간에 한번 더 들르겠수다." 하고 씨부렸다. "일 없으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게야. 더 러운 꼴 당하기 싫다면 말야." 사장이 위압적으로 거듭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허종묵 을 따라온 똘마니 하나가 같잖게도 목자에 핏발을 세우며, "어따, 그러지 말고 같이 좀 묵고 삽시다." 하고 빈정거렸고, "피차 협력해서 나쁠 것이야 없잖소. 잘 나가고 있을 때 부탁 좀 합시다, 잉." 또 한 놈의 똘마니가 아니꼽다는 듯 히잉 콧방귀를 뀌었다. 사장은 그러나 허종묵 일파의 수작을 묵살한 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도 더는 군소리를 보태지 않고 조용히 사무실을 떠 났다. 그런 일이 있고 열흘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새로 복구한 사무실이 그런 대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일부 마무리 작업을 남겨둔 어름이었을 것이다. 사장이 집무실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 려왔다. 대책위원회 총무 장수원이 헐레벌레 뛰어들어와, "형님, 큰일 났습니다. 지난 번에 찾아왔던 허종묵이란 놈이 덩 치들을 스무 명쯤 거느리고 와서 형님을 뵙자는데요?" 하고 보고 했다. 장수원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허종묵이 덩치들과 함께 우르 르 사장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산본파 조직원들은 마침 외출한 상태였고, 청년회의 조무래기 일꾼들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 였다. 비좁은 공간에서 사장 혼자 스무 명 남짓한 덩치들을 상대 하기엔 무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때를 기막히게도 맞추어 찾아왔군.' 사장은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허종묵을 일단 소파에 앉도록 권 했다. 불청객이긴 하나 찾아온 손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허종묵이 자리에 궁둥이를 걸치자 그 뒤쪽에 덩치들이 떡 버티고 섰다. 지난 번처럼 결코 호락호락해 뵈는 태도가 아니었다. 힘을 과시해서라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는 듯했다. 사장의 집무실 책상을 구둣발로 툭툭 차대는 놈, 껌을 질겅질 겅 씹으며 사장을 꼰아보는 놈, 팔뚝만한 줄로 객없이 손톱을 솔 질하는 놈……. 하나같이 시비조의 행태를 은근슬쩍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이제 봤더니 허사장 순 깡패로구만.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이 곳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대변해주는 곳이지, 깡패들이 설치는 데 가 아니야. 똘마니들을 수두룩하니 데리고 나타난 걸 보니, 허사 장 겁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구만." 사장이 어글어글한 눈을 치뜨며 허종묵의 비위를 긁었다. "뭐요? 거 말 조심하쇼." 똘마니 하나가 입아귀를 씰룩거리며 허종묵의 편역을 들고 나 섰다. 집무실로 들어설 때부터 껌을 질겅질겅 씹던 녀석이었다. "너 이 새끼, 껌 뱉지 못하겠어!" 쩌렁 하고 얼음판이 갈라지듯 사장의 차가운 외침 소리에 실내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쪽수에 위축되어 기선을 제압당하 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 뻔했다. "뭘 믿고 큰 소리야. 저걸 그냥……!" 똘마니 하나가 사장에게 덤벼들 기세이자, 허종묵이 한 손을 치켜들며, "조용히 못해!" 하고 만류했다. "열흘쯤 시일을 주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소, 그 동안 생각 좀 해보았소?" 허종묵이 건달 두목다운 여유를 부리며 사장에게 물었다. "이봐, 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 성미야." 그러면서 사장은 허종묵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혼자였지 만 사장은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허종묵의 얼굴에 일 순 핏기가 가셨다. "그렇담, 피차 재미가 적을 텐데……?" 허종묵이 양미간을 찌푸렸다. 녀석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허종묵, 건달을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하고 사장이 허사장에 서 허종묵으로 그를 내리깔았다. 한 수 아래로 밖에는 인정해 줄 수 없다는 신호였다. "거 듣자 듣자하니 말을 점점 까실리게 하누만." 똘마니 하나가 허종묵을 대신하여 곤조통을 쳐들었다. "허종묵, 조용히 말로 할 때 돌아가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게야. 행여 몸 다친 후에 후회하지 말고. 떼거리만 믿고 공연히 수작 부리려다가 신세 망칠라!" 사장이 다시 한번 허종묵의 부아를 긁었다. 아무리 위험한 상 황이라도 똘마니를 직접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신사협정을 맺지 못하겠다 그거요?" "대체 몇 번 말을 해야 알아 듣겠나? 조용히 돌아갔다가 똘마 니들을 백 명쯤 모아 가지고 다시 한번 찾아와 봐. 내 입에서 다 른 말이 나가는가!" "이거, 말로 해서는 같이 일 못할 사람이네." 허종묵이 느물느물 웃음을 삼켰다. 그 웃음 뒤에 건곤일척의 전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허종묵으로선 섣불리 사장을 린치할 수 없었다. 수하에 조직원을 만만찮게 거느리고 있음을 알고 있거니 와, 당장에도 사무실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대기하고 있질 않은 가. 허종묵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청년회 회원들을 건달로 착 각하고 있었다. 사장은 품 속에 들어 있는 단검과 유사시의 퇴로를 동시에 염 두에 둔 채 겉으로는 태연자약했다. 이쯤 시간을 끌었으면 불나 비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 하고 속셈을 하면서. 한편, 허종묵 일파가 사장의 집무실로 밀고들어간 그 시점에, 재빨리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간 장수원은 급히 불나비를 찾았다. 사무실에서 삼십 여 미터 떨어진 공사 현장에서 불나비는 인부들 과 막걸리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조직원들이 합숙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따로이 집 한 채를 덤으로 짓 고 있었던 것이다. 불나비를 발견한 장수원이 부리나케 달려가 귓속말을 전했다. "뭐야? 놈들이 언제?" "방금 전에 불시에 들이닥쳤습니다." "그걸 이제서야 알리면 어떡하니?" 불나비가 장수원의 귀퉁백이를 쥐어박았다. "놈들이 들이닥치자 마자 곧바로 뛰어오는 길입니다. 후딱 가 보세요. 형님 혼자서 위험한 곤경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 다." 장수원으로선 아프다고 엄살을 떨 상황이 아니었다. "개새끼들, 지난 번에 곱게 돌려 보냈더니만, 기어코!" 두 눈에 불을 켜고 불나비가 사무실을 향해 돌진했다. 불나비가 대책위원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조바심을 치 고 있던 청년회 회원들이 일시에 일어서며 집무실 쪽을 가리켰 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불나비는 곧바로 집무 실 문짝을 열어젖혔다. 불나비의 오른 손에는 날이 선 외낫이 들 려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형님." 인사한 다음, 문 앞 쪽에서 팔뚝만한 줄로 손톱을 손질하고 있 는 놈의 목덜미에 외낫을 척 걸었다. 그러고는, "모두들, 꼼작 마. 움직이면 차례로 죽여 버린다!" 하고 엄포를 날렸다. 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허종묵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종묵, 이 개 놈의 새끼!" 불나비의 오른 발이 번쩍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만 몸을 일으 키는 허종묵의 가슴팍을 퍽 내질렀다. 아쿠, 허종묵이 공중으로 부붕 솟구쳤다가 사장이 앉아 있는 옆자리로 날아가 거꾸로 처박 혔다. 몸집은 유도 선수처럼 비대했지만 불나비의 몸놀림은 제비 처럼 날렵했다. 사장이 허종묵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냅다 벽 쪽으로 집어 던졌다. 프로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을 마치 로프 쪽으로 뿌려대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허종묵이 벽면에 쾅 머리를 부딪고 무척추 동물처럼 흐물흐물 주질러앉았다. 사장이 재빨리 품 속에서 단도 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졸지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하는 허종묵 의 똘마니들을 향해 오금을 박았다. "한 놈이라도 움직이면 날림 들어갈 줄 알어!"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허종묵이 도리머리를 해보이며, "우리, 마, 말로 합시다!" 비굴한 낯으로 사장을 쳐다보았다. "라이터 돌만한 놈들을 데려와 먼저 수작을 부린 게 누군데, 뭐 이제와서 말로 하자구?" 사장이 구둣발을 날려 허종묵의 턱을 강타했다. 허종묵이 소파 와 탁자 사이의 비좁은 공간으로 구져지듯 짜부러졌다. 그때 불 나비가 소리쳤다. "너희 놈들은 조용히 날 따라왓!" 한 놈의 목에 외낫을 건 자세로 불나비가 앞장섰다. 허종묵을 따라온 똘마니들은 두목이 그 지경으로 처참하게 당하자 기가 꺾 여 불나비의 명령에 따라 고분고분 사무실로 나가 이열 횡대로 늘어섰다. 덩치만 컸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허수아비들이었다. "허종묵, 대체 이유가 뭐냐?" 한 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자세로 사장이 물었다. "지난 번에 확답을 안주어서……" 허종묵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지난 번에 분명히 확답을 주었는데?" "그건 어디까지 일방적인 생각이고, 일이란 서로 협조를 해 야……" 주둥아리만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내 지역에서 함부로 간판 걸어놓고 활동하는 꼴 못본다. 너같 은 비렁뱅이와 동업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알겠나?" "상인동우회야말로 이권이 엄청 크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 러니 만큼 나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업입니다. 톡 까놓고 말해서, 나도 데리고 있는 애들이 있으니 무얼 해서라도 건사는 해야 할 게 아닙니까?" 어찌하다가 건달판에 허종묵같은 양아치가 끼어들게 되었는지, 사장은 속에서 울컥 핏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추세로 간다 면 건달판도 머지않아 끝장이라는 위기감도 들었다. 마음같아선 구둣발로 운신을 못할 만큼 작신작신 밟아버리고 싶었으나, 허종 묵은 그럴 가치조차 없는 졸장부였다. 사장은 건달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처음으로 서글픈 비애감을 느꼈다. "여긴 양아치들 이권 다툼하는 곳이 아니다. 너희들이 뭘 잘못 알고 찾아온 모양인데 대책위원회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일할 뿐 이다. 다시 한번 일을 방해할 시엔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 알았으 면 그만 애들 데리고 꺼져. 제발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다 알고 있는데 뭘 그러십니까? 방해하지 않고 조용조용히 추 진하겠습니다. 상인동우회 회장 자리도 겸임하면 될 게 아닙니 까? 내 욕심만 차리자고 이러는 게 절대 아닙니다." 허종묵은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했다. "시끄럽다! 하고 싶으면 내 힘으로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니깐 눔들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는다. 그만 지껄이고 제발 꺼져라." "나중에, 찾아뵙고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허종묵은 의외로 끈질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일 없다!" 사장은 그러나 일도양단하듯 구걸하는 그의 쪽박을 깨버렸다. 한편, 불나비는 사무실 구석에 허종묵의 똘마니들을 주욱 세워 놓고, 건달의 뽄대를 보야줘 말어 하다가 꿀꺽 참고는, "너희들 누구 밑에 있다가 저 쥐좆만한 새끼를 따라오게 됐 니?" 하고 물어보았다. 녀석들이 하나같이 시답잖게 보였던 것이다. 허종묵의 똘마니 들이 하나 하나 자기 족보를 뇌었다. 대부분 불나비가 알 만한 건달 밑에서 굴러먹던 떨거지들이었다. 고향 쪽의 후배들도 꽤나 되었다. 불나비는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러는 중 에 한 녀석이, "저는 목포에서 불나비 형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나서,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씨부려라, 이 놈의 새끼!" 하고 턱밑에 종주먹을 들이대었다. 그랬더니 녀석이 펄쩍 뛰며 한 술 더 떴는데, "이 판국에 제가 뭔 득을 보자고 거짓말을 씨부리겠습니까? 목 포의 불나비 형님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전라공화국 쪽에선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알아모실 정도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 형님이 흙 속에 뭍혀 있는 옥처럼 아직은 촌동네에 틀어박혀 운 신을 하잖아서 그렇지, 언제고 상경하면 서울의 한 지역은 순식 간에 손아귀에 넣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다시 그 형님 밑 으로 들어가 멸사봉공할 작정입니다." 갈수록 양양이라더니 떠벌대는 수작이 점입가경이었다. "그래, 그 불나비 형님이 언제쯤 서울로 올라온다든?" 녀석이 나부대는 꼴이 우습지도 않아 대꾸를 해주었더니,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론 조만간에 진출할 모양이던데요? 그렇 게 되면 이곳도 안전지대라고 보긴 어려울 걸요?" 하고 숭악을 떨었다. "엑끼, 이 놈아! 내가 바로 목포에서 올라온 불나비다!" 불나비가 녀석의 뺨따귀를 철썩 후려치며 소리쳤다. 순간 녀석 의 동공이 호랑이를 본 토끼의 그것처럼 확장되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형님?" 녀석이 두 손바닥으로 얻어 맞은 뺨따귀 부위를 어루만지며 물 었다. "그럼, 내가 네 놈처럼 거짓말을 씨부리고 있단 말이냐?" "아이고, 불나비 형님! 제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셋바닥을 잘 못 놀려댔습니다. 하지만,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불나비 형님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정녕 하느 님도 무심하지마는 않습니다요." 진심인지 내숭인지 녀석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은근슬쩍 눈 가에 제 침을 찍어 바른 것 같지는 않았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다. 내 이 바닥에서 십년 넘게 굴러 먹었지만 너 같은 놈은 오늘 처음 본다. 이름이 뭐냐?" "남들은 저를 가리켜 시라소니라고 불러주건만, 제 판단엔 아 직 거기에 훨씬 못미친다고 사려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와 편 달 부탁드리겠습니다요." 너스레를 떨어대는 폼세가 허담이와 막상막하일 것 같았다. 그 쯤에서 녀석과의 수작을 마감하고 허종묵의 똘마니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너희 놈들이, 대개는 고향 쪽 후배들이라 내 오늘은 그냥 돌 려보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하겠는데, 허종묵이 같은 쓸개 빠진 놈에게 빌붙어 살지 말고 웬만하면 고향으로 내려가거라. 건달 세계에서 손 탁탁 털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 보란 말이다.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무얼한들 못하겠니." 불나비가 모처럼만에 점잖은 말투로 놈들의 전도를 걱정해 주 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형님 밑에나 머물게 해주십시요. 저희는 이 세계가 아니면 마땅히 몸 비비적대고 살 곳이 없는 잡초들입 니다." 시라소니 운운한 녀석이 징징거리며 엉겨붙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짓이 아니었다. 한번 건달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자진해서 빠져나가는 놈을 발견하기란 가뭄에 콩나기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일반인들이 잘못 알 고 있는 것처럼 조직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 다. 양아치 무리라면 모를까, 그런 일로 건달 조직은 결코 보복을 가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오히려 온갖 좋은 말을 갖다붙이 며 새 삶을 경영해 보도록 타일러도 쇠귀에 경읽기이기 일쑤인 데, 건달로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이 좋다고 그러는 건지 알 수 없 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환쟁이에게서 붓과 종이를 빼앗고, 글쟁이에게서 원고 지와 펜을 빼앗고, 야구 선수에게서 글러브와 방망이를 빼앗고, 축구 선수에게서 아대와 스파이크를 빼앗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불나비는 그러나 허종묵의 똘마니들을 야멸차게 모두 내어쫓았 다. 때마침 사장의 집무실에서 나온 허종묵이 쫓겨가는 똘마니들을 데리고 어깨가 축 쳐져서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떠났다. 석양의 붉으스름한 잔광이 녀석들의 어깨 위를 쓸쓸히 빗질하고 있었다. 시라소니 운운하던 녀석은 한사코 허종묵을 따라가지 않겠노라며 발버둥쳤다. 불나비 특유의 불같은 성미가 발동하여 구둣발로 쪼인타를 조 지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쥐어박았지만 허사였다. 차라리 자길 죽 여달라면서, 끼둑끼둑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떠나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데는, 천하장사 이만기를 불러다가 들배지기로 메어다 꽂아도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엉터리 시라소니는 결국 그곳에 남아 산본파에 합류 했다. 스스로 불나비 형님의 따가리가 되겠노라며 기염을 토했으나 불나비에게 똥창을 걷어 차이고 폭싹 고꾸라진 다음부터는 그 말 이 쏙 들어갔다. 하지만 시라소니 운운하는 버릇은 여전했고, 다 른 조직원들과도 홀쩨 어울려 산본파의 짠밥을 꽤나 먹은 태를 금세 보였다. 도대체가 질정없는 녀석이었다. 9. 망치 그렇다고 해서 꼭 조직에 등한했다는 건 아니지만, 한편 생각 하면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도 볼 수는 없겠지만, 그즈음 망치는 유부녀들과 놀아나느라 사뭇 번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 다. 게다가 망치와 놀아난 유부녀가 한둘이 아니라 서넛은 족히 되 는 모양이었다. 꾀보가 과부와 놀아나던 이야기를 들은 후 눈에 불을 켜고 헌 계집을 찾아 헤매더니만, 마땅한 과부가 도시 걸려 들지를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유부녀 쪽으로 방향을 급선 회한 것 같았다. 그러자 망치의 낚시줄에 까불까불 엉덩이를 들 썩이며 유부녀들이 제법 걸려든 모양이었다. 내친 김에 하는 말이지만, 산본에 불어닥친 신도시 건설 바람 은 투기꾼, 협잡꾼, 건달, 사기꾼, 그리고 복부인들에게만 적용되 는 바람은 아니었다. 산본을 거점으로 생활하던 유부녀, 과부들의 가슴도 덩달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산본 일대에 온갖 유형의 사내들이 북적북적 들끓게 되자, 어느덧 여인네들의 치맛자락 안에도 바람이 동한 것이리라. 그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와 술과 돈다발이 새로운 바람의 흐름을 주도하는데, 어찌 여자가 따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거기에 유부녀, 논다니, 과부, 처녀 따위의 차별이 있을 것인가. 그 바람에 편승하지 못해 앞다 투어 간둥간둥 날뛰는 모습이 차라리 적나라한 실상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추세에 따라 어쨌거나 희희낙낙 한 세월을 만난 망치는 걸핏하면, "계집맛은 뭐니뭐니 해도 유기과처(有妓寡處)라, 유기과처!" 하 면서 희떠운 소리를 예사로 내뱉곤 했다. 유부녀 속살을 도적질하는 맛이, 강태공 붕어 입질하는 맛에 능히 결줄만 하였던지, 그 즈음의 망치는 입이 노상 함지박만큼 찢어져 있었다. "유기과처라니, 그거이 대체 뭔 소리니? 아이들 유괴범을 잡아 들이는 건 과학기술처의 소관이다, 뭐 그런 뚱단지 같은 깔깔마 당이니?" 하루는 만두가 제풀에 흥분하여 희떠운 소리를 늘어놓는 망치 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술이 근질근질한 망치에게 분위기 를 맞춰준 셈이었다. 지금은 조직을 떠난 꾀보나, 젊은 망치와는 달리, 무슨 영문인지 만두는 여자에 대해 도통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언제던가 사장이 너도 이제는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겠니, 하 고 걱정을 해준 적이 있었는데, 여자에겐 별로 취미가 없습니다, 하고 씨익 웃더니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꼭 여 자에게 무슨 포한이 맺혀 있는 사람같기도 했다. 클럽에 있을 때 에도 지천으로 쌔고 쌘 게 젊고 반반한 푼네미들었는데, 만두는 결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여자 쪽에서도 만두를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여자를 거부하 는 듯한 냄새를 풍겨대는데, 어떤 옥문 윗동네에 콩알없는 여자 가 그런 남자를 마음에 두겠는가. 여북하면 망치가, "형은 대체 고자요, 아니면 내시의 아들이요?" 하고 만두가 모 처럼 분위기를 맞추어 줄 때 흉을 보듯 대꾸했을까. "유기과처가 뭔 소리냐니깐 생뚱맞은 소리는……!" 만두가 곧 주먹이라도 휘두를 듯한 기세를 보이자, "알았어요, 알았어. 형이 궁금해 하는 모양이니 내가 공짜로 이 바구해 주지." 망치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서서히 운을 떼었다. "유기과처가 뭔 말인고 하니, 계집맛으로는 유부녀가 그 첫째 손가락이요, 둘째는 나붓나붓한 논다니 기생을 조지는 맛이고, 세 째는 과부와 더불어 질퍽하게 운우지정을 나누는 맛이요, 처녀는 생김새와 상관없이 그 맛이 현저하게 아랫질로 처지는 꼬래비 맛 이다, 뭐 그런 뜻이우." "각각의 맛이 어떻게 다르길래 대가리에 쇠똥도 덜 벗겨진 놈 이 그 따위 소리를 재잘거리니? 겨우 꺾어진 오십밖에 안된 주제 에." 하고 만두가 퉁그리자, "허어, 거 모르시는 말씀이우. 옛말에도 자세히 일렀으니, 모름 지기 오입장이에겐 여덟 가지 맛의 차이가 있느니라 했다우. 그 제일이 유부녀의 맛이요, 제이가 하님이요, 제삼이 과부요……" 하고 망치가 신바람이 동해 열거하는데 만두가 슬쩍 말허리를 잘 랐다. "하님이라니? 하느님도 씹을 하니?" "참 무식하기는……. 하님이란 하느님이 아니라 하녀를 가리키 는 옛말이우. 요즘은 하녀가 없으니 그 맛을 보기가 사뭇 어려운 세상이 되었지. 허나, 십수 년 전만 해도 부자집에는 식모라고 왜 있질 않았수? 아비도 건드리고 아들도 건드려 부자지간에 구멍동 서 되는 사례가 빈번하여 온 장안이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 그만큼 하님을 건드리는 맛이 예나 지금이나 제법 웃질로 쳐 주었던 게 사실인 모양이라. 어째 하나 구해다 드리리까?" "시끄럽다. 그 다음이나 읊어봐라." "까짓것 그럽시다. 그러니까, 네번째로 쳐주는 것이 기생 조지 는 맛이요, 제오는 첩을 거느리는 맛이요, 제육은 아다라시 처녀 건드리는 맛이요, 마지막 일곱째는 마누라를 상대로 의무방어전 치르는 맛이라우. 이제 좀 알겠수?" "모름지기 여덟 가지 맛이 있다더니 하나가 빠지지 않았니?" 만두가 기억력 확실하게 물었다. "정신도 좋수. 그 중 최고로 쳐주는 맛이 있다던데, 망치도 아 직은 그 맛을 보지 못해 알 수가 없수." "그것이 뭔데?" "미친년 엎어놓고 조지는 맛이라우." "미친 눔, 지랄하고 자빠졌네." "하기는 망치도 미친년 조질 생각은 없수. 그건 그렇고, 만두 형도 장차 여자를 다루려면, 유부녀를 어째서 계집맛의 으뜸으로 쳐주느냐,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할걸." "그렇게 잘 알면 어디 마음대로 더 지껄여 봐라." "그렇잖아도 내 시방부터 이바구를 펼칠 판이우." 만두가 혀끝을 놀려 입술에 침을 바른 다음 길래길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유부녀란 말 그대로 자가용을 굴리며 사는 여자라, 아랫도리 가 조금만 심벅심벅해도 하시불문하고 주장군을 받아들일 태세가 갖추어져 있거던. 옛말에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더 잘 먹더라고, 자가용 있는 년들이 다른 몽둥이 맛을 더 밝히더라 그 말이우. 게다가 막상 옷벗어 던지고 교접에 들어가면 갖은 교태를 연출하 는데 맛이 그야말로 왔다껌이라. 기왕지사 남편 몰래 서방질하는 건데 물불을 가릴 계제도 아니겠고. 또한, 밤낮 똑같은 밥에 똑같 은 건건이만 먹다가 오매불망 씽씽한 총각의 몽둥이 맛을 보게 되니 환장을 하고 덤벼드는 게라. 거 왜 사우나탕에서 보았듯이 망치 물건 하나는 끝내주잖수. 아직은 끓는 물처럼 정력 또한 펄펄 끓어넘치니 세상 무엇이 두 렵간디. 깐 놈의 거 년들이 원하는 대로 구석구석 팍팍 들쑤셔주 는 게지. 그러면 바닥에 깔려 달싹달싹 엉덩이 멧돌을 돌리면서, 자기야 너무너무 잘 한당, 자기야 너무너무 되게당, 하고 코맹맹 이 소리를 질러댄다 그 말이우. 그리고 결국에 가선 기인 세빠닥 을 늘어뜨리며 축 늘어지는 것이라우. 낯선 남녀가 만나 그 짓거 릴 하며 히히덕거린다는 게 도대체 뭔 놈의 조화 속인지. 내 참 알다가다 모를 일이 바로 그 짓거리라. 암튼, 그 과정에서 어떤 년은 허리를 활등처럼 위로 솟구치며 아흐아흐 신음 소리를 내뱉고, 그보다 반응의 강도가 다소 튀는 년은 아흥아흥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면서 제 머리카락을 아귀아귀 쥐어뜯기도 하고, 그 다음 단계의 반응 을 보이는 년도 필시 있게 마련이라, 깜북깜북 제 정신을 상실하 고는 말이 되는 소리인지 안되는 소리인지, 사람의 소리인지 악 귀의 소리인지 마구 섞어가며 지껄여대고, 또 그 다음 단계의 반 응을 보이는 년은 제 몸뚱이를 도대체 스스로는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는 듯, 후라이판에 콩 볶을 때 익은 콩 튀어오르 듯, 벌떡벌떡 몸뚱아리를 뒤틀면서 닥치는 대로 남자의 몸을 물어 뜯 고 꼬집어 뜯고 야단법석을 떨어대기도 한다우.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반응은 대개의 계집들이 약속이나 한듯 한결같은데, 꿈에 서 죽은 조상을 보았는지 사랑하던 영감이 골로 갔는지 부끄러움 도 잊은 채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내는 게라. 한데 참으로 이상스런 현상은 바로 그같은 순간에 남자들 역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우. 계집을 정복할 때마 다 느끼게 되는 그런저런 희열 때문에, 모르긴 해도 그와같은 정 복자의 욕망 때문에, 끝없이 그 짓거릴 하고 싶어 안달을 해쌓는 게 아닐까 모르겠수, 제엔장!" 그쯤에서 잠시 말을 중단하고 망치가 가만히 만두를 응시했다. 그러자 만두가 멍청한 표정으로 망치를 마주보았다. 망치의 이야 기가, 어디까지가 시실이고 어디까지가 구라인지 분간이 잘 안된 다는 표정 같았다. "왜 그러우? 내 하는 말이 통 믿어지질 않수?" 해서 망치가 물어보았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계속 지껄여 봐라." "그거야 뭐 어려울 것도 없지. 이왕에 꺼낸 이바구니까." 망치가 다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유부녀와 교접할 때는 뭐니뭐니 해도 스릴이 만점이라. 남 모 르게 숨어서 하는 짜릿한 맛에 취해 갖고는, 한번만 더 한번만 더 하다가 결국엔 손을 털지 못하는 도적놈처럼, 남의 시선을 따 돌리고 오로지 둘만을 위한 게임에 몰두한다는 것이 사람을 그렇 게 질감스레 만들 수가 없다 그 말이우. 다른 몽둥이에 환장한 유부녀들이 남편이나 주위의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비밀 리에 시간을 장만하느라 또 얼마나 죽을똥 살똥 노력을 기울이는 지 알기나 하우? 아마도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할 적에 그 반만큼의 노력만 들였 어도 개천에서 용났다고 난리가 났을 걸. 어쨌거나 노력한 만큼 성적은 올라간다고, 단 한번의 정사를 위해 사전에 무진무진 애 를 쓴 보람이 있어, 마침내 본게임에 들어갔을 때는 둘이 놀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라니까. 또한 두 몸뚱아리가 결합이 되 어 하나로 짝을 이루면 그때부터는 너 죽고 나 살기라. 본전을 뽑으려는 계산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모르겠 수. 허나, 무엇보다 유부녀가 좋은 것은 자기 실속만을 챙기진 않 는다는 점이야. 게다가 대개는 남자 쪽의 욕정에 대해서도 일가 견을 갖고 있게 마련이라, 자기가 만족한 만큼 남자 쪽의 충족감 을 위해서도 쓰비스가 그만이라는 게지. 어떤 면에서 보면 철저 한 기브 앤드 테이크라. 그렇담, 기브 앤드 테이크가 왜 좋으냐. 만두 형이나 나나 클럽에 있어 봐서 잘 알지만 빠순이 년들과 할 때는 어땠는 줄 알우? 누차에 걸쳐 느꼈던 바이지만 끝나고 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쪽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해. 분명 사 랑의 게임을 즐기긴 했는데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도대체 한 것 같지가 않아. 아마도 돈이라는 매개물이 가운데 낑겨 있기 때 문이 아닐까 모르겠수다. 서로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 으로 몸을 사는 일테면 섹스 거래가 아니우. 그래도 과부나 처녀 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게 이 바닥 논다니들의 공통된 주장이니 새겨 들으시우. 한편, 과부는 맛이 어떤 줄 알우? 본인이 너무 오랫동안 굶주 려서 그렇겠지만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너무 급급한 게라. 독한 과부에게 걸려 들었다가 쌍코피 터진 남자가 한둘이 아니라고 그 러더만 그 말이 아주 빈말은 아닌 듯싶어. 자기 욕심을 다 채우 기 전에는 남자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는 특징이 있거던. 그러 니 웬만한 남자가 아니고서는 견디어내질 못해요. 적어도 꾀보 형 정도는 되어야 궁합을 착착 맞출 수 있다 그런 말이라. 주도 권을 완전히 과부 쪽에서 쥐기가 십상이거던. 그와 반대로, 처녀는 우선 그 맛부터가 싱거우에. 대체로 남자 쪽에서 주도권을 잡고 애를 써야 하는데, 고생만 직사하게 하고 실속은 없는 편이거던. 반반한 처녀란 연애하는 기분에 사귀는 거지 본게임에 들어갔을 때는 그 맛은 대개 젬병이야. 바로 그렇 기 때문에 계집맛을 유기과처 순으로 꼽아주는 것이우. 어때, 이 제 만두 형도 여자에 대해 감히 좀 잡히는 것 같우?" 망치가 느물느물 웃음을 띠며 만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망치 로부터 질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아무런 잡소리도 보태지 않던 만두가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에잇, 드런 놈!" 하고는 툴레툴레 밖으로 나가버렸다. "별안간 어디를 가우? 변소에 가서 딸딸이라도 치게에?" 망치가 만두의 두통수에 대고 종작없이 약을 올렸다. "에잇, 숭악하고 드런 놈!" 만두가 힐끗 뒤돌아 보고는 곧 망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 날인가. 해가 꼬물꼬물 서산 너머로 꼬리를 감출 무렵,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꾀죄죄한 사내가 대책위원회 사무실 을 찾아왔다. 때마침 사무실 안팎을 어슬렁거리던 엉터리 시라소 니가 그 사내를 맞았다. "뭔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회장님은 방금 전에 출타하셨는데 요?" 사장에게 상의할 일이라도 있서 찾아온 선량한 주민이겠거니 지레짐작하고는 시라소니가 싹싹한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사내 가 붉으락 푸르락 표정이 돌변하더니만, 불끈 쥔 주먹을 시라소 니의 턱밑으로 들이밀면서, "망치라나 망치 좆이라나, 하는 인간 지금 어디 있어?" 하고 냅 다 고성을 질러댔다. "엥? 이 양반이 망치가 동네 강아지 이름인 줄 아나. 어째 함 부로 아가릴 놀려 남의 존함을 들먹이누?" 중간 보스의 별호를 들먹이는 사내가 시라소니는 우선 못마땅 했다. 감히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어디라고 찾아와 행패를 부리나 싶었고, 그런 놈일수록 따끔하게 된맛을 보여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 글쎄. 망치라나 망치 좆이라나……" 하는데 더이상 참지를 못하고 시라소니가 사내의 멱살을 바투 움켜쥐었다. 사내의 입에서는 역한 술냄새가 풍겨나왔다. "이 양반이 술이 췠구만. 겁대가리 없이 씨부리는 걸 보니." 시라소니가 박치기로 사내의 면상을 한방 받아버릴까 하다가, 대체 그 까닭이나 알고난 연후에 사람을 잡더라도 잡자 하고는, "별안간 망치 형는 왜 찾는 거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멱살을 붙잡힌 사내가 숨이 넘어가는지 목구멍을 켁켁 거리더니, "이거나 좀 놓아야 말을 하던가, 말던가……" 하고 엄살을 떨었 다. 해서 시라소니가 사내의 멱살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망치라나 망치 좆이라나, 그 놈의 좆대강이가 얼마가 크고 쎈 지는 내 모르겠으나, 우째 얌전한 남의 집 유부녀는 건드리느냐 그 기야, 딸꾹! 그래갖고 남의 가정을 풍지박산으로 만들어 놓아 도 되는 거냐 그 기야, 딸꾹! 대책위원횐지 소책위원횐지 하는 곳 이 주민들을 위하여 있는 기지, 죄없는 유부녀 겁탈하라고 맹글 어논 단체여? 세상에 대책위원회 놈들이 주민들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그 기야, 내 말은! 나도 이제 이판사판이야. 망치라나 망 치 좆이라나, 하는 그 놈의 좆대강이를 뽑아 버리든지, 내가 맞아 뒈지던지 한번 붙어보자 이 기야, 딱꾹! 알았으면 어서 망치 나오 라구 그래, 망치!" 듣고 보니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쉬이 짐작이 갔다. 망치가 요 즘 유부녀들을 제법 포식한다는 소문을 시라소니도 들어 알고 있 었다. 시라소니 역시 계집이라면 남못잖게 사족을 흐물대는 축이 어서 며칠 전엔가, "망치 형, 혼자만 잡숩지 말고, 헌 계집이라도 좋으니 남는 게 있으면 나 하나 안주실라요?" 하고 떼를 써보기도 했던 그였다. "이봐요, 아저씨. 흥분하지 말고 잠시 내 말을 좀 들어요." 시라소니가 잠시나마 망치에게 마누라를 빼앗긴 사내의 등을 타독타독 두드려주며 타이르기 시작했다. "여자와 쪽박은 자고로 밖에 내놓으면 깨진다고 하질 않습디 까. 한데, 쪽박이야 깨지면 쓸 수 없어 갖다 내버린다지만, 여자 동그라미 속에 다른 말뚝이 몇 번 들락날락 했기로서니 휘떡 내 다버릴 수야 있는가요, 인정사정이란 게 있는데……. 하기사 다른 말뚝을 몇 차례 심었다고 해서 여자 동그라미에 엄치 표가 나는 것도 아니니께. 게다가 아저씨를 보아하니 마나님 동그라미야 뭐 닳고 닳았을 터인데, 남의 말뚝으로 물꼬를 좀 막았기로서니 당 장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혹시나 또 알아요, 동그라미 속에 할랑할랑 질이 잘 들어서 아저씨가 직접 운전을 할 때 되려 수월 할는지. 유부녀 바람 타는 것쯤이야 이미 흔한 세상이 되어 버렸 고, 강물 위로 나룻배 한번 지나간 폭으로 치부하고 허허허 웃어 넘기면 그만 아니요. 뭔 난리가 난 것 마냥 술이 췌갖고 와서랑, 망치라나 망치 좆이라나, 나와라 한판 붙어보자 할 것까지야 뭐 없질 않겠소. 우선은 동네사람 알까 창피스럽고, 하늘 바라보고 침 뱉어 봐야 결국에 제 낯바닥에 떨어지는 격이지. 어째 내 말 이 틀리다요?" 시라소니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뭐라, 할랑할랑 질이 들어서 좋겄다구? 허허허 웃어 넘기면 그만이라구? 마누라 빼앗긴 남정네 심정을, 마팍에 피도 안마른 네 놈이 알기나 하간디. 에라이, 네에미 밑구녕 속에다 대가리를 처박고 거꾸러질 놈아!" 그러고는 사내가 크렁크렁 목울대를 가다듬더니, "퉤에!" 하고 시라소니의 면상에다 보기좋게 가래침을 갈겼다. 엉겹결에 봉변을 당한 시라소니가 제 자리에서 폴짝 뛰며, "이러언, 쳐죽일 화상이!" 하면서 박치기로 사내의 콧잔등이를 들이받았다. 사내가 비틀비틀 뒷걸음질치다가 콰당 하고 나자빠졌다. 코에 서는 주르르 콧피가 쏟아졌다. "온야, 그래 한판 붙어보자." 사내가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시라소니에게 덤벼들었다. "마누라 간수도 못하는 등신 주제에 뭐이 잘났다고 지랄이니, 어디 내 손 매운 맛 좀 봐라, 이 놈의 술주정뱅이 새에끼!" 가래침 한방에 격분한 시라소니가 두발장수로 부붕 솟구쳐올랐 다가 사내의 가슴팍을 기습적으로 강타했다. 그리하여 대책위원 회 사무실 앞마당에서 때 아닌 난투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아니, 난투극이 아니라 시라소니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뒤늦게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시라소니가 폭행을 멈추었 다. 그러고는 불나비에게라도 걸려들어 호된 추긍이라도 받을까 보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그 길로 줄행랑을 놓았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다른 졸개들과 청년회 회원들이 뛰어나 와 술이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내를 겨우 진정시켜 집으로 돌려보 냈다. 시라소니가 실없이 나섰다가 일을 크게 확대시킬 뻔한 사 건이었다. 다행히 사내는 다시 사무실을 찾아오지는 않았다. 술기 운을 빌려 한번 찾아와 분풀이를 하려다가 오히려 치도곤을 당하 자 기세가 꺾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너무 술이 취해 그 전 날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지 못하였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맨정신으로 돌아온 사내 스스로 망치를 찾아 분풀이할 생각을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 굳이 따지자면 마누라를 빼앗긴--아주 빼앗긴 것은 아니지만--자기 쪽에도 문 제가 있지 싶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내가 여북이나 못났으면 마누라가 젊은 남자와 희희낙낙 놀아나겠는가. 마누라의 속곳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자기 쪽에, 더 많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망치를 찾아왔던 사내의 마누 라가 이튿날 조용한 곳으로 망치를 불러내었다. 기다렸다는 듯 망치는 약속장소로 나갔다. 함께 놀아날 때와는 달리 여자의 행 색이 몹시 추레해 보였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으나 망치는 입 안이 썼다. "도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했기에 남편에게 꼬리를 밟혔어? 나 원 창피스러워서. 다시 한번 사무실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단 봐라. 그땐 두 년놈을 한꺼번에 끝장내버릴 줄 알아!" 망치가 주먹을 부르쥐며 으르딱딱거렸다. 유부녀와 놀아난 뒤 끝이 어찌하여 추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사 람처럼. "너무 그러지 말어, 자기. 자기 없으면 이제 난 어쩌라구. 그 놈의 술주정뱅이가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나도 요즘 시달림을 받 느라 죽을 맛야. 난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뗐으니까, 자기도 그 렇게 알고 잘 대처해." 여자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시끄러!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일랑 말어. 여자가 처신을 깔 끔하게 했어야지, 왜 죄없는 나에게까지 불똥이 튀게 만드는 게 야." 망치가 울분이 삭지않아 씩씩거렸다. 어제 마침 사무실에 없었 기에 망정이지 여자의 남편과 맞닥뜨리기라도 했으면, 졸개들이 보는 앞에서 그게 무슨 개망신인가, 생각만 해도 오싹 소름이 돋 을 지경이었다. "몰라 몰라, 자기가 그렇게 나오면 난 어떡하라구?" 여자가 징징거리며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마구 지껄여대기 시 작했다. 여자가 주절거리는 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망치는 왠지 추접스럽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꼭 벌레 씹은 기분 이었다. 언제 서로 살을 섞으며 희희낙낙했는지 긴가민가할 지경 이었다. 여자의 남편되는 사내는 막일꾼인데, 어디서 누구에게서 귀띔 을 받았는지 요즘엔 툭하면 일도 나가지 않고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인다고 했다. 여자는 남편되는 사내와 일곱 살인가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런데 여자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는 습성 때문인 지 남편되는 사내 쪽에서 몇 년 전부터인가 슬금슬금 잠자리를 멀리했다는 것이었다. 하여 여자는 밥맛을 잃듯 사는 재미를 상 실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망치와 같은 싱싱한 총각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임자를 잃었던 물꼬에 색다른 몽둥이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게 되니 자연스레 살 맛을 되찾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들어와 남편이 밤이면 전에 없이 갖은 정성 을 쏟아부으며 여자의 몸뚱이를 달구어주는 것인데,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로 헥헥거리며 그 짓에 혈안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 랑의 행위가 아니라 애증에 찬 자기 학대 같더라고 했다. 아무려 나, 한창 몸뚱이가 달구어졌을 때, 남편이 쑤셔박듯 여자의 음문 속에 자기 주장군을 꽂고는 정신없이 풀무질을 해대다가,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동작을 딱 멈추고는, 물끄러미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본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오싹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영판 다른 사람의 얼굴같다고 했다. 하여 여자 쪽에서, 이 인간이 갑자기 왜 그러는가, 뭔 뜬소문이 라도 들었는가, 하고는 미치미치한 표정으로 남편을 살펴볼라치 면, "망치라나 망치 좆이라나, 그 놈과 할 때는 어떻더노, 이 년! 이렇게 팍팍 짓쑤셔 주더나!" 하면서, 또다시 미친 사람처럼 풀무 질을 해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자는 몸과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고 했다. 그 짓도 성가시게 느껴져 여자 쪽에서 자연 싫은 투정을 보이는 것 이었는데, 온야 내가 네 년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라는 듯이 남편이 두 눈에 쌍라이트를 켜고는, "이 년, 그래 젊은 사내 놈의 작대기 맛을 보니 어떻디? 근질 근질했던 속살에 불이 확확 나더노!" 하면서, 칼로 여자의 음문을 갈갈이 찢어버리겠다는 둥, 두덩 위의 터럭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확 싸질러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둥, 온갖 끔찍스런 욕설을 마구 퍼붓어댄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남편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고,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을 발하는 개의 눈을 볼 때처럼 섬뜩하니 무섬증이 돋 아난다고도 했다. "미친 눔!" 망치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무심결에 씨부렸다. 망치는 그 날 여자와 몸을 섞지않고 헤어졌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사 장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망치야!" "네, 형님!" "아무리 여자를 밝히더라도 그렇지. 유부녀는 가급적 건드리지 말아라. 남의 조용한 가정을 망가뜨려서 득될 것이 없거니와, 설 령 그렇게 되었을 때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잖니?" "네, 형님. 앞으론 유부녀와의 거래를 일체 끊도록 하겠습니다." "못난 놈!" 사장은 더이상 망치를 나무라지 않았다. 젊은 혈기에 그럴 수 도 있는 일이었으려니 하고 덮어 버린 것이었다. 그 날 밤 망치는 꿈에서 죽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죽음의 그 순간처럼 몹시 끔찍스러웠다. 머리 가 으깨지고 온몸에 선혈이 낭자하던 모습도 똑 같았다. 아버지 는 왜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일까? 길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망치는 소스라쳐 꿈에서 깨어났다. 등줄기에 식은땀 이 흥건했다. 꿈에서 깬 다음에야 귀신이 산 사람에게 형상을 보 일 때는 죽음을 맞이했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식은땀을 훔치며 망치는 문득 아버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버지는 결코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망치에게는 하나밖에 없던 좋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었다. 어린 시절의 망치는 군인인 아버지가 퍽이나 자랑스러웠었다. 그런데 어린 망치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아버지는 훌륭한 군인은 못되었 던 모양이었다. 망치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군복을 벗었다. 군복을 벗은 아버지의 모습은 몰라볼 정도로 초라했다. 흡사 헬렐레 군기가 빠져버린 졸병같았다. 한동안 아버지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허구한 날 들입다 잠만 퍼잤다. 군복을 벗을 당시 아버 지의 계급은 기껏 소령이었다. 하다못해 중령은 됐어야 최말단 부대의 부대장으로서 짚차라도 굴렸을 테고, 사회에 나와서는 어 지간한 직장에 터를 잡았을 텐데, 그만한 능력도 없었던 모양이 었다. 아버지는 위대한 군인에서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어 머니는 한숨만 푹푹 내쉴 뿐 무기력한 아버지를 덥석 일으켜 세 우질 못했다. 어머니는 부자의 딸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여자로서 생활 능력이 강하지도 못했다. 그저 착하고 순종적인 한 남자의 아내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지극히 소심한 여자였다. 반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벗하다가 아버지가 겨우 직장이라고 잡은 것이 서울 변두리 산동네의 예비군 중대장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군복을 입었다. 배운 도적질이 그뿐이라 다른 직업을 찾기 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아무튼 예비군 중대장이 된 아버지는 그 럭저럭 예전의 씩씩한 군인 기질을 되찾았다. 아버지는 우선 허위대가 좋은 사람이었다. "인물로만 치자면 장군을 해먹어도 아깝지 않다." 주위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소리를 망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 억하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는 타고난 호인이었다. 술도 좋아하는 편이어서 주위에 친구들이 자못 들끓었다. "정식 사관학교를 졸업했다면 장군은 몰라도 대령까지는 가볍 게 해먹었을 위인이야." 그렇듯 아버지의 전도를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 즐비했다. 나 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2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진급할 때면 항상 불이익을 받는 처지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여자에게도 인기가 대단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아가 씨 있는 술집에라도 가면, 술집 아가씨들이 다투어 아버지의 옆 자리에 앉으려고 잴글잴금 오줌을 쌀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은 어린 망치가 듣는 데서도 그런 소리를 아푸아푸 지 껄여대며 아버지를 부러워하곤 했었다. 그러나 여자에게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이 꼭 좋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는 여난에 시달리다가 끝내 인생을 망쳐버린 남정네가 무릇 기하이던가. 인간사를 잘 모르는 싱거운 남정네들 은 여난(女難)을 여복(女福)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아 버지의 친구 분들이 그런 경우였다. 여자에게 인기가 좋다는 것 이 결코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치인바, 여복이란 한 여 자를 상대로 오래고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말하고, 여난이란 온갖 여자에게 시달림을 받는 것을 말하니, 전도가 양양한 사람 에겐 매우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여난이었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불행이 싹튼 것은 그 여자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여자는 눈에 독기가 서려있을 정도로 무서운 미인이었다. 망치는 아직껏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그 여자보다 뛰어난 미인을 본 적이 없다. 그 여자는 어떤 술집에서 얼굴 마담으로 오래도록 머문 경력이 있다고 했다. 나이는 아버지보다 대여섯 살이 아래 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버지보다 열 살은 더 아래로 보였다. 그 만큼 미모가 출중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그 여자는 남자에 대한 독점욕이 매우 강한 성격상의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엔 이따금 만나 정을 통하는 관계였 다가 아버지와 그 여자는 기어코 살림을 차리기에 이르렀다. 하 여 아버지는 차츰차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 지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는 끙끙 앓기만 했다. 한 마디로 속수무책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여자였다. 어린 망치는 아버지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새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리 게 된 이후로 아버지의 얼굴을 대한 날이 기억에서 손꼽을 정도 였다. 그 전에는 매우 자상함을 보여주던 아버지였다. 아들인 망치를 무척이나 대견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런 점은 여느 보통의 아버지 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여자와 살면서 아버지는 잘 해야 한 달에 두어 차례 집에 들어오는 게 고작이었다. 부인이나 아들인 망치가 보고 싶지 않 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새 여자가 본집에 가는 걸 진저리를 쳐대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버지로 선 집에 아주 발길을 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새 여자에게 빠져 바람을 피우다가 급기야 딴 살림까지 차리게 되었을지언정 부인 이나 아들에 대한 정마저 퇴색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든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였다. 그러나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어머니는 세월이 흐를수 록 초췌하게 변했다. 아버지가 새 여자를 만난지 반년이 지나고 어느덧 한 해를 넘겼을 무렵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모습 역시 나날이 초췌하게 변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새 여자에게서 점차로 무서움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기 날 사랑해?" 아버지의 새 여자는 똑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사랑을 확인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 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한다. 건성으로라도 여자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얼굴에 손톱 자국을 만들기 위해 달려들 게 너 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앙칼지다 못해 표독스러웠다. 사랑 의 모습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사는 것 같았다. "날 사랑한다면 부인하고 깨끗이 이혼해. 그럴 수 있겠지? 그 래야지 나도 자기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게 아니야, 응?" 여자의 요구는 갈수록 그 강도가 세졌다. 아버지는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여자의 사랑이 두려 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인과 이혼하고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그 여자와 살 용기가 아버지에겐 없었다. 처음 한동안은 여자에 게서 사랑을 느끼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그 무렵엔 결코 그렇지 가 못했다. 어떻게 하다가 당신이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아버지는 암담했다. 아버지는 마침내 당신이 여난에 빠졌음을 알았다. 새 여자와의 만남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 어버렸다. "좋아,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까짓것 이혼하고 마누라와 끝장 내면 될 거 아냐!" 여자의 등살에 못이겨 아버지는 차마 해서는 안될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했으니 아버지의 심사도 편치는 않았으리라. 차일피일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새 여자에게로 아주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모 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새 여자가 정말이지 무서웠 다. 가능하다면 세상 밖으로 도망치고도 싶었다. 새 여자의 손아 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 다. 아버지가 민적거리며 도무지 이혼할 생각을 않는 것 같자 여자 쪽에서 최후 통첩의 기회를 잡았다. 부엌에서 생선의 배를 가르 는 날선 칼을 가져와 식탁 위에 쾅 꽂고는 여자가 아버지를 다그 쳤다. "부인과 이혼할 마음이 없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이 칼로 날 찔러 죽이고 부인에게로 돌아가라구. 둘 중의 하나를 분명히 선택해! 부인이야, 나야?" 여자의 눈에서 독기가 확확 뿜어져나왔다. "만약 날 찔러 죽이지 못하면, 그때는 자기가 내 손에 죽을 줄 알라구.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거야. 나도 이젠 지쳤다 구 지쳤어. 남자라면 결단력이 있어야지!" 여자가 사정없이 아버지를 몰아붙였다. 아버지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결단력을 발휘하기엔 여자가 너무 강적이었다. 평생 을 여자에게 쥐어 살 걸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렇다고 여자를 찔 러 죽이고 부인에게로 돌아가자니 후한이 두려웠다. 사람이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인다는 게 말처럼 쉽기야 하겠는가. 여자의 기를 작신작신 분질러놓기 위해 여러 차례 손찌검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긁어부스럼만 되었지 여자의 앙칼진 성깔은 도대 체 수그러들질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이지 그 여자를 찔러 죽이고 싶었다. 여자를 죽 이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찔러 죽였을 것이었다. 한데 여자를 죽이기 전에 여자가 먼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에 미치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 다. 실제로 여자와 함께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려 혼비백산 깨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로 마음을 달래며 현실을 잊어보 려고도 했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여전히 무서운 눈을 부릅 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만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욱 기 가 살아 설쳐댔다. 걸핏하면 식칼을 들이대며 둘 중의 하나를 선 택하라고 목을 조였다. 그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던 어느 날 이었다. 아버지는 술이 억병으로 취해 깜박 이성을 상실했다. 팔 뚝만한 몽둥이로 여자를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차마 식 칼로 찔러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늦은 밤 실신한 여자를 남겨두고 집으로 왔다. 여자와 갈라설 작정이었다. 그 날의 일을 망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한 것이 아니라 몹시 흥분해 있었다.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가 그 동안의 잘못을 용서빌었다. 아버지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천 성이 모질지를 못했다. 용서고 뭐고 아버지의 마음이 돌아온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옷자락을 부여잡 고 어머니 역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그 여자에게 가지 않겠어. 죽어도 이젠 돌아가지 않을 거야.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미친 사람처럼 당신의 머리를 콘크리트 벽면에 쾅쾅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의 질곡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는 듯. 그 여자가 머리를 산발한 귀신의 형상으로 집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버지가 그렇듯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였다. 망치는 아직껏 그토록 무서운 여자의 눈빛을 본 적이 없다. 그때 현관문 이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 비극이었는지도 몰랐다. 집안으로 들 어선 여자는 불문곡직 주방으로 내달았다. 그러고는 식칼을 찾아 들고 나왔다. 순간 어머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버지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멀뚱멀뚱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씩씩거리며 거실 의 가운데에 놓여 있는 탁자의 정수리에 퍽하고 식칼을 내리꽂았 다. "누가 죽던지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자, 이놈!" 여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더 니만 부스럭거리며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것이었다. 생사 를 초탈한 듯 그렇게 태연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린 망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아버지가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했다. 라이터를 켠 아버지가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 다. "네 놈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직접 저 년을 죽여줄까?" 여자가 식칼을 뽑아들고 이번에는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어머 니가 부들부들 떨면서 앉은자리에서 뒷걸음질쳤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아버지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열었 다. 베란다에는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이따금 집에 왔을 때 아버 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베란다를 이용했었다. 아버지가 베란다 의 바깥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쏴아하니 거실로 몰려 들 어왔다. 그때까지는 누구 한 사람 아버지의 행동에서 이상기류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행동이 그만큼 자연스러웠던 탓이리라. 아버지는 잠시 베란다 밖 어둠의 풍경에 눈길을 주는 것 같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것 도 같았다. 이윽고 아버지가 성큼 베란다 바깥 보호대 위로 올라 섰다. "안돼요, 여보!" 어머니가 목소리가 찢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버지의 뒷모 습이 홀연히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아버지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13층에서 지상으로 자유낙하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헐레벌레 베 란다로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렸다. 아버지는 자살함으로써 새 여자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 아버지의 새 여자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홀연히 떠나갔다. 어머니는 하루만에 정신이 돌아왔다. 한데 그 이전의 바른 정신 이 아니었다. 결국 어머니는 정신병원의 창틀 안에 갇히는 신세 가 되었다. 어린 망치는 집을 떠나 고아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망치 나이 아홉 살.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10. 배반의 끝 "형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나비가 사장의 집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평소의 불나비 답지않게 표정이 사뭇 무거웠다. "무슨 일이냐?" 사장이 뒤적거리던 조간 신문을 접어 탁자 위로 던졌다. 그 즈음 사장은 다시 서울에서 산본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재결합한 후 불과 삼 개월을 못견디고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자 리를 찾아 떠난 지선이나, 어느 날 불시에 종적을 감춰버린 승혜 에게선 일절 소식이 돈절했다. 아들 준호는 누이가 그럭저럭 건 사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사장은 혼자서 산본에 머문다는 게 어쩐지 궁상맞게 느껴졌다. 허담을 비롯해서 여러 졸개들이 불편 하지 않도록 수발을 거들었지만, 그들에게 소소한 부담까지 안기 고 싶진 않았다. "지난 번, 허종묵이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찾아왔을 때 말입니 다. 그 놈이 우리 조직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산본에서 벌이고 있는 비밀 사업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질 않았습니까?" 불나비가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우선 말문을 열어젖혔다. "그랬지." 사장이 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그리고, 허종묵이 두번째인가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똘마니들 속에 섞여 있던 놈 중에, 자칭 시라소니 운운하며 주둥팩일 놀려 대던 실없는 녀석이 산본에 남아 우리 조직에 합류하질 않았습니 까?" "그 놈은, 자네가 부러 눌러앉힌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사장이 히죽 웃었다. 건달 보스 생활을 오래 했으나 시라소니 처럼 엉뚱하고 종작없는 녀석은 실로 처음이었다. 외모부터 기생 오라비 뺨치게끔 생겨 먹었거니와, 하는 수작마다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아주 괴팍스런 녀석이었다. 또한 약방의 감초 마냥 무슨 일에든 안 끼어드는 데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장은 시 라소니란 녀석이 밉게 보이질 않았다. 심심할 때 불러다가 이야기를 시켜보면, 머리에 든 것도 많고 구라빨도 그럴싸할 뿐아니라, 거기에 유머감각까지 겸비해서 어 김없이 사람의 배꼽을 잡아뽑고야마는 특출난 재주를 갖고 있었 다. 건달 세계가 아니라 차라리 연예계로 진출했더라면 크게 각 광을 받았을 법한 녀석이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형님이 더 잘 알면서 시방 절 놀리는 겁니 까?" 불나비가 건성으로 항의한 다음, "아무튼 그 시라소리란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보에 따르면, 허종묵에게 우리 산본파의 내막을 속속들이 일러주고 그 뒤까지 보아주는 제3의 인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여 놀라지 마십시요, 형님. 그 놈이 바로 꾀보랍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꾀보가 변심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건 명백한 반역행위이 자 우리 조직에 배반의 칼을 치켜든 도전입니다." 순간 사장의 표정이 독사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으음……, 그게 믿을 만한 정보다 그 말이지?" 꾀보, 번개, 넙치를 떠나보냄으로써 그때의 일이 완전히 매듭지 어진 것으로 믿었는데, 그 불씨가 아직도 남아 있었더란 말인가. 사장은 난감했다. 불현듯 그 무렵 모주영감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 다섯 신하가 임금의 곁을 떠나되 하나는 후한을 남기 겠고 둘은 미구에 돌아오리라. 나머지 둘은 애당초 오랜 인연이 아니었구나……." 이럴 수도 있는가 싶어 사장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앞 일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훤히 내다보면서, 어찌하여 모주영감은 그 해결책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보태지 않았던 것일까? "시라소니란 놈이 워낙 종작없는 녀석이라, 남욱을 불러 꾀보 의 뒤를 캐보라고 넌지시 지시를 했더랬습니다. 한데, 어제 밤늦 게 서울에서 돌아온 욱이가 이러는 겁니다. 꾀보와 허종묵이 손 을 잡고 있는 게 틀림없는 사실 같다고요. 욱이의 뒷조사가 없었 다면 형님에게 제가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거나 한 때는 형님 밑에서 커온 중간 보스가 아닙니까, 꾀보가." "사실이면 사실이지 사실 같다는 건 또 뭔 소리야!" 사장이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욱이 성격이 원체 조심스럽질 않습니까. 그래서 말이 그렇게 나온 것 같습니다. 한때나마 한솥밥을 먹었던 정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르지요." "이제와서 정은 뭔 억어죽을 놈의 정……" 하면서 입술을 씰룩 거리다가, "죽일 놈!" 하고 지긋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데리고 있던 수하가 어느 날 칼끝을 돌려 보스를 겨냥할 때처 럼 낭패감에 휩싸이게 되는 일이 또 있을까. 건달에게 그처럼 치 명적인 상처는 따로 없을 것이었다. 사장은 끓어오르는 치욕감을 억누르기 위해 우두둑 두 주먹에 힘을 넣었다. 조직에서 하극상 이 벌어지거나 배반이 일어났을 때, 그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 면 조직과 보스가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 다. 그때 뒷처리를 너무 안이하게 했던 건 아닐까. 사장은 새삼스 레 후회하며 가슴을 쳤다. 그렇긴 하지만 사장으로서는 꾀보의 배반이 피해갈 수 없는 화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해갈 수 있 는 방법이 있었더라면 모주영감이 어떤 형태로든 언질을 주지 않 았을까. 대체 일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보스로서 아직도 자질이 부족한 탓인가. 그릇이 겨우 이 정도밖에 못된다 그런 말인가. 그래, 조직을 보다 탄탄하게 꾸리기 위해선 믿고 의 논할 새로운 인물이 있어야 할텐데……. 답답한 노릇이군. 스스로 지략과 덕망과 파워를 동시에 갖추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으 나……. 사장은 그렇듯 혼자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해 보는 것이 었으나, 금세 뾰족한 방안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조만간에 꾀보를 붙잡아 대령하겠습니다. 그때 형님이 직접 신문해 보시고 처리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불나비가 사장의 표정을 힐끔 엿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꾀보가 돌아서서 내 심장을 겨눌 줄은 몰랐군. 허나, 꾀보 곁 에 번개와 넙치가 포진하고 있으니 쉬이 납치해 오기는 어려울 텐데?" 사장이 비로소 두 눈을 뜨고 불나비를 응시했다. "그 점 염려하지 마십시요. 제게도 다 복안이 있습니다. 만두는 이곳 사업을 주도하고 있으니 어렵겠고, 망치와 둘이서 날랜 놈 으로 열 명쯤 특공대를 조직하여 꾀보를 형님 앞에 데려와 무릎 을 꿇리겠습니다. 욱이가 이번에 꾀보가 자주 드나드는 장소까지 탐색해 놓았기 때문에, 덮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수월하게 찾 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곳 일에도 소홀해선 안돼. 그만 나가보지." "네, 너무 마음 쓰지는 마십시요, 형님." 불나비가 사장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밤 불나 비와 망치는 십여 명의 특공대를 거느리고 꾀보가 터를 잡고 있 는 서울 동부 지역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사장은 머리도 식힐 겸 또 가본 지도 여러 날 되었고 해서 돼지막으로 올라가 모주영감 과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하늘에는 휘엉청 달이 밝았다. 차가운 겨울 보름달이 남쪽 하 늘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사장은 연신 술잔을 기울이면서 줄곧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머릿속이 햇살 속을 부유하는 먼지처럼 번잡을 떨었다. 새삼스레 지선과 승혜의 모습이 술잔 속으로 어른거렸고, 클럽을 떠나 산본에 정착한 이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휙휙 지나 가고 있었다. 사장은 떠오르는 상념의 잔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 듯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지금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주영감은 대체 어떤 위 인일까. 사장의 지혜로는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세상을 건너뛰어 혼자 유유자적 살아가는 달인인가. 꼭 그렇다고 볼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하면, 이 세상 중심에서 밀려나 하릴없이 빈 둥거리는 술꾼인가. 그것도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한때는 남의 관상이나 사주 따위를 보아주었다는데, 그렇다면 한갓 술사 인가. 작금엔 그러나 술사로서의 모습을 어느 한 군데에서도 찾 아볼 수가 없었다. 세상 비밀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는 절망적으 로 혼자 몸부림치는 이인인가. 아 세상 비밀이란 게 대체 무엇인 가.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모주영감이 침묵을 깼다. 사장은 눈을 떴다. "이런 저런 부질없는 상념에 얽매이다가, 문득 영감님 생각을 했습니다." 사장이 두 눈을 반짝이며 모주영감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하릴없는 늙은쟁이 생각은 해서 뭣에 쓰게?" "어느 날 다섯 신하가 임금의 곁을 떠나되 하나는 후한을 남기 겠고 둘은 미구에 돌아오리라. 나머지 둘은 애당초 오랜 인연이 아니었구나……. 언제던가요, 영감님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 습니다." 그러자 모주영감이 고개를 외로 꼬며, "허어, 내가 그런 소릴 지껄였더란 말이지? 허허허헛 참 허허 허헛……" 하고 공허하게 웃어젖혔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영감님." 사장이 바르게 고쳐앉으며 무언가 따져 물을 듯한 자세를 취하 자, "그만 두게. 그저 술이나 마시세." 하고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함께 술잔을 뒤집자는 제안이었으나 사장은 모주영감의 제안을 묵살한 채 마음 속에 들러붙어 있는 답답증을 털어놓았다. "제가 지금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중의 하나는 후한을 남기겠 고, 하는 부분입니다. 둘은 미구에 돌아오리라, 하신 말씀은 영감 님도 곁에서 지켜보았듯이 이미 실현된 바이올시다. 한데, 어찌하 여 염감님은……" 하는데 모주영감이 말꼬리를 잡아챘다. "어찌하여 그 방책은 일러주질 않느냐, 그런 말이겠지?" "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자네가 뭘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이상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어. 아니 내가 관여할 성질의 일이 아니라네." "그렇다면……?" "그렇지, 자네 일이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야지. 자네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거니와, 내 인생을 자네가 또한 대신 살아줄 수도 없지를 않은가." "……" "다만, 내 오늘 술 대접을 받고 했으니 한 가지 일러준다면, 이 번에 맞이한 후한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아주 마감되는 건 아니 라는 사실이야. 훗날에 다시 만나게 될 게야. 아암, 그런 날이 반 드시 올 걸세. 허허허……, 앞으로 이런 식의 대화를 가급적 피했 으면 싶구먼." "훗날 다시 만날 인연이라면……?"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자아 자 술이나 들자구. 허허허헛……" 거기서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졌다. 아니, 모주영감 쪽에서 대 화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셈이었다. 사장은 말없이 술잔을 뒤집으 며, 훗날 다시 만날 인연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 었다. "영감님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 이 요즘들어 자주 들곤 합니다." 사장이 푸념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마음이 문제지, 인간사 마음이 문제라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 마음이 얼마만큼 간절한지 내 잘은 모르겠으나, 불원간 에 그런 사람이 제발로 찾아올라는지. 허나……" 모주영감이 새삼스레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더니만, "우물의 안쪽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벽을 쌓아라. 밖을 향해 나아가기 보다 물러나 안을 견고히 지키는 것이 좋으리라. 두레 박이 깨어져 물이 샐 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하 고는 재빨리 술잔을 뒤집는 것이었다. 사장은 나무 망치로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하여, "무언가, 별로 좋지 않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고 모주영 감을 쳐다보았다. "조심하면 되지, 뭘. 욕심을 버리고 조심하면 되는 게야. 허허 허헛……" 모주영감이 무릎을 탁 치며 또 다시 공허하게 웃어젖혔다. 웬 일인지 전같지 않게 웃음이 빈번하다는 생각이 번득 머리를 스쳤 다. 사장은 그러나 그 까닭을 캐묻진 않았다. 그 날 밤이 너무 늦은 관계로 사장은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그 냥 산본에 머물렀다. 돼지막을 내려올 때 사장을 향해 던지던 모 주영감의 쓸쓸한 눈빛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부스럭거렸다. 한편, 산본에서 쫓겨난 꾀보는 번개와 넙치를 따라 서울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터를 닦았다. 번개와 넙치가 성장해온 주무대 가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정착한지 한 달만에 꾀보는 나이트클럽 두 곳을 수중에 넣는 수완을 발휘했고, 그리하여 일 단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자 번개와 넙치가 자청하여 꾀보의 수하로 들어와 함 께 둥지를 틀게 되었다. 어차피 한 곳으로 힘을 집중하지 않으면 언제 조직이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전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같 은 사실을 세 사람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건달 짠밥을 먹고 커 온 세월이 무릇 얼마이던가. 힘의 분산은 필연적으로 조직의 약 화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꾀보는 번개와 넙치를 조직의 중간 보스로 삼고 마침내 한 지 역의 보스로 일어섰다. 셋이 거느리고 있던 졸개들을 한 곳으로 합치니 수효가 얼추 삼사 십은 헤아릴 만했다. 점차로 세력을 확 장시켜 나간다면 머지않아 서울 동부 지역 전체를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로소 꾀보는 산본을 떠나와 독립하기를 잘 했 구나 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꾀보가 허종묵을 알게 된 것은 번개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허종묵은 수원과 안양을 거점으로 한 수안파의 2인자로 줄곧 성장해왔으나, 그 지역에 새로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신흥 조직에 세가 밀려 언제 쫓겨날지 모를 위기를 맞고 있었다. 허종묵이 받 들고 있던 보스는 그즈막엔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여 이제나 저제 나 뒷전으로 물러앉을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 다. 조직을 이어받을 2인자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을 때 보스의 말로란 그처럼 비참한 것이었다. 또한 수안파가 신흥 조직에 밀 려 기존의 거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는 건 허종묵에게도 문 제의 소지가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었다. 허종묵이 옛 친구인 번개를 찾아온 것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 기 위해서였다. 허종묵은 번개와 함께 건달 세계에 발을 들여놓 게 되었었다. 게다가 중학교 동창이기도 해서 까까중머리 시절부 터 뒷골목 불량배로 성장해온 배경 또한 두 사람의 공통된 전력 이었다. "쓰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참에 나랑 손 잡고 함께 뛰어보 는 게 어떻겠냐? 수안파 활동을 청산하고 내가 서울로 올라와 너 랑 결합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고, 아니면 네가 우리 지역으로 내려와 함께 그곳을 사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고. 으떠냐, 번 개 네 의향은?" 허종묵이 찾아와 제안한 핵심사항이 그러했다. "이 새에끼,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니? 안타깝긴 하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임마. 네가 아직 내 사정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조직도 이곳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러니 조직의 보스로 추대된 꾀보 형님의 의견을 들어보기 전엔 곤란해, 새꺄! 나랑 동급으로 조직을 관리하는 넙 치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에잇, 징그러운 씹당나구 같은 새에끼, 어쩌다가 이 지경이 돼가지고 찾아왔니, 엉?" 번개가 투덜거리며 난색을 보이긴 했으나, 옛 우정까지 저버린 언행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 번개야 우리 이렇게 하자. 너랑 같이 보스와 넙치를 만 나서 내가 직접 이야기를 꺼내보는 거야, 으떠냐?" 허종묵이 즉석에서 제안을 바꾸었다. "하아, 새에끼. 모처럼 만에 찾아와서 해골만 자꾸 복잡하게 만 드네. 하지만 어쩌겠냐, 우리도 점차로 조직을 확장해야 할 판국 이고, 일단 보스와 넙치를 만나 뜻이라도 비쳐봐야지." 그렇게 해서 꾀보, 번개, 넙치, 허종묵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 었다. 허종묵으로부터 수안파가 처해 있는 저간의 사정을 다 들 어본 다음 꾀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 시점에서 조직을 통합한다는 건 모험이 아닐까? 수원과 안 양 지역의 사정에 어두운 우리가 이제 막 터를 닦기 시작한 이 지역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허형이 이곳으로 올라 온다는 것도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고. 조직을 서로 통합하더 라도 어느 한쪽의 조직이 튼튼하게 지역에 뿌리를 박을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일단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셈이었다. 꾀보는 당대당 통합보 다는 흡수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번개와 넙치는 연 방 고개를 끄덕여 보스의 의견에 동조했고, 허종묵은 우울한 표 정이 되어 말을 잊고 있었다. 꾀보가 물었다. "허형이 데리고 있는 애들이 현재 얼마나 됩니까?" "많지는 않지만, 삼십 명쯤은 언제라도 동원이 가능합니다. 한 때는 일개 중대 병력까지 거느렸던 조직이었으나, 보스의 파워가 땅에 떨어지면서 졸개들이 하나 둘 흩어지게 되었어요." 중대 병력 어쩌구 한 허종묵의 말은 물론 과장이었다. 그때 꾀보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허종묵을 산본으로 침투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점이었다. 산본파가 대부분의 이권 을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인동우회 쪽은 아직도 무주공산 으로 남아 있어, 그걸 꿰차고 앉을 수만 있다면 훗날 조직 확대 를 꾀할 때 적잖은 자금줄이 되어 줄 것이었다. 꾀보가 상인동우 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은 산본에 머물던 시절 거간꾼과 복 부인의 입을 통해서였다. 제법 믿을 만한 정보임에 틀림없었다. 꾀보 쪽에서 수안파의 뒤를 받쳐주고, 허종묵이 그곳에 뿌리를 내려 산본파와 손을 잡게 된다면 일거양득이란 계산이었다. 산본 파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물론 헤게모니를 쥘 때까지의 위장전술 이었다. 그렇다고 꾀보가 사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그런 생각을 떠올 린 건 절대 아니었다. 목포에서 불나비를 끌어올린 건 분명 사장 혼자서 결정한 사안이었으나, 불나비가 중간 보스들과 사장 사이 에서 가교 역할을 제대로 했더라면 사태가 그런 지경으로 치닫지 는 않았을 것이었다. 꾀보는 물론 번개와 넙치도 불나비에 대해 선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허형에게 내가 기막힌 정보를 제공하리다." 꾀보가 산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은 사업과 아직도 큰 이권으 로 남아 있는 상인동우회 결성 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 고는, "수안파가 신흥 조직에게 계속 밀리는 추세라니, 이 기회에 훌 훌 손 털고 산본으로 들어가시오. 그곳에 일단 정착하는 데 성공 하면 뒷일은 내가 책임지리다. 조직의 통합은 그 이후로 미루어 도 결코 늦이 않을 겁니다." 하고 조심스레 허종묵의 의사를 타 진했다. 허종묵은 그러나 선뜻 감히 잡히지 않는지, "글쎄요, 그것이……?" 하며 민적민적 뒤를 사렸다. "그게 좋겠다. 우리 형님 말대로 우선 산본으로 들어가라. 새에 끼, 거기서 상인동우회란 광맥 하나만 꽉 붙잡고 늘어지면 되는 거야, 알겠냐?" 번개가 이때다 하고 허종묵을 부추겼다. "글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허종묵은 선뜻 자신감이 동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뒷일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산본에 있어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거점만 확보할 수 있다면 사업 추진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이번에는 넙치가 꼬리를 사리는 허종묵을 다독거렸다. 그랬음 에도 허종묵은 한동안 더 생각을 굴리며 계산하는 눈치더니, "좋소, 세 분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일단 추진해 보겠소." 하 고 수긍하는 것이었다. 하여 네 사람은 산본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놓고 오 랜 숙의를 거듭했다. 마침내 허종묵도 자신감을 얻었는지, "어떡하든 상인동우회를 손아귀에 넣도록 해보겠소."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비치게 되었다. 그 날 꾀보는 허종묵과의 결속을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네 사람은 밤이 이슥토록 술잔을 부딪쳤고, 그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허종묵은 서울 동부지역을 떠났다. 그가 산본에 무사히 침투하기를 기대하는 한편 꾀보는 다각도로 조직의 기반을 견고 하게 다지기 위한 방안을 검토했다. "하우스방을 몇 군데 장악하는 건 어떨까요?" 넙치의 제안은 의외였다. 그런데도 번개는 그 제안에 제꺽 찬 동하고 나섰다. "하우스방이라……, 거긴 건달이 좀체 손을 뻗치지 않는 곳인 데?" 꾀보는 선뜻 내키질 않았다. 넙치는 그러나 완강했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하우스방이란 포카, 도리짓고땡, 고스톱 따위에 목을 매고 살아 가는 노름꾼들을 위해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해 주는 곳이 었다. 알선비와 개평을 뜯어먹는 한편 자금을 날린 꾼들에게 고 리대금으로 뒷돈을 대주어 조기에 판이 깨지는 걸 방지하는 것도 그곳의 몫이었다. 밝은 세상에는 좀체 그 모습을 드러내잖는 사 회 이면의 어둡고 음습한 습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예로부터 건달은 노름꾼을 상대하지 않거니와, 하우스방을 운영 하는 업주나 그곳을 드나드는 꾼들을 양아치배 이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건드리지 않는 일종의 불문 율이 적용되는 지대였다. 꾀보가 새로 거점을 확보하고 조직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는 서 울 동부 지역은 특히나 하우스방이 많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 우스방 서너 군데만 수중에 넣을 수 있다면 조직을 운영하는데 적잖은 보탬이 될 터였다. 현금이 언제나 넘쳐나는 곳이었으므로. 하지만, 불문율을 무시하면서까지 하우스방을 장악한다는 건 어 쩐지 꺼림칙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꾀보가 그런 생각에 젖어 뜸을 들이는 기색을 보이자, "하우스방을 운영하는 놈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 는 조직 확장이 시급하다는 점입니다." 하고 넙치가 채촉했다. "그들의 약점이라면,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는 거겠지." 꾀보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물론입니다. 한데 몇 군데 하우스방에서 이번에 손을 털고 다 른 운영자를 물색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한두 군데는 조직 에서 직접 운영하고, 서너 군데의 하우스방을 장악하여 졸개들을 몇 명씩 투입해 놓는다면 짭짤하게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웬만하면 단안을 내리시죠?" 생긴 건 넙데데해도 두뇌 회전이 빠르고 정확한 넙치였다. 그 에 질세라 번개가 협공하듯 편역을 들고 나섰다. 번개는 생긴 건 얇삭해도 행동거지나 입성은 어지간히 거칠었다. "치사스럽긴 하지만 어쩔 겁니까. 조직을 키우기 위해선 무엇 보다도 자금줄이 확실해야 합니다. 기소가 튼튼해야 집이 무너지 지 않듯이 말입니다. 조속한 시일 안에 조직의 기틀을 다져야 할 현 시점에서, 밥이 차네 김치가 짜네, 투정을 부릴 계제가 아니라 고 생각합니다. 까짓것 나중에 다시 손을 터는 한이 있더라도 번 개 말대로 하우스방 몇 개 접수합시다, 형님. 기회가 번번히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씹헐좆도, 우선 손아귀에 넣고 보는 겁니 다." 두 중간 보스가 그렇듯 한 통속이 되어 침을 튀기는데, 무작정 꺼려할 수만도 없는 것이 꾀보가 처한 입장이었다. "그럼, 그 건은 넙치가 책임지고 실행에 옮기도록 해봐. 행여 다른 조직에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애들 입막음 잘 하고. 실 속도 중요하지만 건달로서 최소한의 체면치라는 게 있어야 하니 까." 꾀보로서도 단안을 안내릴 수 없었다. "그러죠, 하우스방만 손아귀에 넣으면 우리 조직도 외형상 졸 개들을 오십쯤은 넉근히 거느릴 수 있을 겁니다." 넙치의 자신에 찬 말이었다. "그 동안 번개는 나랑 캬바레 쪽을 알아보자구. 참, 텍사스촌은 어때? 듣자하니 요즘 성업중인 모양이던데?" "캬바레 쪽은 몰라도 텍사스촌은 시기상조라고 판단됩니다. 업 주들이 똘똘 뭉쳐 있을 뿐아니라,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조직의 세가 아직은 막강합니다. 내가 알기로도 그쪽 놈들이 터를 다져 놓은지 꽤 오래되어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으흠……, 하지만 언젠가는 다 먹어치워야 하지 않겠어?" 꾀보는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는 것이었다. 하우스방 공략은 넙치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사 업을 추진한지 보름만에 한 곳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고, 서너 군 데를 더 손아귀에 넣어 현금 조달이 용이한 터전을 갖추었다. 그 것은 누가 뭐라든 넙치의 수완이었다. 넙치는 결코 만만하게 보 아넘길 상대가 아니었다. 넙치의 성공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술을 마시면서도 꾀보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 넙치를 굴복시 킬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넙치가 충직한 부하로서 오래도록 충성을 맹세한다면 그보다 속시원한 일은 당장엔 없을 것 같았 다. 번개도 아직은 넙치와 더 가까운 편이었다. 우선 번개부터 확 실한 수하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꾀보는 둘의 사이를 적절한 시 점에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긴장을 놓치고 있다가는 언제 넙치에게 주도권을 빼앗길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넙치 수하에 는 막강한 특공대원들이 네댓 명이나 포진하고 있었다. 그런 걱정 때문인지 꾀보는 술이 별로 달지 않았다. "이쯤에서 난 먼저 일어날 테니, 양껏들 마시라구." 넙치와 번개에게 이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들어가서 쉬십시요." 넙치가 앉은 자리에서 인사했다. 번개는 그러나 입구까지 따라 나오며, "조심하십시요, 형님. 우리 조직을 노리고 있는 놈들이 혹 있을 지 모르니까요." 하고 일부러 걱정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내 걱정일랑 말고, 오늘은 넙치 기분이나 잘 맞춰줘라." 그 말을 남기고 꾀보는 술집을 떠났다. 꾀보가 탄 차가 큰 길에서 우회전하여 좁은 골목길로 마악 들 어섰을 때였다. 칠팔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차를 막아섰다. 밤이 제법 늦은 시간이라 골목길을 지나가는 행인은 별로 눈에 뜨지 않았다. 설령 행인이 있었더라도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 하고 우회하여 돌아갔을 것이었다. "기습인 것 같습니다, 형님. 그냥 밀어붙일까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졸개가 힐끗 꾀보를 쳐다보았다. "아니다, 차를 세워라!" 졸개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자 차가 시나브로 미끄러지면서 이 윽고 정지했다. 꾀보가 문을 열고 성큼 밖으로 나섰다. 취하여 비 틀거릴 정도로 술을 마신 상태는 아니었다. 칠팔 명쯤은 혼자서 도 넉근히 해치울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한 조직 의 보스가 된 마당에 기습조의 벽에 부딪쳐 꽁무니부터 사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건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기라 는 게 있었다. 꾀보가 뚜벅뚜벅 놈들에게로 다가가 너댓 걸음 앞 에서 멈추었다. "웬 놈들이냐?" 꾀보가 희미한 어둠을 배경으로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는 기습 조를 향해 날림을 하듯 쏘아붙였다. 그러자 기습조 속에서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순간 꾀보의 표정이 차 갑게 얼어붙었다. "오랜만이다, 꾀보. 조용히 데려오라는 형님의 분부를 받고 왔 다." 그렇게 말하는 사내는 분명 불나비였다. 그때 꾀보는 검은색 싱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이 가만히 위로 올라가는 듯 싶더니만, 어느새 상의를 벗어 차량이 정차해 있는 쪽으로 휙 내 던졌다. "꾀보,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을 텐데……?" 그러면서 불나비는 천천히 담배를 피워물었다. 꾀보가 상의를 벗어던졌다는 것은 전투에 임하겠다는 뜻이고, 불나비가 담배를 피워문 것은 특공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꾀보를 공격해도 좋다 는. "꾀보, 네가 형님에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불나비가 담배 필터를 질겅질겅 씹으며 씨부렸다. "그만, 입 닥쳐라, 불나비!" 그와 동시에 꾀보의 육중한 몸이 새털처럼 가볍게 어둠 속으로 솟구쳐올랐다. 꾀보의 두 다리가 공중에서 전지 가위처럼 쫙 벌 어지며 불나비의 턱을 향해 날아갔다. 불나비가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비켰으나 전광석화같은 꾀보의 발끝이 왼쪽 늑골을 스쳤 다. 그 바람에 불나비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 다. 흠칫 놀란 불나비가 신속히 공격자세를 취했다. 불나비의 인 상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찌그러졌다. 싸한 통증이 왼쪽 늑골을 훑고 지나갔다. 꾀보의 솜씨가 그 정도로 예리할 줄을 불나비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불나비가 고양이처럼 사뿐 뒤꿈치를 들고 꾀보를 향해 접근했다. 그때를 기하여 기습조 특공대들이 대열을 갖추며 우르 르 꾀보를 에워쌌다. 포위망을 구축한 다음 여차하면 벌떼 공격 으로 대응할 작전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만한 일에 기세가 꺾일 꾀보는 아니었다. "겁대가리 없는 새끼들. 좋다, 한꺼번에 덤벼라!" 꾀보가 다시 선제 공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세 명의 특공대가 꾀보의 주먹과 발길질에 나가 떨어 졌다. 특공대의 대열이 듬성듬성 이가 빠진 노인의 잇몸처럼 틈 새가 벌어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꾀보의 공격이 계속 불을 뿜었다. 또 한 녀석이 꾀보의 구둣발에 턱주가리를 맞고 비척비 척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불나비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불나비의 몸뚱이가 나비처럼 가뿐하게 지상 위로 떠올랐다. 꾀 보가 주춤하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불나비가 한 족장쯤 근접한 지역에 착지함과 동시에 몸을 낮추며 재빨리 호미걸이하듯 딴죽 을 걸었다. 꾀보가 폴짝 뛰어올라 딴죽을 피하려고 했으나 불나 비의 구둣발에 한쪽 발목을 걷어체였다.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며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불나비의 이단옆차기가 그때를 기하여 빨래줄처럼 곧게 뻗어왔다. 꾀보가 핸드스프링 자세로 한 순간에 세 족장쯤 측면으로 비켜섰다. 바로 그때였다. 꾀보의 등뒤에서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특공대 한 녀석이 온몸을 던져 와락 꾀보를 덮쳤다. 꾀보는 어찌해볼 겨 를도 없이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아직껏 포위망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제 특공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순간이었다. 숱 한 단병접전으로 단련된 꾀보가 그같은 위험을 모를 리 없었다.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다람쥐 채바퀴돌듯 몸뚱이를 또 르르 굴릴 필요가 있었다. 등뒤에서 찍어 누르는 놈의 옆구리를 오른쪽 팔꿈치로 찌르고 곧장 몸을 굴렸다. 그러고는 시야 가까 이에 들어오는 한 녀석의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찼다. "아이쿠, 나 죽네!" 특공대 한 녀석이 부샅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서 폭싹 꼬꾸라졌 다. 줄잡아 삼사분 정도는 숨도 제대로 못쉬고 자빠져 있으리라. 꾀보가 신속히 정상의 상태로 돌아와 몸을 낮추며 방어자세를 취 했다. 불나비가 땅을 박차고 솟구쳐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 다. 꾀보가 다음 공격을 시도할 틈을 주지않으려는 작전이었다. 불나비 또한 싸움바닥에서 이골이 난 건달이었다. 그러니 절호의 기회를 섣불리 간과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꾀보가 자기 시야 에 불나비의 모습이 잡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순간이었다. 돌연 몸을 돌려 자신에게 유리한 공격자세로 돌아가려했을 때였다. 이 미 공중으로 솟아오른 불나비의 구둣발이 퍽하고 꾀보의 등짝을 내리찍혔다. "허억!" 바튼 숨을 토해내며 꾀보가 갈지자 걸음으로 서너 발자국 앞으 로 내달았다. 불나비의 기습적인 공격을 허용한 것이 실수였다. 다음 순간 어른 팔뚝만한 몽둥이를 치켜들고 빈틈을 노리고 있던 한 특공대의 공격이 꾀보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꾀보의 눈에서 번쩍하고 불똥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꾀보의 육중한 몸이 기우 뚱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속히 이 위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쓰러진 채로 꾀보는 생각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몽둥이에 맞은 허벅지가 휘청했다. 불나비의 구둣발이 또 다시 꾀보의 옆구리를 강타한 것은 그때였다. 윽! 신음소리를 삼키며 꾀보는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이어 특공대 셋이 한꺼번에 달려 들어 꾀보의 등짝과 두 다리와 머리통을 짓눌렀다. 꾀보는 이제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참담한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중과부적의 한계를 혼자 뛰어넘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불나비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꾀보의 두 팔을 뒤로 꺾었다. 그리고 손목에 철컥 수갑을 채웠다. 시경에서 형사로 활약하고 있는 고향 친구에게서 얻어온 것이었 다. 꾀보를 해치우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포박하여 사장 앞으로 데려가 무릎을 꿇려야 했으므로. 수갑이 채워져 부자연스 럽게 된 꾀보는 곧 불나비가 타고있는 승용차 뒷자석에 구겨지듯 실렸다. "출발해라." 불나비가 낮게 소리쳤다. "저 놈은 어떻게 할까요?" 꾀보의 운전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 졸개가 승용차 밖에 서서 물었다. 꾀보의 운전수는 그때껏 자기 차 안에 앉아 오들오 들 떨고 있었다. 꾀보의 보디가드로는 아직 미숙한 놈인 것 같았 다. "함께 데려가도록 하자." 불나비가 말하자 차가 곧 출발했다. 그로부터 1시간 반쯤이 지나 꾀보는 산본으로 호송되어 왔다. 장소는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아니라 코카콜라 하치장이었다. 빈 병을 상자에 담아 차곡차곡 쌓아두는 이를테면 노천 창고였 다. 붙잡혀 온 꾀보는 사장 앞에 무릎을 꿇린 채 고개를 푹 꺾고 있었다. 물론 맨 땅바닥이었다. 사장은 졸개들이 준비해놓은 간이 소파에 온몸을 파묻듯이 앉자 있었다. 칙칙한 어둠이 팽팽한 긴 장감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꾀보. 그 동안 서울의 한 지역을 장악하고 뿌리를 내렸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래, 잘 지냈니?" 지난 날의 꾀보를 대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장이 먼 저 입을 열었다. 꾀보는 그러나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 서 침묵했다. 얼굴을 들어 사장을 쳐다볼 의욕도 상실한 마당이 었다. 꾀보는 자신의 말로가 어떠 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조직을 배반하고 게다가 보스를 향해 보복을 칼날을 들이 댄 자의 최후가 어떠 하리란 것을……. "꾀보가 자립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한데, 한 가지 실수한 게 있어. 그 이유가 뭐냐?" 사장이 배반의 칼을 치켜든 까닭을 물었다. 꾀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묻잖니!" 사장이 차갑게 소리쳤다. 꾀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사장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었으나 사장의 표정이 아슴푸레 잡혔다. 쓸 쓸함에 젖어 있는 듯, 고통에 일그러져 있는 듯, 사장의 표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꾀보가 불나비를 향해 불붙 은 눈길을 던졌다. 불나비는 사장의 오른켠 후방에 우뚝 서 있었 다. "꾀보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소. 그러니 변명으로 듣지는 말아 주시오. 하늘에 맹세컨대 형님에게는 불만이 없소. 다만, 불나 비……" 하는데, "시끄럽다!" 사장이 꾀보의 말을 중도에서 토막친 다음, "불나비에게 반기를 든 행위는 곧 나를 배반하는 것과 같다. 그걸 네가 몰라서 지금 씨부렁대는 거니? 그리고 한 가지만 물어 보자. 꾀보, 네가 허종묵을 산본에 침투시킨 게 사실이냐?" 하고 는 이글이글 꾀보를 노려보았다. "그건, 사실이오." "그럼, 됐다. 피차 구차한 말은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하고……" 천천히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사장이 불나비를 향해, "수갑을 풀어줘라!" 하고 별안간에 명령했다. 불나비가 즉각 꾀보의 뒤로 다가가 수갑을 풀어주었다. 꾀보는 그러나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죽은 듯 앉아 있을 뿐이었 다. "네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다, 꾀보. 조직을 배반하고 급기야 는 내게 도전할 의사까지 비친 네 의사를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뜻이야. 일어나라, 그리고 나를 쓰러뜨리고 네 갈 곳으로 가거 라." 사장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 불나비에 게 건넸다. 정식으로 결투를 받아주겠다는 단안이었다. 사장의 상 의를 건네받은 불나비는 물론 주위에 늘어서 있던 졸개들도 아연 실색했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꾀보였다. "일어나거라. 그리고 힘껏 덤벼라, 꾀보!" 사장이 낮게 소리쳤다. 어둠이 파들파들 제 몸을 떠는 것 같았 다. 코카콜라 하치장에 모여든 졸개들이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 며 사장의 거취를 주목했다. 꾀보는 여전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 고 앉은 자세 그대로 움직일 줄 몰랐다. 사장이 성큼성큼 꾀보에 게로 다가갔다. "꾀보, 건달답게 일어나 덤비란 말이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장의 구둣발이 날아가 꾀보의 명 치끝에 꽂혔다. 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꾀보가 그 자리에 서 폭싹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사장은 그러나 한참을 참고 기다렸다. 꾀보가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더니 이윽고 무릎을 세웠다. "좋소, 형님과 단독으로 결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꾀보는 이제……, 여한이 없소. 자아, 갑니다!" 꾀보의 몸의 펄쩍 공중으로 솟구쳤다. 날카롭게 뻗어 내려오는 꾀보의 발길질을 상단막기로 틀어막고, 사장은 곧장 기다란 작대 기같은 오른발을 뻗어 올렸다. 그러고는 바람을 가르는 도끼날처 럼 신속하게 급강하시켜 꾀보의 견갑골을 겨냥하여 내리찍었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하고 말 꾀보가 아니었다. 일찍이 집을 떠나와 양아치 세계에서부터 단련이 된 꾀보였다. 싸움이라면 단병접전의 패싸움이건 독대건 간에 숱하게 치러내며 성장해온 그였다. 일당십의 행동대장이던 꾀보는 싸움판에서 단 한 차례도 뒤로 물러서본 적이 없었다. 축구선수가 가슴으로 공 을 트리핑하듯 꾀보가 신속히 어깨의 방향을 돌렸다. 사장의 오 른발 도끼날을 피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사장의 발길질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겨드랑이에 가볍게 일격을 허용한 꾀보가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는 사장이 어둠 속으로 번쩍 솟구치는가 싶더니만, 그대 로 공중제비돌기 자세로 돌변하면서 발뒤꿈치로 꾀보의 턱주가리 를 강타했다. 누가 보더라도 무섭도록 놀라운 발길질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른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사장의 빠른 발길질을 아직껏 피해간 상대는 없었다. 사장은 주먹보다는 발길질의 명수 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길게 뻗은 사장의 두 다리는 검도 유단자 의 목검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곤 했다. 사장에게 결정적인 일 격을 허용한 꾀보는 뒤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사장의 적수가 되 어 맞서기엔 꾀보의 실력이 아직은 역부족인 듯싶었다. 한강철교의 교각같은 두 다리로 떡하니 버티고 서서 사장은 꾀 보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꾀보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 어나더니 찍하고 침을 옆으로 뱉었다. 그러고는 버릇대로 웃통을 훌렁 벗어던졌다. 꾀보가 양팔을 팔랑개비처럼 두어 차례 흔들어 몸을 추스르더니 곧장 방어자세에 돌입했다. 건곤일척의 긴장감 이 감돌았다. 불나비를 비롯한 산본파의 주먹들은 마른침을 삼켜 가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볼 뿐이었다. 스산한 달빛이 은빛으 로 쏟아져내려와 코카콜라 하치장 담벼락에 부딪치고 있었다. 사장이 사뿐사뿐 고양이 걸음으로 꾀보에게 접근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꾀보의 발길이 사장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사장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며 슬쩍 공격을 피했다. 두 사람의 간격이 한 족장쯤 되게 좁혀졌다. 그 순간 꾀보의 주먹이 사장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사장이 가볍게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휘 익 꾀보의 주먹 바람이 사장의 귓불을 스쳤다. 사장이 납짝 몸을 웅크리자 꾀보의 주먹이 사장의 어깨 위에 척 걸쳐졌다. 물론 순 식간에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그때 송곳같은 사장의 주먹이 다연 발 최루탄처럼 날아가 꾀보의 복부와 옆구리를 찍었다. 꾀보가 무척추동물처럼 흐물흐물 그 자리에 주질러앉았다. 사장이 오른발을 뻗어 꾀보의 턱을 걷어차려는 순간이었다. 옆 으로 뱅그르 몸을 굴리는가 싶더니 꾀보가 재빨리 사장의 발목을 겨냥하여 딴죽을 걸었다. 바람에 날아간 머플러가 가로수 밑둥에 처억 감기듯 그렇게 신속할 수가 없었다. 사장으로선 불시에 일 격을 허용하게 된 폭이었다. 일대일의 팽팽한 대결에선 방심이 절대 금물인데 순간적으로 긴장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꾀보를 하 찮은 상대로 치부한 것부터가 실수인지 몰랐다. 사장은 몸의 중 심을 잃고 두어 족장쯤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자칫 균형을 상 실했다면 졸개들이 보는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추태를 선보일 뻔했다. 그러나 사장의 솜씨가 그 정도의 공격을 받고 쓰러질 만큼 녹 슬었을 리 만무했다. 몸의 균형이 흩뜨러진 틈을 이용하여 꾀보 가 필시 연속공격을 시도하리라 판단하고, 숭어가 뛰듯 사장은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돌아 가볍게 착지했다. "꾀보가 제법이구나." 너댓 족장쯤 떨어진 곳에서 사장이 싸늘히 말했다. "형님 칭찬은 사양하겠소. 자아, 또 갑니다." 꾀보가 로프의 반동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앞으로 튕겨나오는 복서처럼 사장에게로 세 족장쯤 접급했다. 이어 꾀보가 다음 동 작을 위해 몸을 바싹 웅크렸다. 사장이 틈을 주지 않으려고 시계 반향으로 두 발자국 발을 옮겼다. 서로 간에 선제 공격의 틈을 노리는 사나운 두 마리의 맹수같았다. 사장의 오른발이 휘익 허 공을 갈랐다. 사장의 오른발이 처음엔 꾀보의 인중을 향하는가 싶었다. 꾀보가 재빨리 팔뚝을 굽혀 사장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 러나 그것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일종의 속임수였다. 사장의 오 른발이 공중에서 신속히 꾀보의 옆구리 쪽으로 내려오는가 싶더 니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는 꾀보의 왼쪽 무릎 위에 턱 걸쳐졌다. 삿대로 강기슭을 찔러 배를 강심으로 띄우는 사공처럼 꾀보가 오 른발을 낮게 쭈욱 뻗으며 사장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허나 그것은 사장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상대의 다음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사장이 꾀보의 왼쪽 무릎 위에 걸쳐진 발끝에 불 끈 힘을 가했다. 우직끈 생나무 가지가 꺽이듯 꾀보의 무릎이 땅 바닥에 꽂혔다. 꾀보의 주먹이 사장의 복부에 와닿기 바로 직전 이었다. 이어 사장의 왼발이 공중을 가르며 퍽하고 꾀보의 가슴 팍을 내질렀다. 꾀보의 몸이 앉은 자리에서 휘떡 뒤로 넘어갔다. "일어나거라, 꾀보!" 사장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구둣발에 가슴팍을 차인 꾀보는 그러나 숨이 콱 막히는 모양이 었다. 속히 일어나지를 못하고 한동안 생똥을 싸는 듯 싶더니만 휘청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사장의 몸이 또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다이빙 선수가 구 름대를 박차고 하늘로 솟구치는 것처럼 날렵한 동작이었다. 사장 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한 차례 엇갈리는가 싶더니만 태권도의 돌려차기 자세로 바뀌었다. 그 다음 순간 꾀보는 망치로 머리통 을 강타당한 듯 강한 충격을 받고 휘청했다. 벌목공의 톱날에 기우뚱 자빠지는 고목처럼 이윽고 꾀보는 뒤 로 쿵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데굴데굴 두어 차례 몸뚱이를 굴리더니 입가에 거품을 물고 축 늘어졌다. 천천히 꾀보에게로 다가간 사장이 구둣발로 가슴팍을 짓누르며 부벼댔다. 담배불로 살을 지지는 것 같은 비정한 동작이었다. "으으윽!" 꾀보가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승부는 거기서 끝이 났다. "꾀보, 이제 네 최후가 어떠리란 걸 잘 알겠지?" 반역자의 최후는 곧 죽음이었다. "내, 내가 졌소. 형님 마음 대로 하시오." 꾀보가 스르르 두 눈을 내리깔았다. "잘 가라, 꾀보. 허종묵과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을……" 사장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날이선 단검이 달빛을 받고 반짝 빛을 반사했다. 사장이 지체없 이 꾀보의 오른쪽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아아아…… 악!" 꾀보의 비명 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었다. 사장은 어디까지나 비정했다. 어쩌면 그런 비정성이야말로 건달을 건달로서 지탱해 주는 최종의 덕목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장의 행동을 지켜보던 졸개들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사장이 꾀보의 왼쪽 아킬레스건 을 끊기 위해 다시 단검을 내리꽂으려 했을 때였다. '이번에 맞이한 후한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아주 마감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야. 훗날에 다시 만나게 될 게야. 아암, 그런 날 이 반드시 올 걸세.' 모주영감의 말소리가 느닷없이 귓속에서 부스럭거렸다. 순간 사장은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꾀보 를 죽이지는 말라고, 모주영감이 그렇게 일러준 건 아니었을까. 사장은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장의 손에서 단검이 떨 어져 땅바닥에 꽂혔다. 사장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밤 하늘을 쳐 다보았다. 별들이 일제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불나비……!" 불나비를 찾는 사장의 목소리가 우수에라도 젖은 듯 왠지 축축 했다. "네, 형님!" 대답하고 불나비가 사장에게로 신속히 다가갔다. "꾀보를……, 그냥 돌려보내라. 치료비도 좀 주고……" "알겠습니다, 형님!" 불나비의 그 말을 뒤로 하고 사장은 어둠 속에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시적시적 사라졌다. 불나비가 졸개들을 시켜 그 즉시 응 급조치하도록 하고 꾀보를 승용차에 실었다. 함께 붙잡혀온 꾀보 의 졸개가 운전석에 앉고 꾀보는 뒷자석에 널브러졌다. 불나비가 차의 뒷문을 잡은 채, "잘 가거라, 꾀보. 다시는……, 다시는 형님 얼굴 볼 생각일랑 말고." 하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부르르릉!" 차가 시동을 걸고 이내 출발했다. 불나비는 꾀보를 실은 승용 차가 어둠에 휩싸인 산본을 떠나는 걸 말없이 전송했다. 사장이 그 정도에서 꾀보를 용서한 까닭을 불나비는 알 수 없었다. 11. 과욕 족제비 강덕만이 사전 연락도 없이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찾아 온 것은 꾀보 사건이 있은지 열흘쯤 뒤의 일이었다. 밤 10시쯤이 었다. 족제비는 낯선 사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오랜만이우, 독사 형." "나쁜 놈! 내게 유감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어째 연락도 없이 사라졌니?" 철거 용역업체인 무성기업의 대표 신분으로 찾아왔을 때의 일 을 염두에 두고 응수한 말이었다. 그러자 족제비가 히쭉 웃음을 흘리며, "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수. 지난 일은 그만 잊기로 하 고……. 순만아, 인사드려라. 독사 형이라고, 나하곤 근본적으로 바탕이 다른 건달이시다." 하고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낯선 사내 를 인사시키는 것이었다. "저어, 강순만이라고 합니다. 형한테 말씀 여러 차례 들었습니 다." 족제비의 동생 강순만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조 금 굽혔다. "동생이야? 어째 족제비랑 생긴 게 영 딴판이네?" 강순만은 형인 족제비와는 생김새부터가 아주 딴판이었다. 족 제비가 거칠고 우락부락한 인상이라 대번 건달 냄새를 풍기는데 비해, 동생 순만은 이목구비가 뚜렷할 뿐아리라 눈빛도 사뭇 준 열해 보였다. 고전적인 어투로 번역하면 신언서판이 바로 선 헌 연(軒然) 장부같은 모습이었다. "얼어죽을! 우리 오마니가 어디가서 다른 씨앗을 도적질해 왔 는지, 좌우당간에 모지방이 나하곤 좀 다르우. 게다가 밥 먹듯 운 동을 하는 놈이라 노는 것도 이 바닥 스타일과 판이하고. 그 점 도 참고로 알아둬야 할 거유." 족제비가 히쭉히쭉 웃으며 대꾸했다. "운동이라니……, 무슨 운동?" 하고 사장이 강순만을 쳐다보았 다. 그러자 족제비가 냉큼 나서며, "운동은 분명 운동인데, 그것이 건달들이 주먹 뻗고 발길질 날 리는 운동하고는 판형이 달라. 아 글씨 이 놈의 시끼가 노동 운 동이라나 민주화 운동이라나, 불그죽죽한 물이 든 그런 요상스런 운동을 한다, 그런 말이우." 하고는 아예 킬킬거리며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생이 운동권 출신이다, 뭐 그런 말이로구만?" "그러게 말이우. 거기다가 이 놈의 시끼가 시방 수배 중이우. 제 한 몸 피신할 곳을 못찾아 형이랍시고 할딱거리며 찾아왔건 만, 공교롭게도 내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 공단 근처라, 안전을 도모할 만한 곳이 못돼. 해서, 엄치 짱구를 돌려봤는데 문득 독사 형 생각이 나질 않겠수? 해서 염치 불구하고 데려왔수. 이곳이 한결 안전지대일 것 같아서 말이우. 거두절미하고, 이 놈의 시끼 좀 숨겨주슈. 육 개월이고 일 년이고 깊숙히 짱박아 뒀으면 싶은 데……" 그러면서 족제비는 자기 형제의 성장 배경에서부터 하안동 철 산리에서의 철거 반대 투쟁에 이르기까지 길래길래 늘어놓은 후, "데리고 있어 보면 알겠지만, 독사 형이 벌이고 있는 사업에도 다소간 도움은 될 거유. 이 놈의 시끼가 우리들과는 워낙 색깔이 달라놔서 얼마나 협조를 해줄진 모르겠지만 말이우." 하고 덧붙 였다. 강순만은 그러나 족제비가 무어라 지껄이던 말던 아무런 대꾸 한 마디 없었다. 비록 지금은 수배자로서 몸을 의탁해야 할 형편 이지만, 건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본인이 원한다면야 적절한 장소가 아주 없지는 않지." 돼지막의 모주영감을 염두에 두고 사장이 말했다. 모주영감과 어쩌면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 이다. 계속해서 사장이, "저어 쪽 언덕배기에 돼지막이 있는데, 거기 모주영감이라고 기인이 한 분 단촐하게 살고 있네. 두 사람이 제법 말벗이 될 것 도 같은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싫지 않 다면 내일 오전에 영감을 찾아가 한번 대면토록 하지. 어떻소, 순 만씨 생각은?" 하고 물었다. "아무 데고 저는 괜찮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순만이 처음으로 무거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의 오른 쪽 눈 밑에는 깨알만한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그의 인상을 우울한 빛으로 색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맙수, 독사 형. 저 놈의 시끼 그렇게 손털라고 타일러도 도 대체가 벽창호야. 빨갱이는 피도 눈물도 없다더만, 그 말이 꼭 맞 는 것 같어. 고향 철산리에서의 철거 반대 투쟁을 끝으로 이제는 새 삶을 시작하려나 싶었더니,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마산인가 창 원인가 하는 곳으로 내려가 꼴에 파업을 주도했다나! 거 왜 얼마전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나고 테레비에서도 왕왕 거리며 떠들어대던 그 일이우. 한데 제3자 개입 금지조항이라나 뭐 그 따위 법조항이 있다합디다. 그래서 체포되는 날이면 몇 년 쯤 철장 신세를 져야 한다던데, 나로서는 저 놈의 시끼 속을 알 다가도 모르겠어. 미친 놈, 세상이 쉬이 뒤집어질 것으로 착각하 는 모양인데 어림반푼어치 없는 수작이야. 운동판에서 노는 놈들 의 판단처럼 호락호락 세상이 무너질 것 같으면, 우리같은 건달 들이 나서서 벌써 팍싹 뒤집어엎었다, 씨팔! 애저녁에 꿈 깨라, 꿈 깨, 응?" 족제비가 투덜투덜 동생 순만의 욕설을 늘어놓았다. "형이 건달 생활을 청산한다면, 나도 삶의 방식을 한번 고려해 볼 수 있겠지. 부질없는 기대인지 모르겠지만……" 강순만이 삐끔한 눈초리로 족제비를 쳐다보았다. 그 말인즉슨 족제비가 건달 생활을 청산할 수 없듯 자기 또한 세상을 개조하 려는 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역설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자아 자, 형제간의 다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으니 까 이쯤에서 휴전하기로 하고. 오랜만에 족제비가 찾아왔는데 이 대로 돌려보내면 예의가 아니고 하니, 자리를 옮겨 술 한 잔 하 는 게 어때? 이따금 들르는 곳이 있는데 그럭저럭 괜찮아. 어떡 할까, 순만씨도 같이 가겠소?" 사장이 파장을 선언하며 두 사람의 의향을 물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요." 강순만이 문자를 갖다붙이며 흔쾌히 동행할 의사를 보였다. "씨팔, 나 원 참 더러워서! 너 시방 뭐라구 쫑알거렸니? 불감증 인 여자가 오히려 맛이 더 고소하다구? 웃기는 소리하고 자빠졌 네. 임마, 문자는 니들 노는 바닥에 가서나 들먹여라. 내 동생이 라 특별히 귀띔해 주는데, 건달 세계에서 함부로 문자를 갖다붙 이며 아는 체하다가 뺨따귀를 얻어맞은 놈을 수없이 보았네라. 고것 참 보기에 더럽게 안됐더라!" 족제비는 동생 순만을 못잡아 먹어 노상 안달이었다. 두 형제 는 얼굴만 맞대면 기다렸다는 듯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는데, 그래 도 동생이라고 피난처를 찾아 데려온 것을 보면 영락없이 형제는 또 형제였다. "순만씨도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오?" 사장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족제비가 다시 툭 튀어나서며, "말도 말우. 밑천이 쪼글쪼글해서 그렇겠지만 주제에 깡소주만 조진다니까! 어쩌나, 독사 형도 조심해야 할 걸. 저 놈의 시끼가 술 췌갖고 주정하면 해골이 복잡해져. 대한민국을 저 혼자서 들 었다 놓았다 한다니깐. 술주정으로 세상이 뒤엎어지면, 네에미 술 꾼들 혁명 무공훈장 줘야겠다." 하고 떠벌떠벌 동생을 또 나무랐 다. "그만 시끄럽다. 답답하니 밖으로 나가서 이차로 또 투덜거리 던지!" "좋습니다, 자꾸 투덜거려 봐야 입아귀만 아프지, 니미럴 것!" 허담이 모는 차를 타고 세 사람은 스텐드바 천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장은 강덕만 형제를 이끌고 전에 승혜가 경영하던 코 너로 가 착석했다. 미스 한이란 아가씨가 승혜의 바통을 이어받 아 꾸준히 터를 닦고 있었다. "여기 술부터 좀 주지 그래?" "늘 마시는 그 술이면 되죠?" 미스 한이 쌩긋 웃으며 국산 양주를 내놓았다. 세 사람은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부딪쳤다. 강순만은 주량이 약한 탓인지, 아니면 제 몸 돌볼 겨를도 없이 깡소주로 위장을 세척해서인지 금방 술이 취했다. 족제비가 염려했던 것처럼 그러 나 주정을 부리진 않았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자 강순만은 석 상처럼 굳은 표정이 되었다. 간헐적으로 술잔을 뒤집을 뿐 도무 지 말이 없었다. 사장은 불현듯 승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승혜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치 하나의 줄기에 매달린 두 개의 혹뿌리인 양 덩달아 지선의 모습이 떠오르며 겹쳐졌다. 지선은 건달의 아내로선 함량 미달이라고 스스로를 진단하고 훌쩍 떠나버렸다. 말이 함량 미달이지 사실은 건달의 아내 되기 를 거부한 몸짓에 다름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지선은 사장을 만 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었다. 사장은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 는 남성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악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 선이 준호를 잉태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이별은 훨씬 더 빨 리 오지 않았을까. 건달의 아내로서 승혜는 어느 정도 합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여자였을까. 지선의 정 반대편에 승혜가 있었다. 지선은 적 당히 키가 작고, 적당히 엉덩이가 육감적이고, 적당히 몸매에 균 형이 잡혀 있고, 또 적당히 오종종하고 적당히 예쁘장한 그런 여 자였다. 외모상으론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무색무취의 여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만큼은 어떤 여자보다도 강했다. 마치 적당한 외모를 그것으로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승혜는 우선 용모부터가 빼어난 여자였다. 어떤 여자와 비교해 도 대번에 눈에 들어올 만큼 미인형이었다. 몸 어느 구석을 살펴 봐도 타인에 비해 처지는 부분이 별로 없었다. 아니, 그런 구석이 전혀 없다할 수는 없고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묘한 특징을 간직 하고 있는 여자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여 린 새순처럼 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승혜가 자존심을 내세우 는 걸 사장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었다. 지선이 사장에게서 벗어나려고 틈나는 대로 몸부림친 여자였다 면, 승혜는 그에게로 한발짝 더 다가서려 늘 애썼다. 지선이 겉은 온상에서 자라난 화초 같은데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겨두고 있 다면, 승혜는 가시덩굴 자갈밭을 뒹굴며 자랐건만 속은 상처받기 쉬운 가녈한 화초 같다는 특징이 있었다. 아우라지강을 혼자 건 너던 그 새벽 이후로 승혜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그녀가 스스로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두 여자는 언제나 상반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선이 바다라 면 승혜는 산이었고, 지선이 불이라면 승혜는 물이었다. 그렇다면 승혜 역시 건달의 아내로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이 세상에 지선과 승혜 두 여자만이 있어 신이 그 선택을 강요한다면, 사장은 어느 쪽을 향해 손을 뻗었을까. 지선인가? 사 장은 자신이 없어 고개를 흔든다. 그렇다면 승혜인가? "저어, 사장님. 혹시 승혜 언니 소식을 들었어요?" 미스 한이 사장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불쑥 물었다. 그 바람에 상념에서 깨어난 사장이 두 눈을 껌벅거리며, "승혜 소식을……, 미스 한이 들었다고?" 하고 되물었다. "아뇨, 사장님이 승혜 언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서요. 여 자에겐 직감이란 게 있거든요." "으응, 난 또 뭐라구……." "승혜 언니, 좋은 여자였죠?" "그래, 어쩌면 내게 너무 과분한 여자였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째서 승혜를 버렸느냐, 그 말인가?" "네, 제가 보기엔 두 분이 썩 어울려 보이던데요?" "내가 버린 것이 아니고, 승혜가 날 버리고 떠난 거야. 명색이 건달이긴 하지만 여자를 버릴 만큼 마음이 모질질 못해, 나는. 아 니야,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승혜를 버렸군. 미스 한 말이 맞 아." 사장은 쓸쓸히 술잔을 뒤집었다. "제가, 승혜 언니를 찾아 드릴까요?" "미스 한이 무슨 재주로?" "재주는 메주지만요. 이따금 여기 들르실 때마다, 어쩐지 쓸쓸 해 보여서요. 제가 나서서 승혜 언니를 찾아 데려오고 싶은 마음 이 들곤 하거든요. 두 분에게 제가 뭘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니고 요." "말이라도 고맙군." 사장이 시죽 웃어 보이며, "이봐, 미스 한. 오늘 밤에 선약 있나?" 하고 물었다. "왜요? 저랑 연애하고 싶으세요?" 미스 한의 표정에 화들짝 화색이 돌았다. 쌩긋 웃을 때 드러나 는 하얀 덧니가 그녀의 매력이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 맞은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아니 깨물리고 싶은 묘한 충동을 불 러 일이키는 여자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상처를 받고 떠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바닥의 아 가씨들은 대개 건달 보스에게 거의 맹목적인 애정을 품고 있기 마련이었다. 사장은 미스 한의 표정에서 그같은 심리를 읽었다. "그래,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시간이야 있지만, 어쩌죠? 나중에 승혜 언니가 알면……" 미스 한이 필요 이상으로 입술을 쭝긋거리며 애교를 떨었다.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기 앉아 있는 저 젊은 총각이니까." 하고 사장이 턱짓으로 강순만을 가리 켰다. "피이, 내가 머 아무 남자하고나……." 미스 한의 얼굴이 금세 골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 아뭇소리 말고 내 부탁 한번 들어줘. 나중에 빚 값을 날이 올지……" 하다가 말을 끊고, 지갑 을 열고는 자기앞수표 세 장을 꺼내어 미스 한의 손에 쥐어주었 다. 쫓기는 자에겐 무엇보다 여자의 따스한 살결이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사장은 알고 있었다. 많은 범죄자가 창녀의 부락에서 덜 컥 쇠고랑을 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거니와, 그것이 바로 그같은 사실을 반증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운동권 청년들과 가까이 대면 한 바 없지만, 끝없이 어둠의 강을 건너야 하는 도망자의 심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도망의 닻을 내리고 편안 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법이었다. 강순만의 초췌한 모습에서 아까부터 사장은 그같은 갈증을 읽 고 있었다. 형제나 부모가 메꾸어 줄 수 없는 마음 속에 뻥 뚫려 있는 공허한 공간. 그리로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삼오삼오 나뭇 잎은 떨어져 나뒹굴고, 저 멀리 배경으로 자리잡은 칙칙한 산 그 림자……. 지금의 강순만에게는 사복 차림의 곰을 피해 꼭꼭 숨을 수 있 는 피난처도 필요하지만, 낯선 여자일망정 한 남자의 영혼까지 잠재워 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가슴이 더 절실할 것이었다. 아 니, 여자의 따스한 자궁 속에, 아교처럼 응어리져 있는 불안한 감 정을 마음껏 사출해 버린다면,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사장은 강순만의 눈빛에서 족제비와는 다른 빛깔의 생의 어떤 열정을 감득하고 있었다. 건달은 물론 건달과 가까이 통하는 법 이었다.. 한데 강순만은 건달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아니 건달인 형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혐오하는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묘하 게 사장의 마음을 끌었다. "내 모처럼 부탁하는 거야, 들어줄 수 있겠어?" 미스 한이 촉촉한 눈길로 번갈아 사장과 강순만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스 한은 강순만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은 것이었을까. 잠시 후, "사장님에게 먼저……" 하다가 미스 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장은 미스 한이 삼킨 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부탁이니 만큼 낯선 총각일지언정 정성스레 감싸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장에게 먼저 마음을 허락한 후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여자에게는 그런 묘한 순정이 있다는 걸 알지 않느냐 하는 의미 일 터였다. 클럽을 운영하면서 사장은 의외로 순정에 울고 웃는 아가씨가 많다는 데 놀랐었다. 거치른 황야에 살면서 오히려 정에 약하다 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곰들에게 쫓기고 있는 친구야. 어쩌면 여자의 육체보다 따뜻한 가슴이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무슨 뜻인지 알 겠지?" "알았어요, 최선을 다 해 볼게요." 미스 한도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했다. 포기할 건 빠르게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또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점이 이 바 닥 여자들의 매력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장은 자기 일처럼 마 음이 편안해졌다. "여관은 아무래도 위험하고, 가능하다면 미스 한의 자취방으로 데려가는 게 좋을 듯싶어. 늦게까지 실컷 잠잘 수 있도록 신경써 주고, 또 아침에 일어나면 해장국이라도 끓여 먹여주고.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내일 산본 사무실까지 미스 한이 직접 데려다 주 었으면 해." "네, 염려하지 마세요." 동생 순만과 계속 무어라 지껄이고 있는 족제비를 사장이 슬며 시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런 다음 미스 한과 나눈 이야기를 귓속말로 전하고, "어쩔텐가, 지금 곧바로 서울로 올라갈 거야?" 하고 물었다. "고맙수, 독사 형. 거기까지 마음을 써주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 했네. 제에기, 타성받이가 친형보다 되려 낫군. 저 놈의 시끼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고, 맥주 몇 병 사들고 사무실로 찾아가 겠수. 넌덜머리 나는 세상, 모처럼 코 삐뚤어지게 한잔 꺾어 봅시 다, 니미럴 것!" "아무려나, 자네 좋을 대로." 사장은 즉시 술값을 계산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밤이 늦은 시 간이라서 미스 한의 코너에는 손님이 그들 세 사람밖에 없었다. 강순만이 술이 취해 게츰스레한 눈길로 사장을 전송했다. 순만의 눈길에서 사장은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의 술렁거림을 보았 다. 순만은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돌아왔 다. 예상했던 대로 위축되었던 분위기가 적잖이 풀어져 있었다. 미스 한의 노고가 미루어 짐작되었다. 순만을 사장에게 인계하고 미스 한은 곧장 시내로 돌아갔다. 밤늦도록 술잔을 뒤집던 족제 비는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나고 그곳에 없었다. 사장은 순만을 데리고 돼지막의 모주영감을 찾아갔다. 모주영감은 언제나처럼 밋밋한 태도로 사장을 맞아주었다. 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돼지막 공사는 벌써 끝이 났건만 한 겨울이라선지 입주자를 물색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통에 만두가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이번 겨울만 지나면 허허 로운 벌판에 우뚝우뚝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산 본에서의 검은 사업도 파장이었다. "영감님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장이 말했다. 그리고 순만에게로 눈길을 옮 겨, "큰절 올리지. 어제 이야기한 영감님이네." 하고 일렀다. 순만이 엉거주춤 앉아 있다가 후딱 몸을 일으켜 큰절을 올렸 다. 모주영감이 꼬장꼬장한 눈초리로 순만의 위아래를 훑어내렸 다. "이 사람을, 영감님이 당분간 거두어주었으면 합니다. 딱한 처 지에 놓여 있어 부득히 영감님을 찾아온 겁니다." "쫓기고 있구먼." 순만을 상(相)을 감정한 모주영감의 일성이었다. 이어, "한데, 젊은 사람이 색(色)이 너무 강할 뿐더러 의(意) 또한 저 만큼 앞질러가고 있구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거니와 고집 멸도(苦集滅道) 또한 없는 것이라 했거늘, 츠츳!" 하고 혼자 혀를 찼다. 순만은 무연스레 모주영감을 바라볼 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 었다. "내 집이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머무는 사람의 마음이 편해야 할 텐데. 하기사 쫓기는 사람의 심사가 직수굿하기만도 어려울 테지." 모주영감의 마음씀이 그러했고, 사장은 선뜻 부탁을 들어준 것 만도 황송해서, "그거야 뭐, 지내다보면 차차 마음도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하 고 고마워했다. "모쪼록, 영감님께 폐해를 끼치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순만도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자네 바둑 둘 줄 아는가?" 모주영감이 물었고 순만이 즉각 대답했다. "네, 행마는 조금 익혔습니다." "그럼, 장기는?" 계속해서 모주영감이 물었고 지체없이 순만이 답을 놓았다. "또래들과 겨루어 아직은 져본 적이 없습니다." "허허허, 그래? 잠시 세상 시름을 벗어던지고 늙은이랑 수담(手 談)이나 나누며 한 세월 보내세, 그려." "수담뿐만이 아니라, 이것저것 배움도 받았으면 합니다." 그렇듯 둘의 수족이 처음부터 척척 맞아 떨어지는 듯싶었다. 이어 모주영감과 순만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사장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아까 자네 상을 들여다보는 순간, 풀쑥 주역의 택화혁(澤火革) 이란 괘상이 떠오르더란 말이야. 젊은 사람이 일찌감치 이 세상 변혁을 꿈꾸어 온 모양일세 그려. 어떤가, 내 말이 틀렸는가?" "하지만, 아직은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순만은 태도며 말투가 매양 겸손했다. 모처럼만에 대화 상대를 만났다는 듯 모주영감이 토닥토닥 입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했다. "태화혁에서 이르는 혁(革)이란 모름지기 바꾸는 것. 즉 혁명 (革命)을 일컫는 말이라네. 혁의 본뜻은 짐승의 가죽. 짐승의 가 죽에서 털을 제거하면 전혀 다른 물건이 되거든. 함으로 변하여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이 곧 혁이라네. 그렇다면 혁명의 명(命)이란 무엇인가? 천명(天命)을 가리키는 말일세. 따라서 혁명(革命)이란 천명을 받들어 전왕조(前王朝)를 멸망시키고 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네. 즉 천명을 바꾸는 것 이다 그런 말이야. 은나라 탕왕(湯王)은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천자가 되었고, 주나라 무왕(武王)은 은나라 주왕(紂 王)을 멸망시키고 천자가 되질 않았는가. 또한, 어떠한 제도이든 시행된지 여러 해가 지나게 되면, 반드 시 그 제도의 시행으로 인하여 온갖 폐해가 발생하기 마련이라 네. 그렇게 되면 개혁이 불가피해지는데, 개혁은, 개혁해야 할 필 요가 확실해진 다음에 행해야 하고, 그래야 모든 사람이 개혁의 정당함을 인정한다네. 이와같이 서두르지 않고 때가 익은 후에 행동하다면, 그 개혁은 원활히 진행되어 성공의 열매를 맺게 되 네. 개혁한 다음에는 그것을 바르게 지켜 나가야 후회할 일이 없 어질 것이고." "개혁할 시기가 따로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거야 두번 말하면 잔소리지. 개혁할 만한 능력이 있고, 또 개혁하고자 하는 열의가 충만하더라도, 때가 아직 이르지 않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직 개혁할 때가 아니라고 봐야할 걸 세. 함으로 개혁의 시기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에 비로소 개혁 하는 것이 순리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가 익기를 기다릴 일이 야. 조급함은 금물이므로 무리하게 개혁하려 하지 말고, 구습으로 인한 폐해가 현저해지는, 일테면 십간(十干)의 중간을 지난 여섯 째 기(己)의 날에 비로소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네." "그렇게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다가 한 세월을 다 보내는 어 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 친구 중에, 아직은 때 가 아니다, 하는 말을 주문처럼 외워대는 멋적은 녀석이 있는데, 서로 앞다투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할 때 언제나 뒤꽁무니 에 처져 사태를 관망하기만 합니다. 그것이 개혁하고자 하는 사 람이 취할 언행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어쩐지 비겁자의 자기 변명처럼 들리거든요?" "자네는 개혁을 원하는가, 아니면 혁명을 원하는가?" "가능하다면 둘 다겠지요." "개혁이란 폐해를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아직 개혁할 때가 이 르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공(功)을 탐 하는 일이 되어 되려 폐해를 격심하게 한다네. 때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개혁해야 공이 되는 것이지. 또한 개혁을 단행할 때는 신중히 심의한 다음에 실행에 옮겨야 하네. 개혁함에 있어 조급히 행동하면 흉하여 화를 입게 되거든. 설령 개혁하려는 일이 바른 도(道)에 맞는다 하더라도 분란이 일 어나 실패하게 된다는 점 명심해야 될 줄로 아네. 재삼 재사 의 논하여 신중히 실행할 때에 개혁은 성취되는 것으로, 그렇게 해 야만 정당하고 또 진실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이 야. 천하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서는 크게 개혁할 수 없네." "개혁의 때가 도래하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 니라, 제 말은, 그 개혁의 때를 앞당기기 위해 개혁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또 그랬을 때라야 개혁이 더욱 값지지 않겠느냔 것이지요." "천지혁시사시성(天地革而四時成)이라 했거든. 즉, 천지간의 음 양의 기(氣)가 서로 변혁하여 춘하추동의 사시(四時)가 이루어지 고, 만물이 그 사이에 생장한다는 뜻이네. 또한 현자는 사시의 변 혁에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천도(天道)에 따라 인사(人事)를 다 스리는 근본이 되는 까닭이라네." "그렇듯 때 타령이나 하고 앉았으면 세상에 언제 변혁이 오겠 습니까? 변혁을 앞당기기 위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전진해야 하질 않겠습니까?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되찾은 건 분명한 역 사적 사실이지만,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각자 들이 풍찬노숙하며 각고의 세월을 보냈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독 립이 더욱 값진 것이란 말씀이지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야. 낮과 밤이 바뀌는 데에는 하루면 족 하고, 그믐과 초하루가 바뀌는 데에는 한 달이면 족하고, 춘하추 동 사계절의 변화를 위해선 족히 일 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 다네. 밤과 낮의 바뀜도 변혁이고 계절의 순환 역시 변혁인 바 우리는 끊임없는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 셈 이지. 한데 말이야, 우리가 조급히 발걸음을 재촉한다고 해서 세 월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훌쩍 건너 뛸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 말 이라. 그렇듯 때를 무시해서는 변혁도 실패하기 마련이라네. 설문 해자(說文解字)를 보니 삼십년을 일세(一世)로 한다 그러더구먼.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의 교체를 이루는 데에도 무릇 삼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소요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마치 때가 되면 저절로 변혁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처럼 들립니 다. 흔히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여 뒷짐지고 짐짓 여유를 부리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한다는 경 구도 있질 않습니까? 변혁을 위해선 그런 수동적인 자세보다, 제 생각엔, 능동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훨씬 유용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네 마음이 조급하다는 증거일세. 진인사대천명 이면 그만이지 어리석은 인간이 거기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그런 게 다 욕심이라네, 욕심이야.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한다, 말이사 그럴 듯하네. 허나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보아선 안되고, 달리는 말의 마음도 충분히 고려해야 되 는 걸세. 달리고 싶지않은 말에게 억지로 채찍질을 가해보게나. 변혁은 고사하고 낙마하여 몸을 다치기 십상이라네. 사계절의 변화를 유심히 들여다 보게나. 거기에 거스를 수 없 는 하늘과 땅의 질서가 도사리고 있는바, 혁명을 완수하여 새 세 상을 창조하려는 사람이 어찌 변혁의 조짐을 소홀히 다룰 수 있 겠는가. 구데타라면 혹 모를까 그것은 어불설성이네. 이를테면 조 선왕조가 건국되어 멸망하기까지 자그만치 5백여 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네. 중국의 하나라가 멸망하고 은나라가 들어서는 데는 무려 4백 50여 년, 그리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일어서는 데는 무릇 6백여 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네. 특히나 주왕조의 건설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아직 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바, 저 태공망(太公望)이 위수 강 가에서 곧은 낚시대를 드리운 채 때가 무르익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자그마치 80년이라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끈질기게 80년을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범부가 감당하기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그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릴 수 있 었던 까닭은 물론 변혁의 때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요즘 젊은이들이 걸핏하면 혁명(革命)이니 투쟁(鬪爭)이 니 사수(死守)니 하고 골치에 붉은띠 질끈 두르고 아귀아귀 설쳐되더라만, 용기야 가상하지만도 그런 것들이 다 세상 변화의 때를 감지하지 못한 허장성세로 보임은 무엇이겠는 가. 거듭 말하거니와, 설령 변혁하고 혁명하려는 일이 바른 도(道)에 맞는다 하더라도 때를 맞추지 못하거나 경거망동 할 시엔 흉하여 오히려 화를 입게 된다는 것일세. 고로 내 말인즉 혁명의 대의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려는 게 아니 라, 또한 자네 흉중에 담겨 있는 뜻이 옳으냐 그르냐를 문 제 삼으려는 게 아니라, 그 대의를 실현할 수 있는 때가 바 야흐로 무르익었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 일세." "그렇다면, 어떻게 그 변혁의 때를 정확히 감지할 수 있 겠습니까?" 순만이 한 걸음 물러서는 기미를 보였다. "그걸 알면 내가 돼지막을 지키고 앉아 밤낮 술이나 퍼 마시며 한 세상 벗하고 살겠는가? 허허허헛……" 하고 모 주영감이 공허하게 웃어젖혔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는 건 아니구요?" 순만이 곧바로 물고 늘어졌다. "아니야, 나는 세상 변혁에 일조를 할 만한 인물이 못되 네. 하니 자네 스스로 터득하여 변화의 이치를 밝혀 보는 수밖에……."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책자가 있으면 일러주십시요." "글쎄, 책자만 가지고 얼마나 도움이 될라는지." 모주영감이 벽장 안에서 두 권의 책자을 꺼내 순만 앞에 내놓았다. 한 권은 [주역(周易)]이었고, 다른 한 권은 [우주변화(宇 宙變化)의 원리(原理)]였다. 순만으로선 그 두 권의 책자가 얼마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독 파해 보리라 작정했다. 달리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모주영감이 느럭느럭 다시 말을 이었다. "대인(大人)은 호랑이처럼 개혁한다는 말이 있다네. 그리하여 마치 가을이 되어 호랑이의 털이 윤기 있고 색채 선명한 털로 바 뀌는 것처럼, 대인이 이룬 개혁은 국가의 법률, 제도, 국세(國勢) 와 인심이 면목을 새롭게 하여 보기에 아름답고 분명하다는 것이 지. 왜냐, 대인의 개혁은 하늘에 따르고 사람에 응(應)하는 것으 로써 천하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 대인의 지성스러운 진실을 믿는 까닭이라네. 그것은 점쳐 볼 것도 없거니와 의심할 여지 또한 없 는 일이라네. 개혁이 일단락 된 다음에는 헛되이 결점을 찾아 변경을 기도하 는 일은 번거로와 오히려 흉하므로 바른 도(道)를 굳게 지켜 안 정을 취함이 옳네. 그랬을 때 재야(在野)의 소인들도 마음을 바꾸 어 이제까지 나쁜 방향으로 향하던 것을 고쳐 새로운 체계에 협 력하게 되는 것일세." 순만은 모주영감의 언설에 일단은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며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 동안 자신의 마음이 조급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만이 자신의 태 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만큼 감명을 받은 것은 아 니었다. 아직은 그러한 때가 올는지 어떨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두 사람 사이에 이윽고 긴 침묵의 강이 가로 놓였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장이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영감님이 모처럼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는 약속이 있어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종종 들러서 말씀으로 마음 수양을 해야 겠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내 방을 나왔다. 모주영감의 돼지막을 떠나면서 사장은 뜻밖에도 영감이 다변이 란 데 새삼 놀랐다. 순만을 대하는 태도에도 줄곧 진지함이 엿보 였다. 그렇다면 순만을 건달 보스인 사장과는 달리 대접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무려나, 두 사람에게는 잘된 일이지 싶었 다.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들어서자 불나비를 비롯하여 만두와 망 치, 남욱 등 중간 보스급 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장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들은 사장을 따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집무실로 들어섰다. 사장을 중심으로 모두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산본 사업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형 님." 하고 사업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만두가 먼저 말을 꺼냈 다. 그러자 불나비가 곧장 바통을 이어받았다. "게다가 긴급 사안이 있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결론 부터 밝히자면 남 좋은 일은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고, 그 동안 고생한 동생들을 위해 아파트라도 한 채씩 떼어줘야 하질 않겠는 가 싶습니다. 형님 의향은 어떻습니까?" "좋은 의견이 있으면 누구든 기탄없이 말해 봐." 사장이 좌중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만두 형, 택지 조성은 정확하게 언제쯤 시작되는 겁니까?" 망치가 꼽사리를 끼듯 불쑥 물었다. "이번 겨울이 물러가는 대로 공사에 착수하지 않을까, 하는 것 이 일반적 시각인데, 내가 파악한 정보로도 거기에서 큰 오차는 없을 것 같더군." "좌우지간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말이네?" "그러니까 동생들 생각을 안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말 이겠는데, 그렇다고 일일이 뒤를 다 보아줄 수는 없을 것 같고, 또 막바지에 무리수를 두는 것도 조금은 걱정스럽고……. 동생들 중에 현재 살림을 사는 놈들이 서른 명은 얼추 되는 것 같으니, 하다못해 그 중 절반 정도는 구제해 줘야 되지 않겠나 싶은 게 내 판단이야.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안성 발언을 마친 불나비가 꿈벅꿈벅 주위로 눈길을 돌렸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남욱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얘기해 봐." 하고 사장이 남욱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요즘 세입자들 딱지 문제로 산본이 무척이나 어수선한 상황이 질 않습니까. 시장 바닥처럼 시끌벅적한 것도 사실이구요. 제 생 각엔 세입자 딱지 건을 마무리짓고 신속히 산본을 뜨는 게 상책 이지 싶습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도 있거니와, 빡싱을 할 때도 상대를 사정없이 휘몰아칠 때가 있는가 하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재빨리 뒤로 빠져야 할 경우도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이를테면 타이슨식 전법을 구사할 때와 알리식 전법을 구사할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올시다. 제 판단엔 그 동안은 타이 슨식 전법으로 산본을 그로키 상태를 만든 과정이었다면, 지금은 알리식 전법을 구사하여 재빨리 뒤로 빠질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 다. 즉, 더이상 사업을 벌인다는 건 위험천만이라는 게 내 생각입 니다." "그럼, 동생들 입주시키는 문제까지도 다음 기회로 미루자 그 말이야?" 만두가 언성을 높이며 몰아붙였다. 걸핏하면 신중론을 들고 나 오는 남욱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과욕은 금물이라는 게 내 판단입니다. 그 동안 산본에서 벌어 들인 자금만도 수십 억쯤은 되고, 또 요즘도 형님 도장값으로 매 일 현찰이 입금되고 있는 실정이질 않습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조직을 확장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욕심을 부렸다가 뒤탈이라도 나는 날엔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건달이라기 보다는 남욱의 사고방식은 타산적 측면이 다분히 강했다. 클럽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남욱의 말대로 요즘 사장의 도장값으로 매일 현찰이 입금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파트 조성 시점이 코 앞 으로 닥쳐오자, 산본 지역 주민들에 대한 보상이 구체적으로 진 행되기 시작했고, 세입자들에 대한 입주권 낙찰 또한 본격적으로 불이 붙고 있었다. 그 중 세입자 보상 문제는 전에 시청측과 합의한 사항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대책위원회 측 대표인 사장과 시청의 시 장, 그리고 주택공사 사업장이 공동으로 세입자 확인란에 도장을 찍어야지만 법적인 인정을 받고 딱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 다. 세입자 확인란에 도장을 찍는 순서는 첫번째가 철거민 대책 위원회의 사장, 그 다음이 시장, 마지막이 주택공사 사업장이었 다. 즉 첫번째 통과문에 사장이 떡 버티고 있다는 계산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산본 지역에 오래 전부터 세입자로 살 던 사람들도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도장을 받으러 올 때 잘 봐주 십사 하고 봉투를 찔러주는 것이 상례가 되고 있었다. 사장이 먼 저 요구해서 그렇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알아서 기는 식이었 다. 게다가 비닐하우스나 돼지막, 우사 따위 불법 건축물에 세들 어 사는 사람들은, 일차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 않 을 수 없는 입장이라 봉투의 두께가 제법 실했다. 다시 말해 어차피 딱지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위장전입한 그들 이고 보면, 사장에게 도장을 받는 조건으로 백만원 정도의 뒷돈 을 찔러주는 것이 그리 아까울 게 없었다. 산본 지역엔 사장의 도장을 필요로 하는 세입자들이 무려 2천여 세대를 넘어선지 이 미 오래였다. 그 중 절반쯤의 도장 값만 계산해도 현금으로 고스 란히 10억이 떨어진다는 계산이었다. 함으로 그즈음의 산본 대책 위원회 사무실은 때 아닌 돈벼락으로 비명을 질러대야 할 판국이 었다. 그 동안 검은 사업을 벌여 긁어모은 자금과, 작금의 도장 값만 으로도 조직을 확장하는데 충분하다고 남욱이 주장하는 이면에 는, 그같은 사실이 십분 뒷받침 되고 있는 것이었다. "전부터 느껴온 사실이지만 욱이는 너무 소심한 데가 있어. 기 회란 항상 있는 게 아니라구. 내가 산본 사업을 이끌어온 장본인 으로서 말하겠는데, 마지막으로 큰 건 하나 더 터뜨리고 손을 털 어도 늦이 않다는 거야. 물론 형님의 승인을 받고 추진할 일이긴 하지만 말야. 어떻습니까, 형님 생각은?" 만두가 자기 의견을 첨부하여 사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큰 건을 터뜨리고 손을 턴다는 건지, 자세히 이야기해 봐." 사장이 느긋하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난 번 꾀보를 잡아왔을 때 말입니다, 형님. 달밤의 코카콜라 하치장 기억하시죠? 그곳이 한적하게 떨어져 있는 곳인 데다가 전부터 울타리가 처져 있어서 비밀리 야간공사를 벌이기에는 최 적의 장소라고 판단됩니다. 하치장 관리인에게 기천만원쯤 푹 찔 러주면 쥐도 새도 모르게 50동 정도는 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 중 절반은 살림을 하는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형님을 비롯해서 중간 보스급들에게도 한 채씩 분양해 주고, 나머지는 막차를 타 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는 겁니다." 만두가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검은 사업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아왔던터라 누구보다도 욕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신도 시 건설이 임박해지자 막판 경기를 노리고 가격이 폴짝폴짝 뛰어 오르고 있는 현실도 톡톡히 한몫 작용했으리라. 물량만 있으면 뒷거래는 어렵지 않을지도 몰랐다. "코카콜라 하치장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요, 형님?" 불나비도 구미가 당기는지 선뜻 동의하고 나섰다. "망치 생각은 어떠냐?" 사장이 망치를 쳐다보았다. 망치가 남욱의 주장에 동조하면 가 부간의 동수가 됨으로, 결정권은 사장에게로 넘어가는 셈이었다. "세입자들 딱지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산본이 상당히 어수선해 졌습니다. 그같은 틈바구닐 이용하여 속전속결로 치고 빠진다면 승산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겁니다. 한데 벼라별 놈들이 다 설쳐대 는 추세이지를 않습니까. 그러니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고, 저로서는 쉽게 판단할 수가 없는데요? 형님 결정하는 대로 망치는 그냥 따를까 합니다." 결론은 기권이라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한건 더 터뜨릴 수 있겠니?" 사장이 다짐을 받듯 사업장인 만두를 향해 물었다. "그 점은 염려마십시요. 만두가 누굽니까? 형님 허락이 떨어지 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일을 성사시켜 놓겠습니다." 만두는 어디까지나 자신감이 충만했고, "기왕에 판을 벌인 거 한건만 더 터뜨리죠?" 하고 부추긴 것은 불나비였다. 사장은 한동안 사색에 잠겼다. 클럽을 쌍칼에게 위임하고 산본 으로 떠나오던 때가 불현듯 생각났다. 세력을 확장하여 건달 세 계를 천하통일하려는 큰 뜻이 있었다. 사장의 입에서 이윽고 최 종 단안이 떨어졌다. "좋다, 최단 시일 안에 일을 깨끗이 마무리짓도록!" 그때였다. 모주영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물의 안쪽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벽을 쌓아라. 밖을 향해 나아가기 보다 물러나 안을 견고히 지키는 것이 좋으리라. 두레 박이 깨어져 물이 샐 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하지만 조심하면 되지, 뭘. 욕심을 버리고 조심하면 되는 게야. 허허허 헛…… 사장은 불안감을 떨쳐버리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산본을 떠났던 만두와 망치가 보름만에 되돌아온 것. 그리고 꾀보가 후한을 남긴 것 따위의 예측이 맞아 떨어졌다 해도 모주 영감의 말이 전부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노스트라다 무스라의 예언도 다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닐 테고, 원숭이도 나무 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 아니던가. 거기에 모주영감에 대한 묘한 반발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조직은 사장 자신이 이끌어가는 것이지, 모주영감의 모호한 말 에 좌지우지 되어선 안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번 결정한 사항 을 되돌린다는 것은 건달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한번 가기 로 결정한 길이라면 설령 함정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건달이라면 기꺼이 가야하는 것이었다. 후회도 없고 머뭇거림도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건달의 길이었다. 욕심을 자제했어야 옳았다는 걸 그러나 사장은 뒤늦게야 깨달 았다. 코카콜라 하치장 공사를 눈치 챈 일부 주민들이 시청에 민원을 넣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청 측에서는 대책위원회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며 펄쩍 뛰었고 곧바로 철거반원들을 급파했다. 시청의 철 거반원들과 대책위원회 측 조직원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팽팽한 대치 국면이 초래되었다. 그 과정에서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시청 철거반원 세 명이 치명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간 것이었 다. 일을 저지른 졸개들을 긴급히 산본 밖으로 도피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뒷수습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책위 원회 측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사장은 비로소, "아, 내가 욕심이 과했구나!" 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지나 버렸고 물이 엎지러진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위협이 땅거미처럼 소리 소문없이 다가오 고 있었으니……. 12. 풍운 이른 새벽에 사장은 아우라지강가에 닿았다. 희끄무레한 여명 속으로 찰방찰방 강물 흘러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인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듯 강기슭에 부딪치는 물 살이 제법 싱그럽게 느껴졌다. 사장은 마른 풀숲을 헤치고 나루 터 쪽으로 내려갔다. 강을 따라 기인 모래톱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다. 늙은 사공이 나루터에 앉아 꿍얼꿍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 었다. 사장이 가까이 다가가자 늙은 사공이 별안간 몸을 돌려 사 장을 쳐다보았다. 사장이 강 건너 편으로 눈짓을 보내자 사공은 두말없이 나룻배에 올라 삿대를 잡았다. 꼬물꼬물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우라지강의 새벽잠을 흥건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사장 이 허겁지겁 사공을 뒤따라 나룻배에 올랐다. 삐걱삐걱 노를 젓던 사공이 홀쩨 사장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이봐요, 젊은이. 꼭두 새벽부터 강은 어째 건너려는 게요?" 하 고, 마치 흘려 버리는 말인 듯 물었다. 사장이 앉은 자세에서 사공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 공이 어중뜨게 강 건너 편으로 시선을 뿌렸다. 크고 작은 산들이 어깨동무하듯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보였다. 푸르스름한 필터를 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 건너 편 풍광은 아련한 정적에 파묻혀 있었다. "사람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영감님."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그렇담, 진즉에 말을 했어야지. 젊 은이가 배를 잘못 탄 것 같구먼……" 사공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시나브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사장이 앉은 자리에서 공처럼 튕겨 일어서며 싸늘한 눈빛으로 사공을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배가 기웃뚱하고 하마터면 뒤집힐 뻔했다. 늙은 사공이 삿대로 들어 내리칠 듯한 기세로 발칵 역정 을 내면서, "앉어, 배 뒤집히겠어!" 하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음을 짓는 것이었는데, 순간 사장은 실성 한 노인네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사장은 늙은 사 공의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뱃바닥에 엉덩이를 깔았다. "왜, 집 나간 마누라라도 찾아가는 길이나?" 혼자 소리로 중얼거리며 사공이 노래를 풀어대기 시작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가만히 들어보니 정선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었다. 태백산 기 슭의 모텔에 머물 때 승혜는 꼭 한번 사장이 듣는 앞에서 그 노 래를 불렀었다. "네, 맞습니다. 집 나간 아내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제 발 뱃머리를 돌리지 마십시요, 영감님. 제가 배삯은 충분히……" 하는데 사공이, "엇다, 누가 선가(船價) 때문에 그러나." 하고는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어 썩썩 문지른 다음 힘차게 노를 잡더니, "그럼 다시 가던 물길로 돌아가세. 젊은이 사정이 딱하다 니……. 나야 나룻배 임자일 뿐 갈 방향이야 손님이 정하는 게 옳을네라." 삐그덕 삐그덕 노를 저으며 다시 뱃머리를 돌리는 것이었다. 사장은 휴우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에서 식은땀 이 솟아 주르르 골을 타고 엉치 쪽으로 흘러 내렸다. 정선아리랑 의 목메는 가락을 싣고 나룻배는 참방참방 굽은 강을 가로질렀 다. 강줄기는 하류를 향해 사심없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럴 때 강줄기는 무심히 제 갈 길을 가는 청정한 도량 같았다. 흘러 흘러 내려가다 산뿌리를 만나면 유유히 곡선을 그리며 비껴가고, 산은 또 산대로 강줄기를 만나면 미안합니다 두어 걸음 물러서 고……. 한참만에야 뱃머리가 아우라지강 건너 편 뱃터에 닿았다. 사공 이 삿대를 강바닥에 쑤셔박아 나룻배를 고정시켰다. 뒤에서 누가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장은 펄쩍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솔밭 사이로 난 오솔길 쪽으로 재게 걸음을 옮겼다. "이봐, 젊은이!" 하고 등 뒤에서 사공이 불렀다. 사장은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걷기만 했다. "병든 마누라를 보더라도 과히 놀라진 말게나. 허허허헛……" 늙은 뱃사공의 웃음 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을 때렸다. 사장은 구불구불 뱀처럼 휘어져 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했다. 승혜의 고향마을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건만, 전생에서 수없이 드나들었던 것 같이 길이 훤하게 눈에 익었다. 길가의 풀 이며 돌뿌리까지. 승혜는 고향집에 있었다. 오래도록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가, 급기야는 지쳐버린 여인처럼 삽짝 안으로 들어서는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삿갓 모양의 지붕 아래 쪽마루 끝이었다. 이제 막 기웃기웃 동산을 넘어온 아침 햇살이 승혜의 하얀한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갓 아이를 낳은 여인처럼 승혜의 모습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 었다. 염병이라도 앓고 난 사람처럼 온몸에 땀이 후줄근하니 배 어 있는 것도 같았다. 입술은 부르터 버석버석해 보였다. 방울 무 늬 원피스 자락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는 마른 장작개비처럼 뺏싹 야위었다.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안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승혜는 멀뚱멀뚱 사장을 치어다볼 뿐 무어라 한 마 디 말이 없었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사람 같았다. "돌아가자." 사장이 덥썩 승혜의 야윈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어디루요?" 승혜의 눈망울에 설핏 이슬이 맺혔다. "어디긴? 나랑 같이 산본으로 돌아가야지." "언니는……, 아니, 준호 엄마는요?" "그런 게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 만 돌아가자." 사장이 승혜를 일으켜 세웠다. 산들 바람에도 날리는 검불인 양 승혜의 몸은 가벼웠다. 승혜가 어지럽다며 사장의 어깨에 몸 을 기댔다. 사장은 등을 돌려 승혜를 업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아우라지강 쪽을 향해 뒤뚱뒤뚱 걸었다. 비로소 생각하니 승혜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승혜네 마을에는 사람이 아 무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누구 한 사람에 눈에 띄지 않았 던 것이다. 사장은 승혜를 업고 다시 아우라지강 기슭에 닿았다. 늙은 사 공이 강기슭의 소나무에 등을 기대인 채 퍼더버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고맙게도 강을 건너가지 않고 사장을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그새 돌아갈 참이나?" 사공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을 한 차례 추스렸다. "네, 일이 급하게 됐습니다. 아내가 병이 들어서요." 사장이 재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공은 늙은쟁이 특유의 거드름 을 피우며 도시 배에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이 급하게 됐다니까요, 영감님!" 사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사공은 민적거리며 아예 딴청이 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품 속에서 신문 한 장을 꺼내 확 펼치 더니, "이게, 정녕 자네 얼굴이 맞으렷다!" 하고 되받아 소리쳤다. 사장은 펼쳐보인 신문과 늙은 사공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신문에 나와 있는 얼굴은 분명 사장 자신 의 얼굴이었다. 무슨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된 듯 손에는 수갑이 채여져 있었다. 그러나 사장이 더욱이나 놀란 것은 늙은 사공의 변화된 모습이다. "아니, 영감님이 여긴 어쩐 일로……?" 늙은 사공이 어느 결엔가 돼지막의 모주영감으로 둔갑해 있었 던 것이다. 모주영감이 휘적휘적 나룻배 위로 오르더니 잽싸게 노를 움켜쥐었다. 놀란 사장이 승혜를 엎은 채 뒤뚱뒤뚱 나룻배 쪽으로 다갔을 때, "이것으로 자네와의 인연도 끝나려는 모양일세 그려. 욕심을 버리라고 내 그렇게나 일렀거늘, 허허허헛……" 모주영감이 삿대를 밀어 나룻배를 강 기슭에서 분리시켰다. 사 장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 채 망연자실했다. 모주영감을 태 운 나룻배가 도용도용 강심을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모주영감의 공허한 웃음 소리가 오래도록 귓속에서 부스럭거렸다. 사장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모주영감의 노랫소리인가 싶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 소리 는 사장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채 아직껏 등에 매달려 있는 승혜 의 것이었다. 사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감님……!" 떠나가는 모주영감을 향해 허위허위 손짓했다. 가물가물 모주 영감이 모습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우라지강 물결 흐르는 소리가 아득하니 두 귀를 적시고 있었다. "콰앙 콰앙!"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사장은 꿈에서 깨었다. 그와 동시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부자리에 흥건하게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참으로 해괴한 꿈이구나……." 사장은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당연하게도 승혜는 곁에 없었다. 문득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4시를 마악 넘어서 고 있었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그 사이 깜박 잠들었 다가 꿈을 꾸었다는 계산이었다. 사장은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 아 둔 담배를 찾았다. "콰앙 콰앙!"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새벽인데 무슨 일일까? 사장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몽사몽이었다. 꿈결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방문을 열고 몽유병 환자처럼 비척비척 거실로 나갔다. "한 밤 중인데, 무슨 일일까요, 형님?" 건넌 방에서 걸어나온 허담이 입아귀가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꿈결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허담이 밖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나가 볼테니, 그만 들어가 자거라. 욱이는 자니?" "욱이 형은 어제 과음을 하더니만 시방 곯아 떨어졌습니다. 업 어치기로 메어꽂아도 모를 정돕니다."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사장은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누구냐?" 하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문이나 열어!"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순간 사장은 짜부가 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사장이 밖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어떤 놈이 예의도 없이 새벽부터 난리야?" "아 글쎄, 문이나 열어 보라니깐!" 상대편이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쳤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코카콜라 하치장에서의 칼부림 사건은 이미 일단락 되지 않았던가. 사장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창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일단 피신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총기를 휴대한 형사들이 어둠 속에 매복하고 있다면……? 아니, 까닭없이 그들을 피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어느 새 해가 떠올라 희뿌옇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 직은 이른 봄이었다. 아침 기온이 차갑게 살갗에 와 닿았다. 동사무소 앞 공터에는 백차와 닭장차, 봉고차가 빽빽하니 들 어차 있었다. 오전 10시쯤이 되자 산본 지역에서 붙잡혀 온 사람으로 동 사무소 앞 공터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닌 밤 중에 벼락을 맞고 붙잡혀온 사람들이었다. 사장의 수하에 있던 졸개들과 산본 청년회 회원들만도 오륙 십은 넉근히 헤아릴 만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투기꾼 복부인 거간꾼 따위들이었다. 정오쯤에 서대문 치안본부에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은 닭장 차에 짐짝처럼 실려왔지만 사장은 산본으로 내려갈 때처럼 짚 차를 타고 다시 올라왔다. 치안본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조서실로 끌려 들어갔다. 사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원 지하 유치장으로 인솔되어 집단 수용되었다. 조서실에는 두 개의 방이 나란히 이웃해 있었다. 조서실 방 안에 갇혀 사장은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무엇이 어디 서부터 튕그러진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줄담배를 태우며 온갖 가능성을 짚어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답 답했다. 그때 발칵 문이 열리더니, "야 이 새끼야. 누구 마음대로 담배를 피우랬어?" 하는 험악 한 소리가 날아와 사장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사장은 천천히 눈을 치떴다. 조사관 둘이 사장의 건너 편 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한 놈은 양아치 저리 가라로 인상이 험상궂었고, 다른 한 놈은 주먹코였는데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인상이었다. "당신이 산본 대책위원회의 차회장이야?" 험상궂은 사내는 초장부터 반말 지껄이였다. 사장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당신 하루에 담배 얼마나 피워?" 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는 수작이 우선 역겨 웠다. "주량은 얼마나 되나?" 역시 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험상궂은 사내는 그러나 끈 질기에 결혼은 했느냐, 결혼을 안 했다면 애인은 있느냐, 하는 빤한 통빡을 굴려대고 있었다. "그만 걷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사장이 퉁명스레 내뱉자, "좋소. 우리도 그게 편해. 당신이 저지른 죄를 잘 알고 있겠 지?" "난 법을 어긴 적이 없소." "없어? 좋아, 조목조목 내가 일러줄까?" "그래 주면 고맙겠소." "하긴 순순히 자백할 리가 없겠지." 험상궂은 사내가 조목조목 범법 사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산본 지역 청년회를 장악한 후 철거 대책위원회란 간 판을 내걸었군 그래. 그 후 뒷구녕으로 더럽고 냄새나는 사업 을 벌여 검은 돈을 긁어모으고……, 수법이 제법 치밀했더군." 잠시 사장을 향해 안면 근육을 씰룩해 보이더니 계속했다. "내가 하나하나 당신이 저지른 죄상을 일러줄 테니 잘 판단 하고 오리발을 내밀어 보라구. 한 달쯤 전에 금정리 코카콜라 하치장에 불법 가건물을 들이는 공사를 벌였더군. 그곳 현장 에서 시청 철거반원 세 사람을 칼로 찌른 사건이 벌어졌어. 일을 저지른 졸개들이야 신속히 피신시켰을 테지. 그보다 훨 씬 전에는 시청 철거반장과 철거반원을 식칼로 쑤셔 병원에 입원시킨 바 있고, 비닐하우스 돼지막 우사 따위를 주거용으 로 전환시켜 방 하나 당 오백만 원씩 받고 불하해 준 사실이 있으며, 또 최근에는 불법 가건물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들에 게 도장값이란 명목으로 기십만 원에서 백만 원 단위에 이르 기까지 뒷돈을 받아 챙겼고……. 그뿐이 아니지. 한때는 주민들을 선동하여 조직적으로 시청 철거반에 대항하도록 배후조정하고, 온갖 사기행각을 벌이면 서 주먹들을 끌어들여 산본파라 칭하고, 무창기업이란 철거 용역업체의 사장과 협잡하여 시청 철거반을 무력화시키는 한 편, 산본 지역 자체 치안활동을 한답시고 시청으로부터 활동 비를 받아 착복하고, 또한 선량한 유부녀들을 겁탈하여 조용 한 가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그 따위 더럽고 파렴치한 짓을 골라서 자행하고 사주한 장 본인이 이제와서 법을 어긴 일이 없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우리가 그 따위 수작에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알았다면 크게 오산이야! 이봐, 차회장! 내 입으로 구질구질한 비리까지 죄다 까발리기 전에 건달답게 깨끗이 자백하고 선처를 바라는 게 좋지 않겠어? 차회장, 아니 말이 좋아 회장이지, 서울에서 세븐 클럽을 운영하던 건달 조직의 두목이란 것까지 우리가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돼." 사장은 그러나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듣고만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본에 끊임없이 잡음이 들끓자 청 와대 민원실의 고위 간부가 치안본부로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치안본부에서는 특별전담반을 편성하여 한 달 넘도록 비밀리에 산본 지역에서 파생되고 있는 문제점을 내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책위원회에서 저지른 불법 행위의 증거를 상당한 정도 포착하는데 성공했고, 그런 다음 에야 디 데이를 정하여 일제 소탕작전을 펼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사장은 자신의 등 뒤에서 그와 같은 내사 작업이 벌어 지고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벌여 놓았던 사업을 조속히 갈무리하고 탁탁 손을 털고 산 본을 뜨자는 남욱의 주장이 백번 옳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 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죽은 자식의 식은 불알 만지기였다. 욕심을 자제하지 않으면 두레박이 깨져 물이 샌다고 경계해 주었던 모주영감의 말도 새삼 되새기게 되었으나 이제는 그것 도 헛일이었다. "어쩔텐가? 건달 두목답게 깨끗이 자백하는 게 좋지 않겠 어?" 험상궂은 사내가 철철 조롱기 넘치는 눈빛을 보내며 이죽거 렸다. 험상궂은 사내의 지적은 하나도 그릇된 것이 없었다. 조 목조목 다 옳은 말이었다. 그렇듯 비밀리에 내사한 정보를 가 져다가 코 앞에 들이미는데, 제아무리 건달 세계에서 굴러먹 은 사장이라 하지만 무슨 재주로 그 그물망을 빠져나갈 것인 가. 게다가 이미 자유를 박탈당한 몸이 아닌가. 치안본부에서 한 달 이상 내사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 듯 했다. 지난 날 수원 지검의 검사와는 대하는 태도부터가 판이 하게 다랐다. 허나 사장은 그럴수록 고분고분 상대방의 페이 스에 말려 들어가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순순히 백기를 든다 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기 하지만 코 앞에 닥쳐 온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 지, 생각하면 아득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본격적인 취조에 들어갔다. 사장은 시종일관 '모른다'와 '아니다'란 낱말만을 되풀이했을 뿐 단 한 건도 시인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모 른다'와 '아니다'란 두 낱말밖에는 배운 바 없다는 듯이. "야 이 새끼야. 명색이 건달 두목이란 놈이 이럴 수가 있 어? 그러면서도 네가 대책위원회 회장이고 산본파의 보스냐? 치사하고 더러운 새끼. 그래, 그 많은 사건들이 네 놈의 지시 없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 말이냐? 에라이, 똥물에 튀겨 죽을 놈. 얼라 니노지에 붙은 밥풀데기를 떼어먹다 숨이 막혀 죽을 놈!" "……" 사장은 그러나 지긋이 감정을 눌러 참았다. "사대문 안에서 대학 물까지 먹은 새끼가 아주 비겁하구만." 험상궂은 사내가 대학을 중퇴한 사실까지 들먹이며 비위를 긁어댔다. "……" 절망감에 사장은 눈 앞이 캄캄했다. 허나 그것은 놈들의 정 보 수집이 얼마나 치밀했던가를 가늠케 하는 대목에 다름아니 었다. "이봐, 독사! 정말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사장의 별호가 독사였다는 사실까지도 그들은 파악하고 있 었다. "……" 사장은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벽을 인식하며 절망했다. 는적는적 거미줄처럼 감겨오는 이 그물망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천길 낭떠러지 위의 고독감이 이런 것일까. 허나 그럴수록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증거를 들이밀 때까지. 그러니까 부인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 다. 그렇지 않으면 사장의 인생이 그쯤에서 끝장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승혜의 파리한 모습과 지선의 고집스런 얼굴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아들 준호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불나비와 만두, 망치와 남욱 그리고 수없이 많은 졸개들이 모습이 파노 라마처럼 의식 속에서 부침했다. 모주영감과 강순만의 모습도 언뜻언뜻 의식의 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바람에 등불이 흔들리듯 그같은 환영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건 어쩌면 심약해져 있다는 증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와해를 막아줄 불나비와 자금줄을 관리하는 만두가 아직은 밖 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가닿자,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불빛 을 대하는 듯 불끈 힘이 솟기도 했다. 망치와 남욱 그리고 많 은 졸개들은 지금 치안본부의 지하 유치장에 갇혀 있을 것이 었다. "더럽고 치사스러운 새끼!" 염장을 긁어대는 소리에 사장은 번득 본정신으로 돌아왔다. "콰앙!" 부셔져라 문짝을 닫고 취조를 위해 들어왔던 두 사내가 밖 으로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장은 고개를 숙인 채 돌파구를 모색하느라 골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험상궂은 사내와 주먹코 사내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은 숙였던 고개 를 들었다. 두 사람 곁에는 시청 철거반의 장반장이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저 친구, 당신이 잘 아는 사람이지?" 험상궂은 사내가 턱짓으로 사장을 가리켰다. "네, 산본 대책위원회의 차회장이십니다." 장반장이 즉각 대답했다. "차회장 좋아하시네……." 딴죽을 건 다음 험상궂은 사내가, "암튼 좋아,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해 대답해야 돼?" 하고 장반장을 옥죄었다. 이른 바 피해자 대질 신문으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였 다. 순간 사장은 바싹 긴장했다. 그러고는 이글거리는 독사 눈 으로 장반장을 노려보았다. 장반장이 사장의 시선을 피해 황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저 친구가 당신의 복부를 식칼로 쑤셨지?" 험상궂은 사내가 대뜸 직격탄을 발사하며 공략해 들어왔다. "아, 아닙니다. 차회장이 직접 식칼로 쑤신 게 아닙니다." 장반장이 펄쩍 뛰는 시늉을 해보이며 부인했다. "하아, 참 답답하네. 저 친구의 사주를 받은 놈한테 찔렸잖 아? 그래서 한 달 넘도록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내 말이 틀려?" "병원에 입원이야 했었죠. 하지만 차회장의 사주를 받았는 지, 그,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한 바 없는데요? 사, 사실이 그렇 습니다." 장반장은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하아, 참 사람 미치게 만드네……. 그렇담, 그때 상황을 당 신이 보고 겪은 대로 ㄸ방ㄸ방 얘기해 봐!" 험상궂은 사내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쳤다. "기, 기억이 잘 안나는데요?" 장반장이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굽신거렸다. 마치 선처를 바라는 죄인 같았다. "뭐, 이 따위 새끼가 다 있어?" 험상궂은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 "철썩!" 하고 장반장의 뺨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가 났다. "꺼져, 이 새꺄! 너 같은 새끼가 국록을 축내고 있으니까, 건달들이 제 세상을 만나 설쳐대는 거야, 알어? 나 원 참, 이 러니 한심한 세상이지!"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어, 억울합니다." 장반장이 뺨따귀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징징거렸다. "억울하면 법원에 고소하던지. 이 새끼야, 내 눈에서 빨리 꺼지기나 해!" 허리를 굽힌 자세로 장반장이 쭐레쭐레 취조실을 나갔다. 장반장의 후속으로 대질 신문자 물망에 오른 사람은 박용남 이란 사내였다. 박용남은 산본 지역의 비닐하우스에 세들어 살다가 딱지를 얻기 위해 사장에게 백만 원권 수표를 건네고 도장을 받아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언제쯤인지는 정확히 기 억할 수 없으나 박용남의 인상을 보니 분명 초면은 아니었다. 입술 왼쪽 아랫부분에 검은 사마귀점이 돋을새김처럼 톡 튀어 나온 사내였다. "박용남씨, 저 친구에게 도장값을 상납한 게 사실이지요?" 험상궂은 사내가 이윽고 대질 신문을 시작했다. "네, 사실입니다." 교활한 사람 특유의 눈흘김으로 박용남이 사장의 표정을 살 폈다. "좋습니다, 좋아요. 대체 얼마를 주었소?" "백만 원을 줬습니다. 그게 공식적인 가격이니까요." "현금으로 주었소?" "아닙니다. 수표로 주었습니다." 그때 사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새끼들, 뒷구멍으로 짜고서 생사람을 잡으려 드네. 내가 죽을 때까지 유치장 안에 갇혀 지낼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인 데, 너 이 새끼 말 똑바로 해! 허튼 소리 짹짹거렸다가 나중에 마빡에 구멍이 뚫려도 책임 못져. 언제, 어디서, 누구 보는 앞 에서 줬어? 너 이 새끼, 어서 똑바로 말해봐!" 사장이 기세등등이 설쳐대며 빠득빠득 이를 갈아붙이자 박 용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어 급격히 기세가 ㄲ인 박 용남이, "글쎄요, 한 달쯤 전에 제가 분명히 수표를 건네준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하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물실호기라. 그런 기회를 놓칠 사장이 아니었다. 험악하게 목자를 부라리며 사장이 계속해서 박용남을 코너로 몰아붙였 다. "좆까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씨벌 놈! 멀쩡한 사람 하나 죽 이려고 니들이 작당을 한 모양인데……, 좋아 내가 참지. 그 대신 내게 건네줬다는 수표 번호를 대봐. 확실한 증거를 대보 란 말야, 이 새꺄!" "그, 그거야, 이제와서 알 수가 없죠." 박용남이 쭈볏쭈볏 뒷걸음질칠 낌세를 보였다. 그러자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틀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인 듯 주먹코 사내가 나서면서, "이봐요, 박용남씨. 저 친구에게 백만 원을 건넨 건 어쨌거 나 사실이지 않소. 잘 판단해서 대답해 봐요, 겁먹지 말고." 하고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그러나 박용남은 한번 꺾인 기세를 금세 되찾을 만큼 강심 장의 사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리숙한 사람 또한 분명 아 니었다. 자칫 말을 잘못하는 날이면 이마에 구멍이 뚫릴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게다가 사장이 위험한 인물이란 게 드러 난 마당에 공연히 원한을 사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계산을 못했을 리도 없었다. 어차피 아파트 입주권은 자기 손아귀에 쥔 상황이었다. 사장 에게 백만 원을 헌납한 것이 아깝기는 했으나 자기만 그런 것 은 아니었다. 박용남은 과거지사를 그만 잊고 싶었다. "글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돈을 건넨 것도 같고, 안건넨 것도 같고, 도무지 긴가민가해서……,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뭐요!" 험상궂은 사내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다니깐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할 주제도 못되고……" 그러면서 박용남은 출입문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하여 두번 째 대질 신문도 사장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세번째로 불려온 사람은 뜻밖에도 돼지막의 모주영감이었 다. 주먹코가 노인을 대접한답시고 의자를 갖다놓으며 앉기를 권했다. 모주영감은 두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두 분이 잘 아는 사이지요?" 이번에는 주먹코가 포문을 열었다. "네, 잘 아는 사입니다." 모주영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 하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주영감이 어떤 불리한 증언을 하던, 장반장이나 박용남에게처럼 공포감을 조성하여 위기를 넘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공포감을 조성한다고 한들 씨알이 먹혀들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장은 부끄러웠다. 어쩌면 모주영감이 예고해 주었던 말을 소홀히 한 죄값을 치 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영감님." "백번 조심하라 일렀다한들 이제와 그것이 뭔 소용이 있겠 는가? 자네가 선택한 길이니 자네가 감당할 수밖에. 마음이나 강단지게 먹게." 모주영감은 돼지막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처럼 태평했다. "저 친구가 영감님의 돼지막을 가로채어 불법 공사를 벌인 게 사실이지요?" 주먹코가 끼어들어 본격적인 신문을 시작했다. "그건 순사 나리가 잘못 알았소. 사실을 말할 것 같으면 우 린 동업자요. 젊기는 하나 저 사람과 나는 막역지우고." "동업자라면, 영감님도 그 일에 직접 개입했다는 말씀아닙 니까?" "그건 마음대로 해석해도 좋소."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영감님도 처벌을 받게 되는 데두 요?" "아무려면 어떻소. 나는 그저 저 친구 얼굴이나 한번 볼까 싶어 자진해서 찾아온 사람이오. 거 왜 옛말에도 있질 않습디 까,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일수록 외면해서는 안되는 법 이라고." "영감님, 지금 우릴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오, 그런 불순한 마음 먹은 적 없어요. 순사 나리께서 액면 그대로 믿어주실지 모르겠으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돼지 막은 저 친구를 위해 내가 자진해서 내놓은 것이요. 저 친구 가 완력으로 빼앗은 게 아니다 그런 말이에요. 늙긴 하였으나 완력이라면 저 친구 못지 않은 사람이요, 내가. 허허허헛……"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는 영감님이군." 주먹코가 혼잣소리로 꿍얼거리더니, "수사에 별 도움이 안되니 그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말입니 다. 오늘처럼 공무를 방해할 시엔 영감님도 처벌을 받는다는 걸 명심하세요. 이번엔 특별히 선처해드리는 겁니다." 하면서 모주영감의 겨드랑이를 툭툭 쳤다. 그만 일어나 나가라는 신호였다. "잠깐,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모주영감이 느긋하니 사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아무쪼록 몸 조심하게. 몸이 성해야 나중에 좋은 일도 할 수 있질 않겠나." "지난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영감님을 뵈었습니 다." 왜 그 순간에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 밤 꿈 속에서 아우라지강을 건너던 생각이 불쑥 되살아났다. "꿈길에서 나를 만나다니, 마음 속에 빚진 것이라도 있었나 보지. 허허허헛……" "언젠가 영감님이 말씀하셨지요. 어차피 도적놈뿐이 더는 못될 상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그 말씀에는 변함이 없습니 까?" "그것이 가시처럼 마음에 자꾸 걸렸던 모양이구먼?"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듣기 좋은 말도 물론 아니겠지 요." "세상에 듣기 좋은 말만 있을려구." "그러지 말고, 속 시원히 말씀 좀 해주십시요." "새삼스레 무슨 말?" 모주영감이 어린애처럼 실쭉 웃으며 사장을 쳐다보았다. "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셨으면……?" "우레 소리가 울려 퍼져 백리 사방에까지 들린다 해도, 자 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바로 붙잡고 있으면, 훗날 담소하며 즐거워 한다고 했네. 오늘의 일로 너무 상심하진 말게나. 어차 피 한번 왔다가는 인생사,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고, 밤이 깊으면 머지않아 먼동도 트기 마련이라. 구불텅 구불텅 한 세상 굽이치듯 흘러가면 그뿐인 게야. 사람살이란 게 세상 변화 속에 제 몸 하나 그저 의탁하면 지족인 것을……" "무슨 뜻인지 곰곰이 되씹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부 러 찾아주셨건만, 저로선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와 같은 못된 도적놈 이제는 그만 잊어버리시고, 편안히 한 세상 벗삼아 노닐다가 서방정토로 입적하십시요." "시끄럽네, 이 사람아! 내 아직 저승갈 때도 되지 않았거니 와, 자네 또한 이것으로 인생사가 끝나는 게 아닐 터인데, 어 째 언네처럼 죽는 소리야, 츠츳!"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주영감은 묵직한 바 위같았다. 둘이 마주앉아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이 겨자씨처럼 작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했던 생각이 났다. "순만씨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사장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려, 아주 잘 지내고 있다네. 그 사람이 몇 달만 일찍 산 본에 왔더라면……"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 여간 신실하지가 않어. 자네가 찾던 사람으로는 제 격이던데 말이야. 하늘이 자네를 담금질하려는 겐가? 허허허 헛……" "그래도 오늘의 제 모습을 후회하진 않겠습니다." "그거야 오롯이 자네 몫이고. 나는 이만 돌아갈라네." 모주영감이 바람을 일으키듯 휙하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러고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시적시적 밖으로 걸어 나갔 다. 갑자기 취조실 안이 텅 빈 적막강산으로 돌변하는 듯했다. 마음 속이 한편으론 허전했고, 다른 한편으론 기운생동하는 어떤 기로 충만한 듯했다. 모주영감이 자신에게 기운을 불어 넣고 갔다고 사장은 생각했다. 잠시나마 모주영감과의 면회를 허락해준 주먹코가 고마웠다. 저녁을 먹는 시간에 다행히 남욱과 망치의 얼굴을 볼 수 있 었다. 망치는 그렇다치고 남욱이 붙잡혀 들어온 것은 의외라 서, "욱이 너는 어떻게 된 거니?" 하고 물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형님도 없고 담이도 안보이고, 해서 산본에 갑자기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내려갔다가 짜부들 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럼, 담이는?" "글쎄요, 통 보질 못했습니다. 여기 잡혀 들어오지도 않았구 요." "알았다. 암튼 모든 걸 내게로 미뤄라. 너희들은 모르는 일 이라고 뒤로 물러서. 내가 다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러다가 형님에게로 몽땅 죄가 집중되면 곤란하잖습니 까?" 건달의 의리를 내세우며 안될 말이라고 폴짝 뛴 건 망치였 고, "그건 그렇게 합의하여 대처한다 하더라도, 밖에 있는 불나 비 형이나 만두에게 연락을 취해 사후 대책을 준비해야 되잖 겠습니까?" 앞으로의 대비책을 걱정하고 나선 건 남욱이었다. "이번 사건이 중구난방으로 가지를 치게 되면 대책을 세우 는 일도 그만큼 힘들어진다는 걸 알아야해. 모든 것이 나 한 사람의 책임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이 불거지면 불거질수록 불리한 쪽은 우리 조직이니까." 이 말은 망치를 겨냥하여 건네준 말이었고, "외부에 있는 불나비나 만두와의 접선도 내가 다 알아서 처 리한다." 한 것은 남욱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형님. 아무쪼록 건강 조심하십쇼. 짜부들이 덤벼드는 꼴세가 단단히 올가미를 씌울 작정인 것 같더군요." 머리 회전이 빠른 남욱이 사장의 지시를 즉각 받아들였다. "우레와 번개가 쳐 세상이 시끌벅쩍 해지더라도 자기 한 마 음 굳건히 지키고 있으면 되는 거야. 마음이 흔들려선 죽도 밥도 안돼." 모주영감에게 들은 말을 사장이 남욱과 망치에게 되돌려주 는 것으로 저녁 시간을 이용한 세 사람의 접선은 끝났다. 셋 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 다. 장반장, 박용남, 모주영감 등 세 사람의 대질 신문이 차례차 례 실패로 돌아갔으나, 험상궂은 사내와 주먹코는 끈질기에 사장의 뒤를 추긍했다. 세 사람이 돌아간 후에도 다섯 사람이 나 더 불러들여 사장과 맞대면시켰던 것이다. 그같은 등살에 사장은 무려 사흘 동안이나 취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끝 없이 '모른다'와 '아니다'로 일관한다고는 하지만, 지루한 반복 처럼 사람의 심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방법도 달리 없을 것 같 았다. 사장은 물 먹은 솜처럼 지치기 시작했다.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는 일은 결국 국녹을 먹고 사는 너희 들의 몫이다. 세상에 어떤 시러베 자식이 자기가 저지른 죄를 고스란히 털어 놓겠는가. 그럴 작정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짓에 손을 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사흘만에야 취조에서 풀려나 사장이 지하에 있는 비둘기장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남욱과 망치를 비롯하여 많은 졸개들이 초주검 이 되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취조를 받을 때 끝내 시인을 하지않자 취조관이 심하게 구타를 가한 모양이었다. 초주검이 된 졸개들을 보자 사장은 마음이 울적해졌다. 터벅터벅 망치 앞으로 다가간 사장이, "망치야, 어디 다친 곳은 없니?" 하고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망치는 그러나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험상궂은 사내와 주 먹코는 훗날의 보복을 두려워해서인지, 아니면 건달 두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는지, 사장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었다. 사장이 망치 옆에 있는 남욱 쪽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이봐, 당신이 독사파 차회장이야?"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 렸다. 사장이 천천히 등을 돌려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여 기 저기서 후레쉬가 터지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다. KBS 와 MBC에서 나온 기자들이 카메라 앵글을 사장 쪽으로 들이대 었다. 유치장 입구는 순식간에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돌변했다. 언론이 냄새를 맡았다는 증거였다. 이제 와서 새삼 부끄러울 건 없었으나 우선 얼굴이 세상에 알 려진다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면서 옷자락 으로 얼굴을 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장은 카메라로부터 등 을 돌렸다. 기자들이 무어라 아우성을 치며 지껄여대었으나 한 마 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이 싫어졌다. 한동안의 취재 전쟁이 끝나자 유치장 안은 썰물 때처럼 휑뎅그 렁한 고요가 밀려들었다. 사장은 심신이 피로하여 끄응 하고 모로 쓰러졌다. 그날 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사장의 모습이 전국에 방영되었 고, 다음 날 신문에는 산본파에 대한 기사가 사회면 톱을 장식했 다. --산본 신도시에 조직폭력배 개입! --독사파 두목 차회장 계보 속속 드러나 --줄잡아 30--40억은 갈취한 듯 --신도시 건설 관련 특급 비상! --내연의 처는 삼십 대 유부녀…… 여러 신문에 소개된 제목과 부제목들이었다. 내연의 처 운운한 신문은 망치가 유부녀와 놀아난 사실까지도 냄새를 맡고 함께 엮 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신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보도는 자제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모주영감의 말대로 우레 소리가 사방 백리를 넘어서 남한 땅 전역을 강타한 셈이었다. 이를테면 여론 재판이 선행됨으로써 산 본파의 오금에 칼침을 놓은 것이었다. 사장의 사진이 무슨 무슨 간첩단 사건의 배후조정자처럼 둥근 원으로 처리되어 각 신문에 실렸다. 이제 무사히 풀려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 다. 사장은 곧 서초경찰서로 옮겨졌다가, 수갑을 찬 지 닷새만에 인 덕원에 자리한 서울구치소로 송치되었다. 꿈 속에서 아우라지강을 건넜다가 깨어나자마자 백팔십 도 환경이 바뀐 곳으로 자리를 옮 긴 셈이었다. 구치소로 송치되기 전 날 시라소니가 면회를 와서 불나비의 전 언을 고했다. 불나비 역시 수사상의 표적 대상이라 함부로 밖을 나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언론에 독사파의 2인자로 보도가 된 상태였으므로. "구치소 안에 있는 건달들에게 형님이 곧 들어갈 것이라고 연 락을 취해 놓았답니다요. 불나비 형과 만두 형은 지금 안전한 곳 에 잘 피신해 있고요, 나머지 부하들은 일단 안전지대에 산개시켜 놓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습니다요. 사후 대책을 강구하느라 목하 고심 중에 있는데, 세상이 좀 잠잠해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 님 빼내겠다고 그러더만요. 형님, 저는 불나비 형의 의리를 누구 보다도 굳게 믿습니다요……." 시라소니는 '…니다요.'를 반복해서 지껄여대기로 작정한 놈 같 았다. "그만 지껄여라. 그러다가 혓바닥에 바늘 돋을라." "네, 그만 지껄이겠습니다요, 형님. 한데, 불나비 형이나 만두 형에게 뭐 부탁하실 말씀은 없습니까요? 제게 말씀해주시면 그대 로 가서 전하겠습니다요." "글쎄다, 구치소로 가서 며칠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형님, 변호사 선임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요?" "자금은 걱정하지 말고 특급으로 손을 쓰라고 일러라. 자세한 사항은 구치소 면회실에서 만나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알겠습니다요. 그럼, 형님 부디 몸 건강하십시요." 그러는 시라소니의 두 눈에 글썽글썽 눈물이 비쳤다. 실없는 만 큼 정도 솔찮은 녀석이었다. 서초경찰서 유치장에서부터 사장은 죄인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정식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도 아니건만 경찰들의 행태라는 게 언제나 그랬다. 이미 언론 재판을 통해 체면이 쑥밭 이 된 다음이었고, 또한 조직폭력배라는 멍에 때문에 더욱이나 인 정 사정을 보아주려 하지 않았다. 유치장을 오가는 복도에서부터 앉아, 일어서, 낮은 포복, 원산폭 격 따위로 시달림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참아내기 어려운 모욕이 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자존심이 뭉개져 견딜 수가 없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서울구치소에 도착했다. 사장과 함께 구치소 에 도착한 일행은 10여 명이었다. 교도관들이 일렬 횡대로 늘어서 신참들을 맞이했다. 사제 사물을 일체 몰수당하고, 팬티까지 다 벗은 일행이 이번에는 교도관들 앞에 일열 횡대로 늘어서 명령이 하달되기를 기다렸다. "앉아!" 교도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행은 일제히 그 자리에 납짝 쪼그 려 앉았다. "일어섯!" 일행은 또 발딱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오와 열을 맞추었다. 이어 뒤로 취침과 앞으로 취침, 그리고 낮은 포복과 높은 포복 따위의 얼차려를 받았다. "뒤로 돌앗!" 교도관의 명령에 모두들 군소리없이 뒤로 돌았다. "구십도로 허리 굽히고, 양 손을 이용하여 최대한 똥군용 벌 려!" 일행은 시키는 대로 자신의 항문을 벌려 교도관에게 선뵈었다. "이 새끼들, 그래 가지고 똥군용이 보이니!" 교도관의 발길질이 사장의 궁둥이를 내질렀다. 사장은 그 자리 에서 앞으로 팩 고꾸라졌다. 비참했다. 보통의 예비 죄수 같았으 면, "내가 왜 이럴까? 사회에 있을 땐 안그랬는데!" 하고 군대에서 의 고문관처럼 수없이 복창을 했을 터이지만, 교도관은 웬일인지 사장에게 그같은 주문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네가 산본을 주름잡던 독사라며?" 하고 빈정거렸다. 일행 중 절반 이상은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녀석들인데, 순간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사장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며칠 전 삼천리 방방곡곡에 이름을 드날렸던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 독사인 줄을 미처 몰라 보았다는 눈초리였다. 사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교도관도 무슨 까닭인지 더이상 댓 거릴 않고 시선을 다른 녀석들에게로 옮겼다. "다시, 여자 거시기처럼 뻥 뚫어지게 똥군용을 벌린다, 실시!" 교도관의 고함 소리와 함께 일행들은 일제히, "실시이……!" 하며 말꼬리를 올리면서 자신의 항문을 최대한 벌렸다. 고분고분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가는 언제 구둣발이 날아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장은 그러나 그대로 자리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다른 교도관들도 그런 사장에게 이러쿵저러쿵 말꼬 리를 달지 않았다. 그제서야 사장은 일부러 예우를 해주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너, 이 새끼 이루 와봐!" 교도관이 한 놈을 지적했다. 녀석의 오른쪽 팔뚝에는 여자의 엉 덩이 곡선을 연상케 하는 동글납짝한 하트 모양과, 그 중앙을 화 살촉이 뚫고 지나가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랑에 기갈이 들렸 던 녀석인지도 혹 모를 일이었다. 산본파의 졸개는 아니었다. 녀 석이 쭈볏쭈볏 교도관 앞으로 다가갔다. "너 별이 몇 개야?" "네, 이번에 달면 새 개쨉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개새끼, 뒤로 돌아 다시 똥군용 벌려 봐!" 녀석이 민적민적 뒤로 돌아 항문을 벌렸다. "최대한 벌려, 이 새끼야!" 녀석이 그야말로 똥구멍이 찢어져라 최대한 항문을 벌렸다. 교 도관이 손을 뻗어 녀석의 항문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여우같은 새끼. 강아지 숨기는 법은 어디서 배워가지고……" 하면서 교도관이 대번에 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철썩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어 잘 난 게 있다고 문신까지 새겼니, 이 새끼야!" 연이어 교도관은 구둣발을 날려 벌거벗은 녀석의 몸을 짓이겼 다. 녀석의 항문에서 나온 물건은 얇은 비닐 보호막 속에 감추어진 담배 한 개비였다. 담배를 항문 속에 감추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풍선 속에 뽕을 넣어가지고 입 속으로 꿀꺽 삼켰 다가 대변을 본 다음 그것을 찾아내 복용하는 상습자도 있을 정 도였다. 그같은 비리 때문에 구치소의 교도관 앞에 불려가게 되면 일단 갖가지 기합부터 받게 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죄수들의 교화를 담당하는 교도관이지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사정상 그럴 수밖 에 없다는 것이 교도관들의 주장이었다. 특히나 벌거벗겼을 때 몸 에 문신이 있는 놈이나 불량배들은 사정없이 조져대기 일쑤였다. 그리고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들어온 건달들은 기를 꺾어버리기 위해 작신작신 짓밟는 일도 상례가 되다시피했다. 교도관 역시 징역을 사는 죄수들과 엇비슷한 처지라서 그런지 도대체가 인정사정이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구치소였다. 교도관 들은 미결수건 기결수건 간에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려 들지 않는 경향을 대체로 갖고 있었다. 그 중엔 무지막지할 정도로 잔인한 위인도 있기 마련이었다. 환갑을 넘긴 노인들도 그런 교도관에게 걸려들면 아얏 소리도 못지르고 작신작신 짓밟히는 경우가 있었 다. 기합과 몸 수색이 일단락되자 죄수복이 지급되었다. 사장의 죄 수번호는 1007번이었다. 백팔번뇌에서 끝자리 수는 일이 모자라는 대신 중간에 영이 하나 삽입된 번호였다. 끝수가 럭키 세븐이라 기분이 언잖진 않았다. 별안간 자신이 처한 환경이 급변하였을 때 사람들은 턱없이 미신적 속성을 드러내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사 장이 담당 교도관을 따라 15사(舍) 상(上) 8방(房) 안으로 들어섰 을 때는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독사 형님, 지금 들어오십니까?" "반갑습니다, 내일 식전에 찾아뵙겠습니다." "오늘은 우선 푹 쉬십시요, 형님." 밤 9시면 정확하게 취침에 드는 시간인데 아직껏 잠들잖고 기 다리고 있다가 입감 인사를 건네는 녀석들이었다. 대개가 건달 세 계에 몸담고 있다가 쇠고랑을 찬 녀석들일 것이었다. 불나비가 사 전에 연락을 해놓은 때문이었다. 밖에서 조직 활동을 하면서 사장 을 직접 보았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큰 조직의 보스가 입감할 때 는 너나없이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이 그 바닥의 상례였다. 사장은 일일이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그래, 지금 들어오는 길이다, 모두들 반갑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심사가 아니었다기 보 다는 우선은 심신을 눕히고픈 마음이 앞섰다. 사장이 들어간 8방 에는 수감된 건달이 없는지 누구 한 사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모두들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잠이 들어 있었다. 가운데 자리에 한 사람 누울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모포까지 깔끔하게 정돈해 놓았다. 사장의 취침을 위해 사전에 세심한 배려를 해놓은 것이었 다. 사장은 자리로 가 누웠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머리 속에는 온갖 세상사가 다 들어앉은 듯 와글와글 들끓었다. 사장은 밤새 잠을 못이룬 채 전전반측하다가 새벽녘에야 깜북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아니 그 시간이면 사장에겐 아직도 한 밤중이었다. 사회에 있을 때는 한창 잠 속에 파묻혀 있을 그런 시각. "형님,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인사를 온 건달들이 안부를 묻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사장이 모포 속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을 때 8방 앞에는 무려 50--60명 이나 되는 건장한 사내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북적대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서울구치소가 새로 지워진지 얼마 안되었을 때 였다. 동양 최고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고 언론과 방송에서 떠 들어대던 기억이 사장에게도 남아 있었다. 모든 옥사가 내부로 서 로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다른 옥사에 있는 녀석들도 소식을 듣고 새벽같이 몰려온 것이었다. 변소만 하더라도 뼁끼통 시절에서 퐁당식을 거쳐 이제는 수 세식으로 바뀌었을 만큼 세월이 많이 좋아진 게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옥사 밖과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어 외부로의 출입은 불가능했다. 구치소 안의 옥사를 지키는 교도관들도 건달들의 운집을 무 작정 막을 수만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전 옥사가 들썩들썩해 질 게 뻔했으므로. 눈감고 아옹하는 식으로 대개는 옥사와 옥 사 사이로 통하는 철장문을 터주게 마련이었다. 건달 세계의 한 보스가 들어온 까닭에 같은 건달로서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데 어쩔 것인가. 그 대신 교도관들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곧바로 돌아와야 돼. 약속을 어길 때 는 어떤 불이익이 돌아가더라도 나는 책임 못져." 하고 오금 을 박는 게 고작이었다. 구치소 안은 사회와는 달라서 주먹 센 놈이 대통령이었다. 교도관들도 조직 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건달들은 함부로 건드 리지 못했다. 물론 처음 몸 수색을 할 때는 예외지만. 어떤 고 참 건달들은 교도관들과 아예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경우도 있 었다. 사장은 앉은 자리에서 건달들의 문안 인사를 받았다. 자세 히 살펴봐도 눈에 익은 얼굴은 불과 대여섯 밖에 안되었다. "독사 형님, 저는 목포에 있을 때 불나비 형을 모시던 백곰 입니다." "저는 불출이파에서 행동대장하던 꺽쇱니다." "독사 형님을, 로타리 종합체육관에서 여러 차례 뵌 적이 있습니다. 만두 형과도 안면이 있구요." 그렇듯 별의별 놈들이 다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것이 건달들만의 독특한 형태의 의리가 아닐는지. 문안 인사가 끝나고 모두들 왔던 곳으로 돌아가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적막감이 밀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으나 세수를 하고 양치질할 의욕마저 없었다. 그 날 사장은 아침도 굶었다. 며칠이 지나자 차츰 구치소 생활에 적응이 되어갔다. 하지 만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는 미래가 너무 불확실했다. 구치소 안의 고참 죄수들은 사건의 개요나 공소장 내용만 보고도 판사 뺨칠 정도로 정확히 형량을 예측하는데, 사장의 경우는 누구도 선뜻 예측을 못했다. 사건이 너무 복잡미묘하 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검찰에 송치되어 대질 신문을 받고 또 추가 취조를 받았으나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지는 사장 본인으 로서도 오리무중이었다. 끝없이 대질 신문을 하는 것으로 보 아 검찰 측에서도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언론에서 워낙 크게 터뜨린 사건이 되다보니 검찰 측에선 조금도 긴장을 놓 지 않는 눈치였고, 바로 그와같은 변수 때문에 감방 안의 내 로라 하는 명판사들도 형량을 예측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었다. 이틀 건너 한 번씩 시라소니가 바깥 소식을 전하기 위해 면 회를 왔다. 구치소에 감금된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안에 계시기 너무 힘들지요, 형님? 밖에 있는 불나비 형과 만두 형은 허구한 날 형님 걱정으로 해 저무는 줄도 모를 지 경입니다요." 시라소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문을 열곤 했다. "변호사 선임 건은 어떻게 잘 되어 가니?" 사장 역시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지긴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검찰에 불려가 추가로 신문을 받고 있 으나, 사장은 끈질기게 '아니다'와 '모른다'로 일관하고 있었다. 자연 재판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희망이란 배테 랑급 변호사를 선임하여 거기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감 옥에서 헛되이 세월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님, 그게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습니다요. 돈을 싸들고 밤 낮으로 뛰고 있습니다만, 선뜻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는 변호 사가 없는 실정입니다요. 그 놈의 언론이 너무 무지막지하게 떠들어 대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요. 아 무래도 세월이 좀 흐르고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 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요. 그렇게 아시고 형님은 안에 서 계속 지연 작전을 펼치십시요. 세월보다 좋은 약이 없다고 하질 않습니까. 건망증이 심한 국민이라, 시간이 흐르면 여론 의 관심도 차츰차츰 멀어질 것입니다요." 시라소니의 말을 들으니 더욱 난감했다. "이광호 사무장은 찾아가 만나 봤다니?" 서울 남부 지역에서 강력계 형사로 오랜동안 근무하다가 두 해 전인가 사표를 던지고 지금은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 바닥의 배테랑이었다. 사장과는 몇 차례 술을 마신 적도 있고 피차간에 신세를 진 적도 있기 때문에, 부탁하면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건달 못잖은 의리와 소신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불나비 형을 모시고 직접 찾아갔더랬습니다. 이광호 사무 장님이 그렇잖아도 형님 걱정을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요. 문 제는 변호산데요, 그 분 얘기가 조금만 더 사태의 추이를 관 망해 보자는 겁니다요. 소용돌이가 아직은 덜 가라앉았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또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사건이 뻥 튀 겨져서 비화되질 않았습니까요. 마치 찐빵처럼 말입니다요. 해 서 변호사들이 한결같이 꺼려한다는 거예요. 자기 이미지 관 리 차원에서 그러는 거겠죠. 아무래도, 비용을 더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요." "만두가 관리하고 있는 자금이면 충분할 게다. 돈 아끼지 말고 빠른 시일 안으로 확실한 변호사를 잡으라고 해. 아니, 이 사람 저 사람 알아볼 것 없이 이광호 사무장을 붙잡고 늘 어지는 게 훨씬 빠를 지 모르겠다." "잘 알겠습니다요. 돌아가는 대로 함께 최선을 다하겠습니 다요. 형님, 뭐 필요한 건 없습니까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 시요." "나는 그럭 저럭 견딜 만하다." "그런데 말입니다요, 형님. 산본 지역이 곧 신도시 건설을 위한 택지 조성에 들어간다는 정보가 있습니다요. 놈들이 형 님을 잡아 넣은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사전에 모 의된 게 아닐까요. 대책위원회를 희생 제물로 삼은 게 분명합 니다요. 처죽일 놈들이지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우리도 현명하진 못했어. 욕심이 과했던 거겠지. 결국은 욕심이 화를 자청한 폭 이랄까. 모주영감의 말을 가볍게 흘려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 "형님이 빨리 나와 놈들에게 본떼를 뵈주어야 합니다. 이대 로 우리만 당하고 물러날 순 없잖겠습니까요?" "다 부질없는 일이다. 건달도 때론 깨끗이 승복할 줄을 알 아야 해. 그만 돌아가거라. 그리고 하릴없이 면회 자주 올 필 요 없다." "네, 몸 조심하시고 조금만 더 참으십시요, 형님." 시라소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면회실 밖으로 사라졌다. 시라 소니의 어깨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언제부터인지 밖에는 비 가 오는 모양이었다. 쇠창살 밖 유리창을 사선으로 내리긋는 빗줄기가 보였다. 그 날 밤이 깊도록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사장은 가슴에 모포를 덮고 하염없이 대지를 적시는 빗소리를 들었다. 겨울 이 저만큼 물러가고 새봄이 다가오는 소리 같았다. 아, 봄이 다가오는 소리. 감옥의 쇠창살 안에 갇혀 봄 소식을 듣는다는 게 새삼스레 울적한 심사를 자극했다. 두 눈을 감고 사장은 가만가만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루박 차르밧 지루지루 차르밧 차르르르 촉촉 차르밧 지루박 차르차르 지루박 지루루루 촉촉 밤을 밟고 내리는 빗소리는 자연이 연주하는 천상의 음악 같았다. '난 말예요. 비가 오는 날이면 어쩐지 섹스를 하고 싶어요. 아주 오래도록. 비가 그칠 때까지 계속. 사장님은 혹 그런 느 낌 받아본 적 없어요?' 승혜를 처음 만나던 날 밤이었을 것이다. 호텔의 침대에 누 워 빗소리에 귀를 적시며 그녀가 문득 물었었다. 여자의 몸을 안아본지도 무척이나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스척스척 가슴을 스쳤다. 오늘 다시 승혜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면 뭐 라고 대답할까. "그래, 빗소리를 들으니 나 역시 섹스를 하고 싶군." 꼭 승혜가 아니더라도 여자의 가슴이 못견디도록 그리워지 는 밤이었다. * * * 끝 * * *